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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un 24. 2020

사실은 흠 없는 삶을 열망했을 때

그럴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대학교 4학년 여름 때였다.

그때 나의 하루는 정말 ‘기상-열람실-(가끔 걱정으로 베개에 두 줄기 눈물 자국을 찍으며) 잠’의 반복이었다.

워낙 걱정이 많은 성격이고, 임용을 한 번에 합격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독하게 시험 준비를 했었다.


 그날도 일어나서 괜히 다 보지도 못할 거면서 가방이 터져나가게 교육과정 책과 지도서를 챙겨서 열람실에 도착했고,

포스트잇으로 둘러싸인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그 날은 정말로 머리에 들어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뭔가 새로운 게 들어오면 지금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다 날아가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꾸역꾸역 뭔가를 외워보려고 했지만, 정말로 머릿속이 빽빽하게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체크카드 한 장과 슬리퍼에 고무줄 바지 차림 그대로 무작정 열람실을 나왔다.


 학교 주변만 산책하고 돌아가야지 했는데, 뭔가 버스를 타고 싶어 졌다.

딱히 가야 할 곳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무작정 오는 버스를 타고 두 세정거장을 지나 내렸다.

우리 교대 근처에는 정말 대학가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놀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딱히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냥 길가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점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기쁨의 투스텝으로 서점에 뛰어들어갔다. 이 무슨 모범생 코스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워낙 서점 가는 것을 평소에 좋아하기도 하고 정말 그 당시 내가 서있던 그 거리에는 갈 곳이 없었다.

지도서나 교육과정 외에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읽는 것은 미뤄두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시험과 관련 없는 책이라면 뭐든지 재밌게 느껴졌다.

갑자기 캘리그래피 책도 재밌고, 재테크 책도 흥미롭고, 정원 가꾸기 책도 재밌는 걸 보니 몰랐는데 나 식물 가꾸기 좋아하네 하며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보았다.

그러다가 시집 코너에 가서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시집을 읽게 되었다.

첫 장부터 훌훌 시를 읽어보다가 마음이 댕-하고 울리는 시를 발견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까지 마음이 둥당둥당 울렸다.

너무나도 유명한 ‘청춘’이라는 시였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이 부분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깐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심보선 <청춘> 중에서-

 


어렴풋이 느껴왔지만 무슨 감정인지 알지 못해서 명명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마음들에 이름이 붙는 느낌이었다.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나날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잘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혼자 숨이 벅차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웃어넘길 수 없는 마음들과 순간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이 문장을 발견한 것이 너무 기뻐서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시집을 사서 열람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뛰어오르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마음을 느낀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받았던 걸까, 그동안 어떤 마음인 줄도 모르고 아팠던 순간들을 정의 내릴 수 있음에 대한 후련함일까.


 하지만 잠깐의 마실과 마음을 울리는 문장의 발견으로 인한 행복의 콧김은 열람실 문을 여는 순간 차갑게 사라졌다.

열람실은 조용하기보단 적막했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뛰쳐나가기 전 보던 페이지 사이로 끼워둔 볼펜을 빼고 다시 지도서를 펼치며 아프지 않고 멀쩡한 삶에 대해서, 살고 싶은 마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은 정말이지 흠 없는 삶을 오래도록 열망해왔음을 깨달았다. 그럴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혼자서 외로움과 슬픔을 삭힌 순간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들과 마음들이 고여서 매일이 눈물이 날 것처럼 출렁거리는 기분 속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기에는 아마 시험이라는, 나에게 더 집요하게 집중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크게 그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그때보다는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사는 게 가끔은 벅차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잘 살아보려는 마음에 혼자 숨이 벅차다. 사실은 상처 받고 싶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마음과 말들에 두려워지고 슬퍼지는 게 가끔은 지겹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사실은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흠 없는 삶을 여전히 열망하곤 한다.

너무나도 살고 싶어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그 문장을, 그 마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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