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커리어 테라피 안내서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년 전, 나는 일기장에 조용히 고백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험 매슬로는 '욕구 위계 이론'을 통해 자아실현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 안전 및 소속의 욕구가 모두 충족된 후에야 찾아오는, 우리 마음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를 차지하는 상위 욕구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자아실현이란 매슬로가 말한 것과 같이 마음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마치 마음의 피라미드가 뒤집혀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가진 모든 욕구의 출발지였다. 천장 위에 수없이 그려지고 지워지는 꿈의 세계를 헤매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수없이 보냈다. 드라마에서 따왔을 법한 커리어우먼의 일상이 주요 장면이였다. 사원배지를 당당하게 목에 걸고 두툼한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아침, 높다란 빌딩의 허리에 위치한 나의 작은 책상 위에서 반짝이는 도시야경을 배경삼아 샘솟는 크리에이티비티를 뿜어내는 야근의 밤, 동료들과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프로젝트를 함께 완성시키는 모습... 대학시절 내내 나의 모든 몸짓은 그 하나의 꿈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꿈을 꿀 때면 식욕이 돋았고, 안전을 느꼈고, 소속감을 느꼈고, 존중받는 것만 같았다. 꿈이 사라졌다 느낄 때면 잠을 설쳤고, 세상이 모두 불안하게 느껴졌고,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다.
‘자아실현이 곧 꿈이고 꿈이 곧 직업이다’. 이 마음의 공식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 하나의 길을 위해서 삶의 다른 것들을 옆으로 제쳐두라고 들었다. 중요한 학교시험은 '명절 프리패스'가 되어 친척들을 찾아뵙지 않을 핑계가 되었고, 고등학교에서 조차 체육수업 음악수업같은 비수능과목은 선생님들의 지휘 아래 수능준비 자율학습 시간으로 대체되곤 했다. 이것이 아주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한국 특유의 성공의 내러티브이다. 나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열심히 그 내러티브에 참여했다. 내 앞에 그어진 선 바깥의 것들을 쳐다보지 않은 적은 없으나, 그 선을 쭉 따라가면 정답이 나온다는 믿음은 한번도 버린적 없었다. 취직이라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모든 공부와 노력의 결과물이며 자아실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성공의 내러티브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를 오게 되면서부터 였다.
2013년의 샌프란시스코. 이제 막 페이스북이 직원 13명 규모의 인스타그램을 10억달러에 인수했고,우버는 한국에 진출할 꿈조차 꾸지 못할 정도로 작았고, WeWork은 유니콘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며, 구글이 아직 구글글래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스타트업 오피스의 클리쉐가 되어버린 탁구테이블이 아직 멋지고 쿨하게 보이던 때였다. 테크와 스타트업 문화는 이미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세계를 주름잡은 공룡들로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누구든 세상을 혁신할 수 있다는 파릇하고 민주적인 낙관주의 정신으로서였다. 70년대의 자유로운 히피들이 일궈낸 유연하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토양이 되어, 도시는 기술력에 창의력까지 동반한 세계적인 인재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이 표현하는 꿈과 아이디어가 도시의 역동적인 리듬과 희망을 만들어내는 선순환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나이나 학력을 묻는 대신 각자가 가진 아이디어를 교환했고, 그러한 날것의 대화들이 오늘날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느끼는 당대의 혁신과 세계적인 기업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곳에, 이제 막 비행기에서 이민가방과 함께 내린 내가 서 있었다. 나는 테크종사자도 아니었고, 대단한 인재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영어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낙동강 오리알, 그리고 그 오리알에서 태어난 미운오리새끼가 딱 나였다. 짧은 인생동안 나름 착실히 쌓아올린 나의 짧은 이력서는 하루 아침에 가치를 잃었다. 현지인들은 나의 이력서 위에 적힌 학교의 이름과 소속했던 기관들의 수준과 명성도, 한국사회의 뉘앙스와 트렌드가 반영된 대외활동의 가치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나의 노력을 기억하고 보증해주는 가족도 친구도 이곳에는 없었다. 아울러 이 곳의 노동시장은 내가 그동안 겪어왔던 그 어느 종류의 경쟁과는 규모와 다양성 측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이는 구직자들간의 경쟁의 강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더 넓은 세상의 현실,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열심히 쫓아간 성공의 내러티브는 숨막히도록 곧게 뻗어있었지만 적어도 모두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었기에 내가 해야할 일들도 기대할만한 일들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 선에서 튕겨지듯 빠져나와 새로운 곳에서 살아가게 되었을 때, 그리고 거기에 그어진 무수한 선들을 발견했을 때, 고백하건대 희망보다 걱정이 더 컸다.
거의 0이 된 마음으로, 나는 나를, 나의 가치를 이 사회에서 다시 탐색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어장벽과 네임밸류와 자격증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내 안의 그 무엇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수능을 보는 마음으로 집중하고 준비하고 희생하면 원하는 커리어를 가질 수 있는건지, 인생은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커리어테라피'라는 성찰과 치유의 과정은 거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커리어테라피는 궁극적으로 두가지 삶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지난 5년간, 너무 가까워 늘 티격태격하기만 하던 친언니부터 이제 막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사람들, 저 멀리 다른 나라로 이주한 옛친구들까지 내 삶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인연들에게 커리어에 관한 질문을 건넸다. 나의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일상에서 한발짝 물러나 철학적 질문을 건넨다는 것은 꽤 어색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영감과 지혜를 선사하는 숨은 뮤즈들이었다. 평범한 사람치고 비범하지 않은 사람 없고, 비범해보이는 사람도 결국은 평범하다는 걸,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비범한 일을 해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지혜를 찾는 노력은 성공을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신화화(mythify) 시키는 일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정의를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예방해준다. 그 어떤 베스트셀러도, 유명일간지의 성공스토리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이 되는 것이다.
챕터 [대화: 커리어 영감]과 챕터 [대화: 커리어 변주곡]은 그 대화들의 일부이다. 첫번째 챕터는 꿈을 잃었거나 방황하던 젊은 친구들이 어떤 계기와 영감으로 지금의 커리어를 발견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과 방황과 발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이유는 내가 그 당시 방황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기꺼이, 관대하게 자신들의 속살과 같은 경험과 지혜를 들려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원하는 일을 찾고 오늘날까지 새로운 도전을 계속 꿈꿔올 수 있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들의 국적과 자라온 환경은 모두 다르지만, 그 다양성이 오히려 우리 모두 결국은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두번째 챕터 [대화: 커리어 변주곡]은 결혼, 이민, 육아 등 삶의 굵직한 변화 속에서 개인의 커리어 및 직업 철학이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관한 대화이다. 첫번째 챕터가 첫사랑과 같은 커리어 초반의 풋풋한 감정과 열정에 대해 논한다면, 두번째 챕터는 마치 부부의 사랑을 논하는 것처럼 커리어를 조금 더 장기적이고 성숙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한마디로 글쓰기이다. 나의 경우 글쓰기를 통해 ‘자아실현’이라는 거대한 단어에 묶여있던 구체적인 욕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 속에 내가 많아 혼란스러운 자아를 이해해보기 위한 시도였다. 사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타인에 대한 글쓰기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대부분의 글을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과 함께 시작을 했다. 글을 써나가면서는 '내가 뭐라고!'라고 외쳐대는 회의감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포인트였다. 글쓰기는 바로 그 모든 뒤섞인 감정들을 꺼내놓는 과정이요, 자기긍정과 자기이해의 시작이었다. 몇번이고 몇년이고 글을 써나가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꼬인 실타래가 풀리듯 응어리졌던 감정이 점차 정리가 되었고, 감정이 뚜렷해지니 생각 또한 명확해져 깨달음과 앞으로의 결심까지 적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뮤즈들이 그러하였듯, 경험에서 얻은 나름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 마지막 챕터 [커리어 테라피]가 담고 있는 주제다. 구체적으로는 언어전공이 커리어에 미치는 영향, 미국 사회에서 깨달은 성장을 위한 긍정적인 마인드셋, 영어에 대한 고민 등을 담고 있다. 특히나 IT비전공자로서 해외 취업을 꿈꾸는 독자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금씩 용기를 끌어 모아 마침내 브런치와 소셜미디어에 글을 꺼내 놓을 때마다 도움이 되었다고 감사의 글을 남기는 이방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은밀한 대화를 세상에 내어놓기를 허락해준 지인들과는 더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 씨실과 날실을 엮듯 대화와 글쓰기의 반복 속에서 커리어테라피라는 글 묶음이 탄생했다. 마침내 꺼내어 놓는 이 글들이 또 하나의 대화의 초대장이 되어 독자님께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리고 나 역시 독자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더한 바람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