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현실로 피워낼 수 있었던 이유
지난 글 <번역의 로망> 을 내고서 연락이 뜸한 소꿉 친구부터 내 글을 발견해 주리라 기대치 못했던 낯선 이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축하인사를 받았다. 이 정도로 축하를 받을만한 내용이 있었나 싶어 얼떨떨했다.
내 기억 속에 그 글은 ‘결심’에 관한 이야기였다. 왜 번역가가 되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본능적 욕망에서부터 회고적인 분석까지 장황하게 나열했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결심의 이유를 추적하는 데 너무나 심취했던 나머지 애초에 ‘책을 번역했고 곧 출간 예정이다’라는 소식으로 첫문장을 시작했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상상력이 풍부해 수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가슴이 뜨거워 수많은 결심을 내리고, 겁이 많아 수많은 결심을 접어내리는 인생을 살아왔다. 결심을 내리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말은 굳이 내가 정밀 묘사하지 않더라도 ‘작심삼일’ ‘새해 소망’과 같은 키워드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바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지만, 다짐을 성취로 달성시키지 못하는 내적 좌절이 반복되면서 만성적인 무력감에 빠졌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어느 순간부턴가 ‘네가 그걸 해낼 수 있겠어’라는 냉소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실패보다 포기가 더 사람을 작아지게 만든다. 실패는 적어도 ‘여정’이라는 멋진 경험을 안겨주지 않던가.
번역가가 되어보자던 어느 여름 오후의 결심도 내 마음에 반짝거리며 남아 있지만, 나는 그 결심을 성취로 이끌어 내준 우직한 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포기하지 말자. 의지를 강하게 가지자.’라고.
그런데 강한 의지를 갖는다는 게 애초에 무슨 뜻일까? 내가 보기엔 ‘행복하세요’나 ‘스트레스 받지 말라’와 같은 타인의 조언과 마찬가지로 실속없고 공허하다. 모두가 습관적으로 기대하지만, 정작 아무도 참뜻을 알지 못하는, 오히려 기대하고 기대려할 수록 멀어지는 그런 단어다.
미국에 있는 손주와 대화하려고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60대 할머니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어렵게 늦둥이를 출산한 뒤 살을 감량하겠다는 초보 엄마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매일 운동을 하겠다고 새해결심을 한 직장인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꾸준하게 글을 써서 책을 내겠다는 작가 지망생의 마음을 좌절시킨다.
우리가 결심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의지에 의존해서다. 애초에 인간의 동기는 오묘하고 복잡해서 굳은 의지 하나만으로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저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들』 에서 다음처럼 인간의 동기를 아름답게 묘사했다.
“사람의 동기는 쥐가 먹이를 쫓듯 단순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동기란 심오하고 아름다우며 지극히 인간적이고 심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하나의 세계다. 이 세계는 구불구불 자란 나무, 미지의 강, 해충, 온갖 식물,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들로 가득한 숲과 같다. 이곳에는 중요할 줄 알았는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를테면 돈)도 있고, 완전히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알고보니 굉장히 결정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하나의 욕망, 하나의 동기가 우리의 내면에 울창한 숲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킨다는 사실. 상상만 해도 너무 멋지지 않은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결심을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나의 내면이 탄생시켜 낸 새로운 숲을 탐험하는 과정이다. 처음 보는 꽃이나 나무의 자태에 감탄해보고, 좋아하던 동물을 발견해 설레어 하고, 그러다가 길도 잠깐 잃어보고, 열매의 새콤한 맛에 피로를 잊어보기도 하다가, 마침내 내가 찾던 보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설령 그 숲에 내가 찾던 보물이 없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다.
‘번역가가 되어보면 어떨까?’라는 짧은 질문을 던진 순간 내 마음 속에 이색적인 숲이 피어났다. 학생으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조직의 틀에 스스로를 짜맞추는 삶의 방식에만 익숙해온 나였다. 일감을 스스로 발굴하고, 손을 뻗고, 네트워크 내에서 매력적인 소스로 자리잡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가꾸는 일명 ‘퍼스널 브랜딩’을 해야하는 프리랜서의 삶은 너무나 낯설어 보였다. 과거에 바람은 커녕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삶을 가능성으로 담아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놀라고 있었다.
그래도 당황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답을 알아내고 싶은 질문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 투성이었다. ‘전문 번역가가 되는 방법'을 구글 검색 창에 입력할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인다면, 내 마음 속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겁에 질린 목소리인가요, 아니면 호기심이 가득찬 목소리인가요? 후자라면 과감히 마음을 믿고 따라보세요.” 너무나 사랑하는 작가 글래넌 도일의 조언처럼, 나는 호기심을 따르기로 했다.
호기심은 미지의 숲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았다. 그리고 의지가 아닌 질문을 따르는 여정은 의지가 생각날 틈이 없을 정도로 다이나믹했다. 질문을 따라가 답을 구하면 그 답은 또 다른 질문을 가리켰다. 구글이 더 이상 답을 주지 못하면, 그나마 가까운 답을 제공해준 사람을 찾아가 이메일을 보내고 댓글을 달았다. 그러다보니 나는 어느새 외국 출판사에 판권 판매 여부를 확인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번역가라는 직업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 조언 상담을 구하고, 번역 포트폴리오라는걸 꾸리기 위해서 내가 속한 전문 분야에서 영웅으로 불리우는 사람에게 당신의 블로그 글을 한글로 번역해도 되겠냐는 요청까지 보내고 있었다.
모든 질문과 모든 답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은 아니다. 번역 수당은 생각보다 적었고, 번역 인력은 과잉공급 되다시피 하여 경쟁이 치열했다. 간절한 번역 지망생들이 많아서인지 번역 아카데미를 수료해야 번역가로서의 자격이 생긴다느니, 에이전시에 들어가야 제대로 된 일을 구할 수 있다며 임의로 시장의 규격과 틀을 규정하는 목소리도 컸다.
사실 번역일 뿐 아니라 세상의 어떤 일에든 자신만이 절대적인 솔루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에게 돈과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그 솔루션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답이 바로 여기 하나 밖에 없다고 외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이들의 고유의 여정을 방해하고 때로는 납치를 하는 것이 문제다.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 뿐 아니라 실질적인 방향을 보여준 것은 답 자체보다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내가 벌인 작지만 과감한 시도, 그리고 낯선 이의 문두드림에 호의적으로 응답하고 정보를 공유해준 사람들과의 소통 속에서 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가 더욱 분명히 보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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