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볼 때 어느 정도의 어둠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 어둠이 어찌 보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은 공포, 두려움, 수치심을 안고 사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라고 얘기한다. 자신의 어둠을 안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진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보며 왠지 모를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남들의 시선에 쉽게 좌우되지 않는다. 남들이 아무리 자신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려 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남들이 아무리 자신의 결함을 드러내려 해도, 그런 자신의 어둠을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저 자기 일을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좌절되든, 안전지대가 없어져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도 그것이 삶이라고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이 두려워하던 일을 마주해도 그 안에서도 기쁨을 발견해 낸다. 이런 사람들, 즉 자신이 완벽하지 않고, 삶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을 보면 나도 그렇게 자유로워지고 싶어진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스스로의 그런 어둠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는 척하고 회피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내가 아니라고, 내 삶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자기 삶에 어둠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SNS를 통해 밝은 면만을 보여주려 하고 누가 더 행복한지에 대해 경쟁을 한다. 그것의 이유는 이렇다.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SNS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더 행복해졌는가? 더 비교하고 우울해지지 않았는가? 작가 마크맨슨은 한국 사회가 가장 우울한 사회라고 얘기한 바 있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과의 비교로 우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울한 이유가 자신의 어두운 면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결함이 있거나, 내 처지가 말도 안 되게 엿 같기에. 그래서 밝은 것으로 스스로를 덧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울한 이유는 그런 어두운 면 때문이 아니다. 그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우울한 것이다. “내 삶은 원래 이 모양이야 예전부터 이랬어”라고 말하는 자기연민도 결국은 자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자기 삶에 대한 분노이자 환멸이다.
세상은 밝은 면만을 강조한다. 기쁨, 행복, 밝음, 긍정적인 것 등이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데 힘이 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삶에 어둠을 부정한다는 것은 삶의 반쪽자리만 받아들이는 것, 결국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울함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삶의 어둠을 수용하는 것이 어떨까? 어둡다고 생각하는 자신이나 엿 같이 보이는 상황에서조차 그 속에 매력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둠 속에 기쁨이 있다. 빛이 없는 새벽의 낭만에 자유로움이 가득하듯이. 그때는 그 어떤 차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넓은 도로도 텅 비어있다. 그래서 가끔 도로 위를 걷고 싶다는 충동도 생긴다. 술 마시는 사람, 담배 피우는 사람이 밖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것은 모든 하루의 끝이면서 시작이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을 수 있다. 우주의 흑암 속에서 빛이 생기고 태양이 생겼다. 어둠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것은 창조의 원천이 된다. 철학자 니체는 예술은 비극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기업에서도 창의적인 신제품이 나오려면 우선 일상 속에 불편함을 인식해야 된다. 어둠은 결국 우리 일상을 발전시키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
그런 어둠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매 순간을 새벽 속에 살아가는 것, 매 순간을 새벽의 낭만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