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퇴사, 저는 상담사가 아닌데요.

사수도 비전도 없었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by Creative Uxer

처음 해보는 회사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이 회사는 양복에 넥타이를 입는 회사였는데, 아침 일찍 양복을 입고 나와 지하철을 타는 순간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오던 드라마 안의 평범한 회사원이 된 것 같은 기분.

그것은 마치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 같은(물론 실제로도 맞긴 하지만 실감 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정부 프로젝트에 투입돼서 여러 업체와 같이 일해보기도 하고,

입사동기 및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료들과 회사의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또 현실을 체감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유대감을 만드는 일들도 좋았다. ( 운이 좋게도 회사를 확장하던 시점이라 내가 입사한 전후에 80년 초중반 생들이 상당히 많은 수로 입사하였고 우리끼리의 공감대가 많았다. )


업무적으로는 해당 회사가 진행하는 'B2B 사업모델'이 조금은 어려웠기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 마저도 대학교에서와 또 다른 일을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 회사에서의 기획 일을 배우고 화면 설계서를 보며 작업해보는 순간, 이 일을 오래 할 것임을 직감하기도 하였다.


내가 기획한 내용이 실제 대 고객에게 서비스가 되었을 때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출근해서 계속 두 번 세 번 검토해볼 정도로 재미있었고 즐거웠다.


하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는데,

벤처를 벗어나 성공가도를 달리는 회사가 새로 만들어낸 보수적인 문화였고, 그 문제의 연장선 상에서 내 사수(직속상관)와 내가 한 방향을 보기 어려운 상황들에 놓이게 되었다.


먼저, 이 회사는 초기 10명 내외로 시작하여 비어있는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였고, 해당 분야의 1~2위를 다툴 정도로 성과가 좋았다. 내가 입사했을 때 60~70명 정도였는데 이후 1년 내 새로 입사한 사람이 30명 가까이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시기에 입사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 대부분이 1~2년을 채 넘지 못하고 대부분 퇴사하였다. 회사를 확장하기 위해 젊은 직원을 많이 채용했지만, 그 직원들을 케어하고 성장시켜야 할 프로세스와 준비는 되지 않았고, 보수적인 관점으로 그들이 성장한 과정을 똑같이 강요했던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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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man이 되세요'는 겉보기엔 긍정적인 권유였지만 사실 알고 보면 '까라면 까' 와 다르지 않았다.


퇴사하는 사람에게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내심이 없다. 마인드가 안 좋다'로 결론지어 버리기도 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직장을 찾았고 더 좋은 기회들을 잡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대기업 신입으로 입사한 친구들이 1년 안에 1/3은 퇴사한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그 시절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 '회사와 신입사원은 서로 간의 존중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회사가 많구나' 하는 생각 )


또 한 가지의 문제는 사수와의 간극이었는데. 취미도 관심사도 없고 술도 마시지 않는 그분의 취향 같은 건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고, 성별이 달랐으나 오히려 팀 내 팀장이 그분과 같은 성별이었기에 장벽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 지나서 든 생각이지만 '아래의 문제만 아니면' 오히려 서로 반대 성별에 대한 성향이 있어서 잘 맞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


그 문제가 무엇이냐면 '회사가 작았던 시절부터 몇 년에 걸쳐 회사의 경험이 있던' 그분께서는 자신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기를 원했다.

이를테면 자신은 고객 민원을 받는 일부터 하기를 원했다. ( 이 회사의 모델상 IT를 잘 쓰지 못하는 중소기업과 시스템을 갖춘 대기업 과의 연계가 주 모델에 속해있었기에, 상담사가 전담으로 존재함. 나도 그 사수도 그 부서의 소속으로 있었다. ) 나는 그 Role로 입사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부서의 소속으로 있었기에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위계질서에 맞는 것이었다. )


물론 한 달 두 달 경험하는 것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저 민원을 열심히 받다 보면 어느 순간 프로세스를 알게 되고 어느 순간 기획도 할 줄 알게 된다는 그분의 논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획적인 부분에 대한 스킬 / 노하우 / 방향성 어떤 것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콘퍼런스, 기획자 모임,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기획의 맛을 보기 시작했던 내게 그 방법은 너무 느리고 지루하며 답답한 길이었다. 오히려 밖에서의 활동이 더 즐거웠을 때가 많았고 외부에서 배운 것들이 회사 내에서는 부재하고 부족하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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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 있어서 거의 대화가 되지 않았고,

오래가지 않아 나는 '회사에 상담사로 입사한 게 아니다. 이 업무를 하지 못하겠다.'라고 선언했다.

물론 사수의 말을 듣지 않은 꽤심죄와 반항아로 낙인찍히는 건 보너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복하는 상담업무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었고, 이미 퇴사를 각오한 상태였다.


그나마 이 상황을 모두 아는 개발팀장님 덕에 개발팀에 소속되어 따로 일부 기간 더 일을 하게 되었다.

몇몇 정부 프로젝트를 참여하고 또 성과를 내기도 했고, 좋은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체계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나 기획리더를 잡고 있는 그 사수분이 상담사 출신의

나보다 더 어린 다른 직원을 앞세워서 내 기획안을 막아섰다.

( '마치 내 말을 들었으면 네가 이렇게 할 수 있었을 거야'를 보여주듯이. )


몇몇 분들은 시간을 두고 해결해보기를 원했지만,

나에게는 제대로 된 사수가 필요했고 또 빠르게 성장하고 싶었다.

그 의미를 아는 분들은 '좋은 회사에서 기획을 배웠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버틸 만큼 버틴 이후에 첫 번째 퇴사를 하게 됐다.

여러 번의 퇴사/입사를 거치면서 때로는 후회도 했지만, 이때의 퇴사만큼은 후회가 없었다.


모든 신에게 감사하며 입사한 지 1년 2개월 만의 일이었다. 분명 바로 백수가 될 걸 알면서도 두려움도 겁도 없었다. 지금 같으면 이직할 회사를 알아보고 그만둬야 맞는 거지만, 그만큼 어리고 도전적이었으며 과감했다. 고민의 결론이 났을 때 바로 사직 의사를 전달했고, 짐보다 빨리 마음을 빼냈다.


미련 없이 과감하게 했던 첫 퇴사에는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후회되는 퇴사도 있었지만 이 퇴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저 젊은 혈기와 도전에 대한 의지가 이글이글 불타오를 뿐.


그것이 좋은 말로 표현해 열정이었던 것인지, 내 앞을 막던 사수에 대한 경쟁심과 복수심이었는지

동기들과 함께 말하던 정의롭고 긍정적인 회사를 찾아 나가자던 의지였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 나중에 생각해보면 결국 복합적이었던 것 같다. )


그렇게 유일하게 첫직장에 하나 남은 목표였던 퇴직금과 함께 두 번째 회사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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