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문화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
기획실은 기획예산, 홍보, 감사의 세 개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부서장은 대부분 부장급인 것에 비해 한 직급 높은 이사가 기획실장이고, 그 아래 총괄 차장이 한 명이 있으며 각각 과장이 팀장이다. 기획실의 기능과 역할을 고려한 조직일 것이다. 정민이 속한 기획예산팀은 과장 한 명, 대리 한 명, 4급 사원 세 명, 6급 여직원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민은 그 해 유일한 신입사원이었다.
정민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 학교생활과 가장 큰 차이점은, 돈을 받는 대신 책임이 따르는 일을 준다는 사실과 자의든 타의든 다른 사람과 엮이게 된다는 점이었다. 일은 하나씩 배우면서 해결해 나갈 수 있었지만, 인적 관계 형성은 '내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또한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내가 열심히 하고 잘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많은 경우 주변 사람 특히, 윗사람의 영향력이 독립 변수로 작용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할 때는 뭐든 잘 풀렸고 같이 하는 게 즐거웠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는 결과가 좋지 않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즉,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가 일 자체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기획실장 허성만 이사는 심한 사투리를 썼다. 항상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채 머리를 오른쪽으로 30도쯤 기울이고 걸었다. 그는 주로 사장실이나 회장실을 들락거렸으며, 실무는 팀장들과 진행했다. 그 외 직원들에게는 가끔 지나다니면서 농담처럼 툭툭 던지는 말이 전부였다.
허 이사는 건설 출신이었다. 당시 뜨거웠던 중동 건설 붐이 사그라지자, 그룹 차원에서 귀국한 간부급이나 임원들을 계열사 여러 곳으로 전출시켰는데, 유독 많은 인원이 정민의 회사에 배정되었다. 계열사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작아 만만했고, 유통 관련 업무에 별다른 전문성이 필요 없을 거라는 선입견과 주력인 건설이 유통보다 우위라는 우월 의식이 작동했을 것이다.
공기 단축과 불도저로 상징되는 그들의 '경험적 성향'은 다양한 수요 예측과 고객의 니즈 파악을 통해 디테일하고 유연성 있는 접근을 해야 하는 유통 마인드와 맞지 않았다. '내가 사막에서 텐트 치고 일할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태도를, 대부분의 구매 결정자가 여성 고객으로 이루어진 백화점 비즈니스에 무리하게 들이대는 경향이 있었다.
이처럼 다수의 유통 비전문가들이 의사결정권자에 포진함으로써 중장기적으로 회사의 성장과 발전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물론 신입사원 때부터 백화점 매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재들이 없지 않았지만, 외부 유입 인사들의 백그라운드와 강력한 집단 파워를 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차상위 직급으로 버티고 있으니 직급이 깡패였다. 이런 이질감과 부조화는 회사가 업계 선두를 차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쟁사와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룹 내 특정 계열사의 집단 영향력이나 오너와의 충성도 관계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 이사는 훗날 기획실장에서 사장으로 올라섰다. 그는 당시 경쟁사들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던 신규 출점이나 면세점과 할인점 진출 등속의 사업 다각화보다 위탁 운영, 호텔 건설 같이 그룹사와 연관된 일 또는 본인이 아는 일을 중시했다. 자강(自强)을 위한 노력보다는 계열사의 일부로서 역할에 치중하는 성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회사는 시장을 선점하고 점유율을 높여 경쟁사들보다 우위를 점할 기회를 상실했다. 회사는 성장하지 못하였고 중장기적인 경쟁력 확보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사장 재임 기간 중 회사를 인위적 구조조정이라는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선제 조치였다고 강변하였지만, 그 당시 동종 업계는 한창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어느 기업도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사람 자르는 것을 대안으로 선택했다고 했다. 인건비 절감은 인적 효율 제고라는 허울 좋은 명분에 가리어진 가장 손쉬운 수단이며, 숫자상으로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보고서용' 방법이었을 것이다.
훗날 사장에서 퇴임한 후에도 자기 손으로 회사에서 쫓아낸 사람들인 퇴직자 모임에 나가 여전히 사장인 양 비슷한 행보를 보였고, 이번에는 많은 회원이 그를 피해 스스로 탈퇴하였다고 한다. 유감스럽지만 정민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그가 어느 요양 병원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회사가 다른 계열사 인원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이유나, 위기에 이르게 된 속사정, 허 사장의 경영 능력에 관한 것들은 순전히 정민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에 근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진실과는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그에 관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한 사람의 판단이 회사 전체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는 점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물론 허 이사와는 전혀 결이 다른 사람도 있었다. 총괄 책임자인 홍성찬 차장은 기획실에서 가장 선임이고 실세였다. 무엇보다 홍 차장은 업무 역량이 뛰어났다.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않았고 항상 대안을 만들어 낼 줄 알았다. 숫자로 가득 찬 문서를 쓱 살펴보고 틀린 부분을 바로 잡아내는 '신기한 재주'도 있었는데, 그만큼 경험이나 배경 지식이 많다는 방증이다.
또한 다른 부서는 물론 사업 부문장들을 압도하는 리더십과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은근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물론 기획과 예산을 주무르는 실권을 쥐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직원들을 대할 때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는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문서에 작성일을 빼먹었다고 30분을 선 자세로 야단맞은 적도 있지만, 그는 정민을 아끼는 편이었다. 명절 때면 다른 직원 몰래 ○○제화 상품권을 챙겨 주기도 하였다. 정민이 보기에 '몰래'였지, 평소 그의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다른 직원들에게도 그러지 않았을까.
특히, 정민은 홍 차장에게 일을 많이 배웠는데 이는 정민의 직장생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덕분에 이후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정민뿐 아니라 모든 직원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실력자였다.
정민의 바로 위로는 선배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중소기업인 ○○제지 아들인데 경영 수업을 받으려고 입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90cm가 넘는 키에 몸무게가 100kg을 훌쩍 넘는 거구로 소주를 입안에 톡톡 털어 넣는 습관이 있다. 다른 한 명은 평소에는 누구보다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갖췄는데 유감스럽게도 술에 취하면 아무 데서나 방뇨를 서슴지 않는 등 주사가 심했다.
이 두 선배는 술 앞에서 늘 대동단결했다. 온종일 업무가 바쁘다며,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된다며, OJT(on the job training)에는 손을 놓고 있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강남 일대 술집으로 정민을 데리고 다녔다. 그렇다고 술값을 모두 본인들이 내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 날이 되면 여지없이 'n빵'이 날아왔다. 이것을 충당하다 보니 한동안 월급을 받아도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기획실은 자체 예산이 충분한 데다가 중역실 예산이 기획실에 잡혀 있어서 각종 명목으로 쓸 수 있는 돈이 항상 넘쳐났다. 그러다 보니 선배들과 사적인 술자리 외에도 회식이 잦은 편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팀장인 권성희 과장이 있었다.
권성희 과장은 송어회를 좋아했다. 그가 소집한 회식은 매번 ○○대교 사거리에 있는 ○○송어횟집에서 시작해서 역삼동으로 술자리를 옮기는 순이었다. 정민은 생선회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나 정민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당시에는 사원급은 윗분이 주는 술잔을 무릎 꿇고 받았으며, 받은 술잔은 내려놓지 않고 즉시 마신 다음, 입에 닿았던 부분을 티슈로 닦은 후 다시 돌려주는 것이 룰(?)이었다.
기획실은 인사부의 인사 발령에 대한 사전 협의권을 행사했고, 예산 편성 및 승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체로 막강한 권한이었다. 그래서인지 허 이사나 홍 차장 주변에는 늘 여러 사업 부문장들이 맴돌았다. 그들은 가끔 홍 차장에게 예산 초과 사용 신청서를 슬쩍 디밀기도 하였다. 일정액 이상일 경우 기획실의 별도 승인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처럼 높은 분들은 주로 자기들끼리 돈을 쓰고 서무 담당 여직원에게 영수증만 던져주었다. 문제는 가끔 엉뚱한 비용이 청구되기도 하였다. 예산 집행 승인 결재란의 맨 아래 칸에 담당자인 정민의 도장이 있어야 하므로 정민은 자연스럽게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어느 술집에서 너무 신이 나게 '노시다가' 테이블 상판 유리가 깨졌고 이를 변상해줘야 하는 예도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정민이 영업부서에 발령을 받고 매장에 근무하면서 겪어보니 그 정도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 회사는, 아니 그룹 계열사 출신 분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이 그룹은, 참으로 유별난 음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높은 사람이 '소맥'을 만들어 큰 쟁반 위에 올려놓는다. 누군가 쟁반을 들고 지나가면 모두가 한 잔씩 들고 한 번에 마신다. 그 자리의 사람 수만큼 반복한다. 일종의 변종 파도타기(?) 같은 방식이었다. 2차에 가서 양주를 마실 때는 설상가상이었다. 얼음 통을 비우고 그 안에 맥주 양주를 불문하고 술이란 술은 몽땅 붓는다. 거기에 과일 안주를 손으로 부숴 넣는다. 비주얼조차 끔찍한 그 술을 글라스에 퍼서 마시라고 돌린다.
최악은 속칭 '충성주'였는데 상급자가 자신의 신체 부위를 술잔에 담갔다가 빼거나, 신발을 벗어서 그 신발에 부은 술을, 그 기괴하고 더러운 술을 마시게 하는 악랄한 상급자도 있었다. 그걸 충성의 징표라고 주장하니 감히 마시지 않겠다고 거부할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모든 술자리의 뒷감당은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술을 잘 먹고 못 먹고 여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남녀 구분도 없었다. 만약 망설이거나 거절하면 눈 밖에 날 수 있기 때문에 주는 대로 마셔야 했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흐트러진 자세를 보여서도, 자리를 떠나는 것도 안 되었다.
이런 음주뿐만이 아니었다. 툭하면 집합시키는 문화 역시 직원들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때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 걸 '관행'이라고 하나?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했다. 기획실은 평일에 야근이 많았기에 주말은 그야말로 황금 같은 개인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집합 지시가 내려왔다.
허 이사가 산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면 그냥 혼자 가면 되지 왜 굳이 직원들을 이끌고 가는 것일까? 명분은 그랬다. 직원들 건강을 위하여! 고마운 뜻이기는 하지만 혹시 그 내면에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사람들을 복종시키려는 사적 욕망이 내재하여 있지는 않았을까.
정민의 기억 속에 허 이사 말고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정민이 ○○점에 근무할 때였다. 그때는 정민은 과장이었는데, 툭하면 '과장급 이상 ○○산 매표소 앞으로 새벽 5시까지 집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직급이 전무인 점장이 소집하였고 이유는 허 이사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는 새벽녘 산의 정기를 받아야 한다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앞서 걸었다. 그 신발은 애꿎은 그의 운전기사가 들었다.
더 가관인 것은 정상에 이르면 인사팀 과장이 출석을 부르는 장면이다. 추후 '보복'이 두려워 전날 무슨 일이 있었든, 그날 무슨 일이 있든 과장급 이상 직원들은 이 새벽 산행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별일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시절 백화점은 월요일이 정기 휴점일이었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그 쉬는 날 스키장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해야 했다. 직원 복지를 위한다는 이유로 매장에 근무하는 판촉직원과 함께 스키장을 다녀와야 했다. 물론 정민은 덕분에 스키를 배울 수 있었지만 만에 하나 사고라도 생기면 인솔자 책임이었으므로 돌아올 때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쉬는 날이지만 그건 근무의 연속이었다.
정민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린 이 유별나거나 가혹한 기업 문화, '음주와 집합'은 정민의 건강이나 가정생활과의 균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물론 세상에는 다 좋거나 다 나쁜 일은 없다. 그 때문에 얻은 것, 누린 것, 경험한 것들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현재 사회의 눈높이와 가치 기준으로 돌아보면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한 번, 정민이 한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회사에서 개인 사정 같은 건 없는 거죠?"
그 선배에게서 돌아온 답은 이랬다.
"개인 사정? 그게 뭐야? 먹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