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죽기 전에 10화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어

by 화문화답

엄마 지갑을 몰래 열고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훔쳤다. 건빵 한 봉지를 사서 온종일 먹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배부른 만족감은 잠시뿐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에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문 앞을 기웃거리다가 해 질 무렵에서야 슬쩍 고개를 디밀었다. 이제나 저제나 마루 끝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형은 나를 끌고 강둑으로 갔다. 그리고 맞았다. 아프냐? 그 돈 벌려면 부모님도 힘들고 아픈 거야. 강 건너로는 붉고 커다란 해가 지고, 내 명치끝에는 뭔가 뜨거운 덩어리가 맺혔다. 엄마, 잘못했어요. 울먹이는 나를 안고 엄마도 울었다.


단지 20원짜리 건빵 한 봉지가 그렇게 먹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게 전부였지만 이후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은 건빵 한 봉지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무거워졌다. 어떤 때는 생존의 조건이 또 다른 때는 욕망의 덩어리가 손을 내밀었다. 때로는 얻었고 또 때로는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엄마의 지갑을 열지 않았고, 어쨌든 매 순간마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이제 그걸로 퉁치기로 한다. 얻은 것들도 잃은 것들도.


'나는 북이고 종이었다. 두드려야 소리가 난다. 누가 두드리지 않으면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내내 울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안목 없고 솜씨 없는 사람을 만나면 이리 깎이고 저리 굴려 못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홀씨였다. 바위에 떨어지면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기에 씨앗은 숙명과도 같은 흙을 만나야 한다. 하지만 이제 누가 흙을 덮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 바람에 날리지도 않을뿐더러, 미혹하여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을 영원할 줄 알았다. 지금 좋으니 나중에도 좋을 줄로 여겼다. 하지만 아름다운 저녁노을은 잠깐 만에 어둠으로 변하고, 마음을 씻어주던 물소리도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라져 버렸다.' (정민, 습정에서 발췌 인용)


이제 알았으니 되었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은 그걸로 퉁치고, 아름다운 사랑은 저녁노을처럼 보고, 쓰고 단 말들은 물소리같이 들을 것이다. 그렇다고 도가 사상의 무위자연이나 니힐리즘은 아니다. 그냥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 보자는 것이다. '하지 못한 일이 아니라 아직 하지 않은 일' 같은 걸 하면서 말이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그 목적이 되어줄 것이고 목표가 될 것이다.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아내와 함께 아름다운 이국(異國)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두 번째는 태안반도와 변산반도를 거쳐, 남해의 언덕 위 지붕 파란 집에 머무르다가,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가는 자동차 여행이다. 세 번째는 제주 올레길 437km를 완주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운종재에서 러스틱 라이프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의 다섯 번째 버킷리스트이다.


더 이상은 나의 지혜가 나의 어리석음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버킷리스트에 줄을 그어나갈 계획이다. 내가 내게 주는 아름다운 추억과 낭만이 넘치는 선물이 될 것이다. 때로는 혼자 가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 못할 경우도, 다르게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상관없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내 마음대로이니까.


어차피 세상살이는 뭐든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또한 안될 것은 죽어도 안되고, 될 것은 어떻게든 된다. 그러니 너무 힘 빼지 말고, 너무 조바심 내며 살 건 없다. 세월 앞에서는 누구나 확실히 평등하다. 한 사람의 삶은 어쩌면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을 설명하느라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 없이, '그래,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싶은 거 다 했잖아!'라고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들 삶의 본질은 그렇게 새 털같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새 털처럼 가볍게 살자. Why are you so serious?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어! 자 그럼 이제 뭐부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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