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빨리 먹기 신공
대한민국 학교 무상급식은 현재 대부분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보편적 교육 복지 정책이다. 과거에는 저소득층 학생에게만 급식비를 지원하는 선별적 복지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2010년 이후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논의를 거쳐 현재와 같은 전면 무상급식 체계가 구축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지만, 사실 처음에는 학교 급식이 학생뿐 아니라 학교에 근무하는 모든 이에게 무상인 줄 알았다. 내심 그런 공짜 심리가 깔려 있어서였을까? 출근을 한참 앞둔 어느 날, 학교 영양사가 문자메시지를 보내 급식 신청할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당연히 먹겠다고 대답했다.
인수인계받으러 간 날 재차 확인까지 하는 것을 보고, '역시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임시 계약직한테 이런 것까지 신경 써 주네'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런데 아니었다. 친절과 배려라기보다는 식수 인원 확보 차원의 영업 활동에 가까웠다. 한 달 후 급식을 더는 먹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분들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누구나 끼당 6,800원을 내야 했다. 첫 달이 지난 어느 날, 20 일분 밥값 136,000원을 입금하라고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달부터는 7,400원으로 인상 예정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식권을 판매하거나 급식실에서 어떤 체크를 하는 것이 아니고, 급식실 오픈일 곱하기 끼당 단가로 계산해서 청구하는 방식이었다. 만약 휴가나 출장 등 개인 사정이 있으면 일일이 행정실 급식 담당에게 통지해야 했다.
교사의 점심시간은 유동적이다. 수업 시간과 급식실 혼잡 시간대를 감안하여 각자 루틴이 정해져 있다. 대부분의 여자 선생님은 간단한 도시락을 지참해서 휴게실에서 먹고, 그 외 급식을 먹는 분들은 상황에 따라 혼자 또는 식사 파트너와 함께 교직원 급식실에 가서 식사한다.
교직원 급식실은 학생 급식실과는 달리 열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이다. 보통스러운 자율급식대이고 특별히 감동적이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전형적인 '구내식당 밥'이다. 다만, 한참 성장하는 아이들을 기준으로 한 식단이라서인지 전반적으로 칼로리가 높은 음식이 많은 편이었다.
취업부장은 대부분 10시 50분이면 식사를 가는데, 그 시간대가 가장 한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같이 가자고 해서 몇 번 따라갔다. 나를 챙겨주고 배려하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더니,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의 원래 식사 파트너였던 다른 남자 교사들 쪽으로 합류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 날이면 식사가 끝난 후 주차장 한구석에 모여 서서 수군수군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그분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 학교의 남자 교사는 통틀어 다섯 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혼자 식사하는 날이 많아졌다. 뒤늦게, 그리고 본의 아니게 요즘 대세라는 '혼밥 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분한테 느닷없이 '같이 식사하러 가시겠어요?' 하는 것도 모양이 이상하다. 물론 내가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특별한 이슈가 없고 공유되는 일들이 없다 보니 서로 말 붙일 기회를 갖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부분이 여자분들이어서, 섞여 들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학교에 근무하는 분들은 어떻게 식사하는지 궁금했다. 단톡방에 질문을 올렸더니 반응이 뜨겁다. 그만큼 사소하지만 민감하고 신경 쓰이는 문제라는 방증이다. 취업지원실이 따로 있는 학교는 그 안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는다고 했고, 나처럼 교무실에서 근무하는 분은 취업부 교사들이 같이 식사하러 가자고 챙겨 준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학교의 취업부 선생님들은 그런 부분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나이 많은 아저씨' 핸디캡이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르기에 서운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교사들은 점심시간이 근무에 포함되어 있다. 아마 그 시간에도 학생들을 지도하라는 취지일 것이다. 그래서 아침 8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이다. 그러나 나처럼 일반 근로자는 8시간 근로에 한 시간 휴게 시간이 별도이다. 따라서 5시 퇴근이다.
즉, 나에게 점심시간은 엄연한 휴식 시간이다. 그럼에도 취업부장은 할 얘기가 있으면 꼭 그 시간을 활용했다. 식사 중에 그리고 식사 후 운동장이나 주차장 한쪽 구석에 끌려가서(?) 여러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다 보면 한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점심시간의 용도 차이 외에도 학교 급식은 가깝고 편리하다는 강력한 장점에도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그중 첫 번째는 '자발적 눈칫밥'이다. 좁은 공간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선생님들을 보면 왠지 불안해졌다. 혼자 앉아서 밥을 먹다가 간혹 서 있는 분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빨리 먹고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선생님들 아닌가!
어떤 때는 내가 식판을 들고 빈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의 대화가 뚝 끊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다시 일어날 수도 없고,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얘기하시라며 그분들의 대화를 되살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주는 사람 없는 눈치'를 스스로 보며 빠르게 먹어 치워야 하는 밥은 항상 속을 더부룩하게 했다.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이 급하게 먹는 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부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결심했다. 학교 급식을 먹지 않겠다고. 일단 영양사분께 급식 중단을 통보했다. 먼저 손에 쥔 것을 놓아야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외부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든 분이 그렇듯, 또 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매번 어디서 무얼 먹느냐 하는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육개장, 내일은 돈가스, 며칠 동안 학교 근처 식당을 전전하며 점심 노매드를 겪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배너 광고가 생각났다. 구내식당 외부인 식사 환영! 학교 인근에 있는 통신 대기업 지사 앞을 지나가다 본 적이 있었다. 검색해 보니 평이 괜찮았다. 특히, 넓은 공간이라는 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거다 싶었다. 당장 다음 날 그곳으로 향했다.
그 구내식당은 느린 걸음으로 교무실에서 약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교직원 급식실까지 보다 5분 정도 더 걸렸다. 지하 1층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계단을 내려갔다. 피크 타임인 12시 가까이 되었음에도 작업복을 입은 몇몇 분이 오고 갈 뿐 혼잡하지 않았다.
영양사인 듯 흰 가운을 입은 여자분이 입구에서 식권을 받으며 안내를 했다. 식권은 키오스크에서 구매할 수 있었는데 한 장에 6,000원이었다. 현금으로 6만 원을 내면 식권 11장을 준다고 하니 실질적으로 한 끼에 5,500원꼴이다. 외부인은 11시 50분부터 식사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통제는 없었다.
잡곡밥을 따로 보온밥통에 준비해 두는 디테일까지 있었다. 배식대에서 자율 배식을 하고 8인용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았다. 음, 좋군! 과연 맛은 어떨까?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식판에 퍼 담는 짬밥의 수준은 오십 보 백 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절대 나쁘지 않았다. 가격 대비 손색이 전혀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게다가 넓은 공간이 여유로웠고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좋았다. 어차피 혼밥인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보다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으니까 한결 마음이 편했다. 비로소 밥이 입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먹는 문제는 사는 문제이고 중요하다. 그래서 그냥 '산다'라고 하지 않고 '먹고 산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33년 차 직장인이 뒤늦게 부딪친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고민은 이렇게 단박에 해결되었다. 날씨가 나쁜 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좋아졌다. '급하게 먹는 식사'에서 벗어나 한 시간의 여유와 행복을 되찾은 기분이다. 영양사나 취업부장은 외부에서 식사하면 불편하지 않느냐며 뭔지 모를 서운함을 내비쳤다. 하지만 상관없다. 계약이 만료되는 그날까지 쭉 여기서 식사를 할 계획이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면 취업부장과 '식사 안 가세요?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식사하셨어요?' 등속의 의례적인 말만 주고받는다. 다른 취업부 선생님들은 여전히 내게도 그리고 취업부장에게도 관심이 없다. 물론, 그분들의 그런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본인의 파트너인 남자 선생님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 온 취업부장이 내일은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시간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내일 점심시간에는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뜻이다. 당연히 괜찮지요. 근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하루 전에 예고까지 할까? 취업부장이 나에게 긴히 할 얘기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