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문화답 Feb 22. 2024

첫 번째 미션은 유치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발로 뛰라고요!


나의 직무는 취업지원관이고 취업부 소속이므로 업무를 포함한 모든 사항이 취업부장의 관할 아래에 있다. 따라서 영향력이나 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취업부장과 마주 앉아서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딱히 와닿지를 않는다. 취업부장의 화법이나 성격이 두리뭉실한 부분이 있는 데다가, 내가 이 학교의 분위기나 체계를 잘 모르는 탓도 있을 것이다. 평소에 취업부가 생성하거나 관여하는 이슈를 공유해 준다면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을 텐데, 그마저도 매번 귀동냥을 하는 형편이다.


눈치코치를 동원해 추측건대, 지금 취업부장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관리자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사항과 결을 같이한다. 해마다 신입생이 줄고 있어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문제이다. 홍보부에서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지만, 취업부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방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직업계 고등학교이므로 설득력 있는 취업 비전을 제시하면 신입생 모집에 중요한 유인(誘因)이 될 거라는 것이 관리자들의 생각이다. 참고로, 교사들은 교장이나 교감을 상급자가 아닌 관리자라고 부른다.


반복되는 요구에도 이 미션에 대한 실무적 해결책이 제시되지 못하자 급기야 윗선에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언급하였다.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익숙한 워딩, 발로 뛰어라!


오늘 취업부장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이에 관한 것이었다. '유치원을 방문하란다. 다음 회의 까지는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어떤 유치원 방문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인근의 대학교 부속 유치원 이름 몇 개를 대면서 행정실장을 만나면 된다고 했다.


고민할 일이 아니다. 나는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본교 학생들이 그 유치원에 취업을 원한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조언을 듣고 싶다.'라는 방문 이유에 대해, 전화를 받은 상대방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처음에는 웃음, 이어서 의아함, 마지막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사실 유치원 입장에서도 나처럼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해


기다란 복도를 따라 교실이 이어져 있었고 방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경비실처럼 창구가 나있는 방에서 40대 중반의 여자분이 나왔다. 실장은 아니고 그냥 행정 담당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소개했다. 나중에 들어온 원장이 미팅에 합류했다.


취업부장은 졸업 후 유치원에 보조교사나 행정실 직원으로 취업이 가능한지 질문을 했다. 행정실장은 취업률을 올려야 하는 특성화고의 입장은 이해하나, 현실적으로 유치원 취업은 어려워 보인다며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그 이유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항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부장은 행정실 취업에 도움이 될만한 자격증은 없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행정실장은 채용 수요 자체가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논지를 반복하며, 민간 자격증으로 실효성은 없지만 유치원행정ㅇㅇㅇ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취업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취업부장은 이 대답을 팩트로 삼아 해당과 학생들이 재학 중 이 자격증을 취득하면 유치원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스토리를 만들 계획인 듯하다. 그러나 설령 가능한 일이라 해도 수십만 원이 드는 이 민간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하는 학생이 있을지 의문이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수업이 있다며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언덕을 한참 올라서 도착한 B유치원은 앞마당에 모래가 깔려 있어 왠지 친숙한 느낌이었다. 마당 한쪽에 스쿨버스 여러 대가 정차해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꽤 있는 편인 것 같았다. 안내받아 들어간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친절한 게 인상적이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남자 선생님의 고함 소리가 아이들 목소리 보다 더 크게 들렸다. 선생님이 더 신난듯했다.


원장은 어떻게 알고 전화했느냐며 본인이 협회장을 지냈기 때문에 쓸만한 정보를 줄 수 있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공립유치원에 적용되던 회계프로그램이 사립까지 의무 사용으로 되는 바람에 선생님들의 업무 부담이 커졌고, 컴플레인이 지속되자 교육청에서 이 프로그램운영자를 별도로 채용하는 예산을 지원해 주기 위해 추경을 신청했다는 것이다.


원장은 인건비가 지원되면 사람을 채용할 것이고 해당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안다면 우대할 것이라며, 다른 유치원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이에 대비하고 있으면 당분간 취업 걱정은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팔로우 업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향후 현장실습 운영위원회 구성을 염두에 두고, 나중에 위원으로 초빙하면 참석부탁드린다고 미리 섭외까지 해놓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전해 들은 취업부장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시행이 확실치 않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행정실 15년 차의 내공


아침부터 하염없이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교문 앞에서 택시 잡는 앱을 열었다. 그의 출장비는 3만 원이고 나의 출장비는 5천 원이지만 내가 택시비를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버스를 타자며 버스 정류장 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그 바람에 옷이며 가방이며 흠뻑 젖었다.


ㅇㅇ대학교 정문을 지나는데, 우산 하나를 같이 쓴 짧은 옷차림의 남녀가 애정 표현을 격하게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취업부장이 혀를 차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구시렁거렸다. 그렇게 비는 내리 퍼붓고, 애정은 피어오르는 언덕을 올라 C유치원에 도착했다. 왜 유치원들은 언덕 위에 있는 걸까?


행정실 15년 차라는 여자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뭐랄까 일을 할 줄 아는 사람? 그는 우리를 깔끔하게 정돈된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에는 필기도구, 메모지, 다과와 커피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본인이 작성했다는 A4용지 세 장 분량의 '유치원 행정 업무 개요'라는 제목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 이런 분이 있다는 것은 이 유치원의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고 거의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즐거운 대화 시간이었다. 다만, 나오면서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드리겠다고 하자 대답을 얼버무리는 게 역시 두 번은 부담스러운 듯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문서로 정리해 달라는 취업부장의 요청에 따라 세 건의 출장 보고서를 일목요연하게 작성해서 제출했다. 거기까지가 끝이다. 이후 어떻게 윗선에 보고가 되었고, 어떤 결론이 났는지에 대한 공유는 없다. 말해주지 않는 내용을 캐묻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리고는 이 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신입생 정원 채우는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아니면 보탬이라도 되기는 했을까? 나 같은 임시계약직이  심오한 교육 현장의 메커니즘을 어찌 알겠느냐만, 왠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약 내가 다니던 회사의 매출이 감소하여 지속 경영에 타격이 우려된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미션은 이렇게 유치원을 돌아다니다 어정쩡하게 끝이 났다.

이전 07화 급식은 급하게 먹는 식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