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 번째 미션은 유치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by 화문화답

발로 뛰라고요!


학교에서 수업 이외에 이루어지는 행정 업무 체계는 '부(部)'단위로 조직되어 있어 해당 부서의 '장(長)'인 부장이 사실상 모든 실권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 위로는 관리자인 교감과 교장이 있다. 나의 직무는 취업지원관이고 취업부 소속이므로 업무를 포함한 모든 사항이 취업부장의 관할 아래에 있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이나 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취업부장과 마주 앉아서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딱히 와닿지를 않는다. 취업부장의 화법이나 성격이 두리뭉실한 부분이 있는 데다가, 내가 이 학교의 분위기나 시스템을 잘 모르는 탓도 있을 것이다. 평소에 취업부가 생성하거나 관여하는 이슈를 나에게도 공유해 준다면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을 테지만, 그마저도 매번 귀동냥하는 형편이다.


33년 차 직장인 출신의 눈치코치를 동원해 추측건대, 지금 취업부장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관리자가 우려하고 있는 사항과 결을 같이한다. 즉, 해마다 신입생이 줄고 있어 어쩌면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다.


교사들의 인맥과 영업력이 총동원되고 홍보부에서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지만, 취업부 역시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내놓으라는 압력이 만만치 않다. 직업계 고등학교이므로 설득력 있는 취업 비전을 제시하면 신입생 모집에 중요한 유인(誘因)이 될 거라는 것이 관리자의 생각이다. 참고로, 교사들은 교장이나 교감을 상급자가 아닌 관리자라고 부른다.


반복되는 요구에도 이 미션에 대한 실무적 해결책이 제시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자 급기야 윗선에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익숙한 워딩, 발로 뛰어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을 것이다.


오늘 취업부장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바로 이에 관한 것이었다. '유치원을 방문하란다. 다음 회의까지는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어떤 유치원 방문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인근의 대학교 부속 유치원 이름 몇 개를 대면서 원장이나 행정실장을 만나면 된다고 했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망설일 이유도,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는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본교 학생들이 유치원에 취업을 원한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조언을 듣고 싶다'라는 방문 목적에 대해, 전화를 받은 상대방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처음에는 웃음, 이어서 의아함, 마지막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사실 유치원으로서도 나처럼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총 5곳의 유치원에 전화를 걸어 그중 3곳과 미팅 약속을 잡았다. 물론, 환대와 협조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약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한 듯하였다. 다음 주는 발로 뛰는 한 주가 될 것이다. 취업부장 사정이야 어쨌든, 나는 이 답답한 책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해


기다란 복도를 따라 교실이 이어져 있었고 방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시끄러운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낮은 출산율로 아이들 보기가 어렵다더니 이렇게 모아 놓으니 그 수가 적지 않다. 뭔가 우리나라 미래가 담보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흐뭇해졌다.


우리가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경비실처럼 창구가 나 있는 방에서 40대 중반의 여자분이 나왔다. 실장은 아니고 그냥 행정 담당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소개했고, 잠시 후 원장이 들어와 미팅에 합류했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공간이라서 그런지 테이블이 너무 작아 마주 앉은 상대방의 얼굴이 바로 코 앞이었다.


취업부장은 본교 보육과 학생이 졸업 후 유치원에 보조교사나 행정실 직원으로 취업할 수 있는지 질문을 했다. 행정실장은 취업률을 올려야 하는 특성화고의 입장은 이해하나, 현실적으로 유치원 취업은 어려워 보인다며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보육 교사 자격증 문제, 채용 수요 문제 등 이미 다 알고 있는 사항을 이유로 들었다.


그럼에도 취업부장은 행정실 취업에 도움이 될만한 다른 자격증은 없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행정실장은 채용 수요 자체가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논지를 반복하며, 민간 자격증으로 실효성은 없지만 유치원행정ㅇㅇㅇ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그 말을 들은 취업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마도 취업부장은 이 대답을 팩트로 삼아 해당과 학생들이 재학 중 이 자격증을 취득하면 유치원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스토리를 만들 계획인 듯하다. 그러나 그게 설령 가능한 일이라 해도 수십만 원이 드는 이 민간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학생이 과연 있을까?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출발 시각이 임박해서 취업부장은 수업이 있다며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언덕길을 한참 올라 도착한 유치원은 앞마당에 모래가 깔려 있어 그것만으로도 친숙한 느낌이었다. 마당 한쪽에 스쿨버스 여러 대가 정차해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꽤 있는 편인 것 같았다.


교무실에서 마주친 선생님들의 몸에 밴듯한 친절함이 인상적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남자 선생님의 함성이 아이들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선생님께서 더 신이 난듯했다. 저렇게 여러 명의 어린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어 가며 놀 수 있다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원장은 40대 중후반으로 댄디한 느낌의 젊은 남자분이었다. 허겁지겁 들어와서는 약속 시각에 늦어서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원장은 먼저 올해는 물론이고 당분간 신규 채용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 본인이 협회장을 지냈기 때문에 쓸만한 정보를 줄 수 있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서 어떻게 알고 전화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운이 좋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정보에 의하면 공립유치원에 적용되던 회계프로그램이 사립까지 의무 사용으로 확대되는 바람에 선생님들의 업무 부담이 커졌고, 이에 관한 컴플레인이 지속하자 교육청에서 이 프로그램운영자를 별도로 채용하는 예산을 지원해 주기 위해 추경을 신청했다는 것이다.


원장은 만약 인건비가 지원된다면 당연히 사람을 채용할 것이고, 지원자가 해당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안다면 우대할 것이라며, 다른 유치원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학교에서 이에 대비한다면 당분간 취업 걱정은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팔로우 업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건비를 교육청에서 세금으로 지원한다면 유치원이 신규 채용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므로 어느 정도 현실적인 논리였다. 훗날 현장실습 운영위원회 구성을 염두에 두고, 나중에 위원으로 초빙하면 참석 부탁한다고 미리 섭외까지 해놓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전해 들은 취업부장의 반응이 뜻밖에 시큰둥했다. 원장이 제공한 정보가 '확실치 않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교육청에 확인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닫았다. 내가 모르는 어떤 사유가 있을 것이고, 현직 교사인 그의 판단이 옳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만약 본인이 직접 들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행정실 15년 차의 내공


아침부터 하염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교문 앞까지 나와서 택시 부르는 앱을 열었다. 그 사이 옷이며 가방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취업부장은 택시를 타고 가자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버스 정류장 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그의 출장비는 3만 원이고 나의 출장비는 5천 원이지만 내가 택시비를 낼 생각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ㅇㅇ대학교 정문을 지나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작은 우산 하나를 같이 쓴 남녀가 애정 표현을 격하게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산으로 얼굴을 다 가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취업부장이 혀를 차며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구시렁거렸다. 그렇게 비는 내리퍼붓고, 애정은 뜨겁게 피어오르는 언덕을 올라 유치원에 도착했다. 왜 유치원들은 언덕 위에 있는 걸까?


유치원 행정실 근무 15년 차라는 젊은 여자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뭐랄까 일을 할 줄 아는 사람? 단박에 느낌이 왔다. 33년 차 직장인의 감이다. 그는 우리를 깔끔하게 정돈된 회의실로 안내했다. 넓고 쾌적한 그곳에는 필기도구, 메모지, 다과와 커피까지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매우 중요한 손님으로 대접받는 느낌이었다.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 A4용지 세 장 분량의 '유치원 행정 업무 개요'라는 제목의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본인이 작성했다고 한다. 이 문서를 기반으로 '본교 학생들이 유치원에 취업을 원한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조언을 듣고 싶다'는 최초 문의 사항에 대한 답변을 브리핑해 주었다. 이런 분이 있다는 것은 이 유치원의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만약 내가 현직에 있다면 바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고, 거의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유치원 행정실 근무 15년 차, 욕심나는 그 인재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뭔가 연결 고리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드리겠다고 하자 대답을 얼버무리는 게 역시 두 번은 부담스러운 듯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유치원 방문 결과를 정리해 달라는 취업부장의 요청에 따라 세 건의 출장 보고서를 일목요연하게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끝이다. 어떻게 윗선에 보고가 되었고,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났는지에 대한 공유는 없다.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는 내용을 캐묻는 것은 주제넘은 듯하여 조심스럽다.


이후에도 이 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신입생 정원 채우는 문제가 해결된 것일 리가 없는데. 나 같은 임시계약직이 심오한 교육 현장의 메커니즘을 어찌 알겠느냐만, 왠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약 내가 다니던 회사의 매출이 감소하여 지속 경영에 타격이 우려된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미션은 이렇게 유치원을 돌아다니다 끝이 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