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평범해진 일상
듣고 있는 오디오북의 스토리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어 일부러 느릿한 걸음으로 걷는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다. 발걸음 그리 무겁지 않은 출근길은 임시 계약직의 특권이다.
한 달 가까이 반복하고 있는 평화로운 일상이다. 33년 동안 9시 출근을 지켜왔지만, 학교는 근무 시작이 8시이다. 대신 오후에 한 시간 일찍 퇴근한다. 아침잠이 점점 없어지는 나에게는 이런 루틴이 좀 더 나은 거 같다. 왠지 이득을 본 느낌이다. 어느새 새로 시작한 낯선 일상이 다시 평범해졌다.
항문검사의 기억
교내 코로나 환자가 폭증한다고 아침내 소란스럽더니 10시가 되니까 교사들은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 나갔고, 교무실에는 실무사들하고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오늘은 구청에서 요구하는 두 가지 서류를 챙겨 보내야 한다.
먼저 법정의무교육을 인강으로 듣고 수료증을 제출했다. 중요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미 들은 적이 있어 좀 진부하다. 사람들의 잘못된 언행은 몰라서 보다는 알면서도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물론, 반복 교육 차원이라면 할 말은 없다.
다음은 건강검진 결과서이다. 쉬운 방법으로 관할 보건소에 가서 보건증을 발급받으라고 한다. 막상 보건소까지 가자니 멀다. 더군다나 장티푸스 검사를 면봉을 이용한 항문 검사로 한다는데 내키지 않는다.
이 항문 검사에 좀 끔찍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3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이다. 그때는 특별법에 따라 특수전문요원 즉, 석사장교라는 제도가 있었다. 대학 및 대학원 성적에다가 영어, 제2외국어, 국사, 국민윤리 시험 성적을 합산하여 선발하였는데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군대 고시라고 불리는 그 시험에 운 좋게 합격하였다.
그리고 장교 후보생 교육을 받기 위해 육군 ㅇㅇ사관학교에 입교하는 날 그걸 했다. 항문 검사 말이다. 영화에서 보면 교도소에 입감 하기 직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뒤로 돌아선다.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내린다. 항문이 최대한 보이도록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숙인다. 아무리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다 해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수치심 레벨이 최상급이다.
민간 병원에서야 당연히 다른 방식으로 하겠지만 그래도 싫다. 혈액 검사로 장티푸스 검사를 하는 내과는 비용도 비싸고, 찾기도 힘들다. 고민하던 중, 6개월 이내 건강검진 결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확인해 보니 작년 종합건진 날짜에서 딱 하루가 지났다. 건강검진확인서를 발급받아 제출했다. 하루 차이로 반려시키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맞은 뒤통수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주는 의미는 소중하다. 하루의 반을 넘기는 정점이고, 주린 배를 채워주는 활력소이며, 오전 보다 나은 오후를 기대하며 숨을 고르는 휴식이 있다.
급식실로 출발하면서 '내 돈 내고 내가 먹는 밥이니 오늘부터는 아무리 줄을 서 있어도 눈치 보지 말고 천천히 먹어야지.'하고 다짐해 본다. 눈치라는 불온한 기류는 꼭 누가 주기 때문에 발현하는 것이 아니기에 꼭 내 성격 탓만은 아니다.
그런데 교내 식당에 도착해 보니 문이 닫혀있다. 나는 학교에서 분류하는 '직원'이 아니라서 학교 행사나 일정에 대해 일부러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알 수가 없다. 밥은 먹어야 하겠기에 다시 교무실로 돌아와서 지갑을 들고 학교 밖으로 나갔다. 부지불식 간에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듯 마음이 불편해졌다. 뻔한 일도 막상 당하면 속상한 거, 그런 거다.
순댓국밥집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어서 사람은 없었다. 얼큰한 걸로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놓았지만, 교내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다음 달부터는 아예 급식을 먹지 않고 이렇게 밖에 나와서 먹어야겠다.
이 정도는 껌값
오후에는 하이파이브 시스템과 현장실습 운영 매뉴얼을 숙지하고, 공공기관 채용공고 정리해서 공지하고, 학교 내부 매체에 학생들 취업에 도움이 될만한 글을 올렸다. 과하게 진지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으면서.
어떤 날은 취업부장이 업무 관련 오더를 주는데, 그분은 메타포식 소통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라 뭐든 좀 막연하다. 하지만 33년 차 직장인이었던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입 사원 때는 그렇게 어렵던, '개 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이 지금은 된다. 해보지 않은 업무라도 처리 속도와 완성도를 모두 놓치지 않는다. 취업부장은 '역시 다르시네요.'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손안에 쥔 새처럼
4시가 넘어가자 교사들이 하나둘씩 퇴근하고 교무실이 점점 비어 간다. 나의 퇴근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 더 남았지만, 고요가 찾아오는 이 시간이 좋다.
ㅇㅇㅇ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취업지원관이다. 독특한 캐릭터에 투머치 토커인 이 분의 성향을 알기에 받기가 망설여졌다. 진동이 울리다가 뚝 끊겼다. 그리고 다시 지잉지잉. 결국 전화를 받았고, 지끈지끈한 두통이 남겨졌다. 이분은 나하고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끈기 있게 들어주는 것뿐인데.
학교에서 무리한 일을 시킨다. 이런저런 부당한 대우를 한다. 불운하고 억울하다. 서울시에 항의 전화를 했다. 이에 동조해 달라....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취업지원관 사업은 시행 수년 차임에도 아직 매뉴얼이 갖추어지지 못한 면이 있다. 그래서 부존 역량에 따라 개인차가 심하다. 취업지원관마다, 학교마다, 담당 교사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이해 충돌이라기보다는 관점의 차이이다.
취업지원관으로서의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뭐라도 해보겠다고 애써봐도, 학교 현장에서는 교사들과 동급의 주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그냥 편리한 대로 쓰면 된다. 서울시 입장에서도 특별한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경력 포장'을 시켜 주는 것이 숨겨진 사업 목적이기 때문이다. 더 합리적이고 더 효율적으로 개선할 특별한 이유도 필요도 없다.
ㅇㅇㅇ님이 힘들어하는 부분들이 일응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현자의 말씀처럼 손바닥을 펴면 날아가 버리고, 너무 움켜쥐면 새가 죽는다. 모쪼록 ㅇㅇㅇ님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유령이면 어때
5시가 훌쩍 넘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미 퇴근했고, 아직 교무실에 남아 있는 몇몇 분은 책상 칸막이 아래로 머리를 숙이고 각자의 일에 피치를 올리고 있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아내가 묻는다. 유령 같았어. 보이지 않고 함께하지 않는다면 유령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을 이해한다. 게다가 이 학교는 ㅇㅇㅇ님이 근무하는 학교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없다.
이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학교의 시계는 내일도 무심히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유령이면 어때. 유령이라도 하루를 잘 지내면 되지. 그나저나 나는 명색이 취업지원관인데 나의 고객, 취업할 학생들은 언제 만날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