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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차라서 막막합니다

내게 너무 낯선 시간들

by 화문화답

D-15일 인수인계


업무 인수인계받는 날이다. 전임자의 근무 종료일과 나의 출근일 사이에 약 보름간의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미리 나와서 인수인계를 먼저 받아 달라는 학교 측의 요청이 있었다.


마음이 들떠 일찍 집을 나섰더니 30분이나 일찍 학교 앞에 도착했다. 이게 좋은 성격인지 나쁜 성격인지 어떤 때는 구분이 안 된다. 주변을 좀 더 서성거리다 시간에 맞게 학교에 들어갔다. 정문 경비실 직원분께서 매서운 눈초리로 위아래로 훑는다. 앞으로 출근 예정이라며 내 신분을 밝히자, 그제야 '너무 꼬치꼬치 물었다'며 양해 바란다고 미안해했다. 당연히 괜찮다. 학생 보호 차원에서 학교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 맞다.


건물이 두 동이라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잠깐 망설이다가 입구에 설치된 가이드 맵을 보고 교무실 위치를 파악했다. 면접을 3학년 1반 교실에서 봤기 때문에 교무실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럴만한 날씨가 아닌데도 이마에 땀이 배었다.


리뉴얼을 했는지 교무실은 깨끗하고 조명이 밝았다. 교감 선생님께서 '면접 때 뵀죠?'라며 먼저 아는 척을 해 주었다. 당시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인제 보니 어느 개성파 중년 여배우를 닮았다.


안내받은 내 자리는 교무실 안에 있었다. 내심 취업지도실 같은 별도 공간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게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 아직 모른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 인지는 지나 봐야 안다.


그런데 취업부장이 처음 보는 사람이다. 면접관이었고 전화 통화했던 그 여자분이 아니고, 나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 선생님이었다.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기연미연해지고 있었는데, 이걸 눈치챘는지 '아, 그리고요.' 하면서 본인이 직접 설명을 해주었다.


'그분'은 장기 연수를 갔고 다음 학기에 복귀할 예정이며 본인은 한 학기만 임시로 취업부장을 맡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반영된 독립 변수는 대부분 바람직하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처음 만난 이 '한 학기 임시 취업부장'은 앞으로 한 학기 동안 나의 학교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전임 취업지원관은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단발머리에 둥글고 평범한 얼굴이었고 아이섀도와 립스틱이 도드라져 보이는 진한 화장을 했다. 검정 트위드 투피스에 굽이 약간 있는 구두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나오는 날이라고 꽤 신경 써서 차려입은 듯했다. 내가 나이 많은 아저씨라서 거리감을 두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차가운 성격인지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취업지원관 업무'라는 제목이 달린 A4 용지 한 페이지 분량의 인수인계 자료와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린 몇 개의 폴더를 들여다보면서 약 한 시간에 걸쳐 간략하게 설명을 들었다.


좋게 표현하자면 상당히 요약된 수준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성의가 없었다. '이제부터 네 몫이야. 알아서 잘해보시지' 이런 느낌? 그러면서도 본인은 과거에 인수인계조차 받지 못했었다며 나의 '행운'을 부러워했다. 잘못하면 큰일 나는 일은 없으며, 나서서 뭘 하려 하지 말라는 짧은 언질이 그나마 진정성 있게 들렸다.


'한 학기 임시 취업부장'이 같이 듣고 싶다고 하자, 전임자는 '안 계셔도 돼요'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끝나고 나서도 셋이서 뭔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전임자는 약속이 있다며 휙 가버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출근 날 뵙겠다며 나도 교무실을 나섰다.


먹는 문제 해결 노하우라든지, 사무용품 청구 방법, 공용 사무기기 사용법, 일하면서 필요한 시설 위치, 윗분들 성향, 못되게 구는 사람, 근무하면서 겪었던 애로 사항 같은 깊은 얘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것들이니까. 다만, 나는 나중에 후임자에게 업무 외에도 그런 현실적인 얘기를 많이 해줄 것이다.



D-3일 근로계약서 작성


재깍거리는 초침 소리를 무심히 따라가다 보면, 나란히 걷던 시계와 나의 길이 어느 순간 갈린다. 시계의 시간은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무한히 나아가지만, 나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상념의 굴레를 맴돈다.


이런저런 생각에 늦장을 부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구청에 가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날이다. 출근 날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이 드디어 실감 난다. 누가 등 떠미는 것도 아니거늘, 괜히 집 밖으로 나섰다가 내상을 입지는 않을까? 덜컥 결정해 버린 것이 과연 잘한 것일까? 여전히 확신은 없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차피 인생을 살다 보면 확신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구청 담당자분께서 계약서 서식을 주고 잘 읽어보고 서명하라고 한다. 근데 잘 읽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어차피 정해진 양식이고 수정이나 변경은 안 될 테니까.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런데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인근 다른 학교에 근무하실 분이 나처럼 계약서를 쓰러 왔다. 꽃무늬 원피스에 얇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쳐 입었다. 단화를 신었음에도 키가 커 보이는 50대 중후반의 여성 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분은 무표정한 얼굴로 데면데면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뭔가 노련하게 움직였다. 나의 존재가 명왕성보다 멀찌감치 포지셔닝되는 이런 상황에,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이 허허롭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로를 따라 일찌감치 핀 벚꽃이 나뭇가지마다 소복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산들바람이 실어 나르는 하얀 꽃잎이 파란 하늘에 점점이 흩어지고 있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열리는 이 꽃의 향연은 인정(人情)과 달리 한결같다. 코끝을 간질이는 여린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일부러 버스를 한두 대쯤 놓치고 싶은 날이다.



D-day 첫 출근


어김없이 그날이 왔다. 약간의 긴장감으로 주말을 보냈고 잠을 좀 설쳤다. 자다 말고 느닷없이 잠에서 깨는 수면 자각 증세가 다시 심해졌다. 그래도 몸 상태가 나쁘지는 않다. 좋은 아침이다.


학교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30분 거리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등굣길 학생들이 새롭다. 교문을 들어서자 선생님들이 10m 간격으로 서서 반갑다고 손을 흔들며 학생들을 맞이한다. 몽둥이를 들고 복장이나 두발 길이를 단속하던 나의 고교 시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교무실에 들어서면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어떤 사람은 힐끗 쳐다보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한다. 준비해 간 물티슈를 꺼내 책상을 닦고, 어지러운 주변을 정리하고, 가방을 풀었다. 인수인계받는 날 파악한 분위기로 볼 때, 뭐든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소모품이나 사무용품을 챙겨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것저것 달라고 하면 좀 없어 보일 것 같다. 이곳은 내가 다니던 회사가 아니고, 지금 나의 신분은 눈치 9단이어야 할 임시 계약직이다. 웬만한 것은 집에서 챙겨 왔으니 우선은 문제가 없다.


개성파 여배우를 닮은 교감 선생님과 같이 1층 교장실에 내려가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온화하고 인자한 인상을 풍기는 50대 후반의 여자 선생님이다. 그런데 교장과 교감 사이에 암묵적으로 흐르는 기류가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느낌이었고 그리 편안한 사이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열린 사람이니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제안해 주세요. 선생님들이 기업의 속성에 관해 잘 모르니 그런 측면에서 도움을 주면 좋을 것 같아요."


8시 10분이 되자 교무실에서 직원 조회가 시작되었다. 교사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 실무사 등 보조 인력은 한쪽 벽면에 나란히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있다. 중앙에 있는 교감 자리에 설치한 마이크를 통해 전달 사항 위주로 진행되었다.


조회 말미에 교장 선생님께서 나를 소개해주었고 나는 일어서서 '잘 부탁합니다.'라고 짧게 인사했다. 너무 짧았나 싶었지만 나는 안다. 대부분 문제는 너무 긴 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말들이 결국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눈이 아프고 속이 메스껍다. 구형이라 속도가 느리고 화면이 작아서 불편하다. 데스크톱을 쓰면 좋을 텐데, 교사들이 교실로 노트북을 들고 가는 때를 대비하는 거라고 한다. 내일은 노트북 거치대와 무선 키보드, 마우스를 사 와야겠다.


곳곳에 수업 중이거나 이동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 이외에는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있게 되어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다. 휴게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탕비실 겸 음료를 마시거나 간단한 취식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 옆쪽으로 안마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언감생심 써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자리가 출입구 바로 앞이라서 산만하다. 사람들이 온종일 바람을 일으키며 휙휙 지나다닌다. 나를 힐끗힐끗 보는 시선이 뒤통수에 느껴진다. 프린터, 파쇄기, 팩스 등 사무기기가 모여 있는 곳이라서 귀가 웅웅 거릴 정도로 소음이 심하다. 게다가 자동 출입문이 고장이 났는지 온종일 개방이 되어 있어 밀려 들어오는 찬바람에 무릎이 시렸다.


이제 1일 차가 지나고 있다. 아무리 시계를 들여도 보아도 시간은 더디기만 하다. 나에게는 낯선 시간이다. 퇴근까지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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