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의 쓴 맛
학교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유원지 근처 식당이었다. 입구에서 예약 여부를 두고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룸이 아닌 홀에 앉았다. 취업부장은 예약했다고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평소 그의 성향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나중에 도착한 교감 선생님께서 자리가 너무 개방되어 있다며 자꾸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한다. 들어올 때 예약 안내 화이트보드에 적힌 예약자 명단에서 마주치기 싫은 인근 학교 교사의 이름을 보았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보기 싫으면 저럴까. 나도 이유 없이 덩달아 눈치가 보이고 신경이 쓰였다. 보다 못해 다시 식당 입구에 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일행 중 한 분이 '유명하신 분'이라 오픈된 공간이 불편하다는데, 예약하지는 않았지만 빈 룸이 있으면 자리를 옮겨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카운터 직원이 잠시 예약 현황을 체크하더니 3번 룸으로 가라고 했다. 처음 들어올 때는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 예약했다고 우기는 손님에 대한 깨알 복수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자리를 옮기고, '유명하신 분'인 교감 선생님과 취업부장, 그리고 나, 셋이서 드디어 편안한 마음으로 마주 앉았다. 출근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이런 자리에 처음으로 초대받았다. 그동안 '특별한 대우'가 부담스럽다고 자랑질(?)하는 다른 학교 여성 취업지원관을 볼 때마다 이런 자조적인 생각을 했었다. '나 같이 나이 많은 아저씨한테 누가 밥이라도 먹자고 하겠어?'
짐작컨대, 교감 선생님께서는 나름 그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일하고 생활하는지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최근 학생들 취업 진행 현황을 보고 관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전례 없이 금융기업과 공공기관의 서류전형을 통과하는 학생들이 속속 나타나자 교감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분들도 의외라는 듯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평교사가 교감이 되는 것은 대기업 평사원이 임원 되는 확률에 견주어진다. 그만큼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최근 한 초등학교 교감이 평교사 신분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폭증하는 업무량과 '낀 관리자'로서 스트레스, 낮은 처우를 두고 교감들끼리는 자신들이 '무엇이든 하는 자'라고 한탄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에서 인용)
낮에 교무실에서 ㅇㅇㅇ선생님과 언성을 높였던 일 때문인지 교감은 자신이 '교무실의 동네북'이라며 억울한 마음을 토로했다. 취업부장과 나를 믿고 있는 듯 거침없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원래 목소리가 작고 말투가 조곤조곤한 데다가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자기반성 기조가 깔려있어 분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회한으로 들렸다.
이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최근에 읽은 손수현 작가의 '악인론'이 생각났다. '때로는 감사 일기보다는 분노 일기를 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부당한 일로 화가 나면 분노하시라'라고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보았지만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교무실에 있다 보면 일부 선생님들이 교감을 대할 때 선을 좀 넘는다 싶은 장면을 가끔 목격한다. 33년 차 직장인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위계질서가 비교적 명백한 일반 기업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어느 조직을 막론하고 너무 위아래 구분이 없으면 보기에 거북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업무 추진의 속도와 효율성이 떨어진다.
어떻게 할지 망설이더니 대리 운전을 부르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듯 교감이 속도를 내면서 소주를 세 병째 비우고 있을 때였다. 취업부장이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았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거나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명백한 지루함의 표시였다. 그제야 여태 자신이 이야기를 독점한 것을 깨우친 교감이 화제를 돌렸다.
"부장님 일은 내가 이야기해도 되죠?"
취업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발끈했다.
"아니 내가 얘기할 시간을 줘야지."
짧은 기간이지만 내가 겪어본 취업부장은 교사로서 사명감과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이 남다르다. 본인의 교육관에 따른 원칙을 고수하며, 나이에 걸맞게 무게 중심을 잃지 않는 묵직한 모습이 안정적이다. 모나지 않은 성품과 너털웃음으로 대인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반면 '라떼 세대' 답게 틈만 나면 전성기 시절의 활약상과 가진 재산을 은연중에 자랑한다. 33년 차 직장인 출신의 시각에서 이 분의 업무 스타일을 관찰하면, 팀플레이를 기본으로 인풋 대비 아웃풋 즉, 숫자로 나타나는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의 업무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그런 점은 나에게만 불편할 뿐, 학교 차원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 취업부장을 둘러싼 기류에 작은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기는 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다. 교사들에 대해서는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교사로 정년퇴직한 매형의 충고를 철저히 따르는 중이었다. 다만, 어떤 상황의 변화 때문에 점점 그의 의욕이나 자존감이 꺾이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한 번은 무심코 던지는 말로 조기 퇴직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신청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조기 퇴직을 신청하면 이번 학기가 끝이라며, 무거운 시선을 발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래도 지나온 시간이 있는데,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다 채우고 꽃다발 받고 나가셔야죠.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쉴 뿐이었다.
교감으로부터 '얘기할 기회'를 얻은 취업부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주잔을 비워가며 하나씩 꺼내 놓았다. 처음 발령을 받았던 중학교 선생님 시절, 재단과의 좋았던 관계, 학생들과 캠핑을 갔던 추억,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명예퇴직의 결심과 이후 삶의 계획을 애써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결국 그의 선택은 조기 퇴직이었다. 그동안 학교생활에 내가 모르는 나름의 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요즘 청년들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얻기가 쉽지가 않지만, 한 직장에서 30년을 넘게 근속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비록 취업부장의 선택이 정년퇴직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약간은 비밀스럽게(?) 모인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는 듯,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퇴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 누구라도 예외 없이 맞닥뜨릴 수 있는 이 엄중한 이슈가 주는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우리는 식당 영업 마감 시간에 쫓겨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몰렸다. 취업부장이 행여 길을 잃지 않도록 별빛이 밝게 비춰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취업부장은 결국 정년퇴직을 일 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결심했다. 만만치 않았을 고비를 잘 넘기고 훌륭하게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시는 선생님께 박수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노후 대비도 충분하다니 이제 남은 삶을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채워 나가기를, 그리고 긴 세월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쓸쓸하게 느껴지겠지만 뒤돌아 보지 말고 훌훌 털고 떠나기를.
이번 학기까지 근무한다니까 이제 취업부장과 같이 일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 학기 동안만 임시로 취업부장을 맡았다고 강조하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온다. 나를 면접 보고 나를 선택했던, 지금은 병가 중인 바로 그 취업부장 말이다. 이 선수 교체는 과연 나에게 호재일까 아니면 악재일까. 어쨌든 일종의 국면 전환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제부터는 '33년 차 직장인의 고교 알바 이야기' 후반전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