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문화답 Mar 14. 2024

초롱초롱한 눈빛은 가슴을 뛰게 한다

폭망 한 취업특강

시간 조절에 실패하다


학생들이 술렁였다. 한 학생이 나에게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취업부장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앞쪽으로 급히 걸어 나왔다. 한참 강의에 집중하던 나는 순간 당황했다. 무슨 일이지? 금방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취업부장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맙소사! 수업 종료 시간이 5분이나 지나 있었다. 장소가 교실과 떨어진 강당이다 보니 종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강단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시간 체크를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킬링파트는 지났지만 아직 5페이지 분량의 PPT가 남아 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일부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업부장이 잠깐만 기다리라며 그들을 막아섰다. 나는 시간 조절을 못했다고 사과하면서 급히 강의를 마무리했다. 열심히 준비했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의욕이 너무 앞섰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교감선생님과 담임선생님들까지 들어오셔서 듣고 계셨다. 최근 금융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지원한 일부 학생들이 서류 전형에 속속 합격하자 내가 자기소개서 작성을 어떻게 지도하는지 궁금했나 보다. 이번 특강 주제가 입사지원서 작성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 하는 강의도 아니고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래저래 망신살이 뻗쳤다. 



메아리 방송의 기억


지난달 진행했던 취업 특강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번처럼 만족스럽지 못했다. 끝나고 방송실을 나오는데 어질어질 현기증이 났고 목이 잠겨서 물을 넘기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볼 수가 없었기에, 마치 높은 산 위에서 허공에 대고 메아리만 날리다 내려온 느낌이었다.


그 메아리 방송 일주일 전이었다. 취업부장이 느닷없이 취업특강 한 시간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일반적으로 취업지원관은 교사를 보조하는 행정 업무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취업특강을 하지 않는다. 어쩐지 면접 볼 때 내 특강 경력에 대한 질문이 많더라니.


'방송실에서 하면 된다.'라는 의미를, 나는 말 그대로 마이크를 통해 방송하는 걸로 이해하고 200자 원고지 60매 분량의 스크립트를 준비했다. 비대면 방송의 경우 시각적 효과 및 수강자와 상호작용이 불가하므로 말로 풀어야 하는 양이 훨씬 많아진다.


그런데 취업부장과 교감, 교장선생님께서 원고를 돌려보더니 갑자기 관심이 높아졌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좋은 내용이니까 학생들한테 충분히 전달해야 한다.'면서 왜 PPT로 준비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방송실에서도 PPT를 활용하여 강의할 수 있고, 학생들은 교실에서 모니터로 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이런 내용을 알았다면 원고 쓴다고 고생하지 않았을 거고, 전달력을 높일 수 있도록 PPT를 준비했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목차만 이라도 PPT로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급히 준비해 간 목차 PPT는 결국 띄워보지도 못했다. 방송실 학생들이 허둥지둥 방송 장비들을 만져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땜빵'에서 비롯된 사달


그러고 보니 이번 '시간 초과 특강'과 지난번 '메아리 방송 특강'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땜빵'이라는 사실이다. 33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던 시추에이션이다.


"3학년 졸업 앨범 촬영으로 빼놓은 두 시간이 비네요. 취업부에서 교육하실 게 있으실까요?"


교무부장이 취업부장에게 슬쩍 다가와 물었다. 그 말을 어깨너머로 듣는 순간 '저 시간은 나한테로 오겠군.' 하는 느낌이 왔다. 교안 준비 시간이 촉박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이번에는 방송 말고 대면 교육으로 세팅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난번 메아리 방송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취업부장은 3학년 4개 반 학생이 한꺼번에 모이려면 인문고 강당을 빌려야 하는데 절차가 필요하다며 난감해했다. 나는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까지 수고하실 것은 없다. 그냥 전처럼 방송으로 하겠다. 다만 이번에는 PPT를 사용할 수 있게 미리 시스템을 점검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조율이 끝난 걸로 알고 나는 강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특강 하루 전, 강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오래 쓸 수는 없다면서 느닷없이 시간을 두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줄이라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50분이다. 학생들에게는 50분 수업, 10분 휴식이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50분 단위로 커리큘럼이 정형화되어 있어 부담이 덜할지 모르지만, 1회성 특강의 경우 이런 급작스러운 변경을 소화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다. 최소한 두 시간이 필요한 주제이고 이미 거기에 맞게 자료 작성을 완료한 상태였다. 하지만 더 이상 얘기하면 학교에 폐를 끼칠 수도 있고, 나름 최선을 다해 강당 사용 승인을 받은 취업부장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 엄밀히 따지자면 시간 초과 망신 특강의 발단은 여기에 있었다. 물론, 강의 자료를 새로 50분 분량으로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니 그냥 하면서 속도 조절을 해보겠다는 나의 단순한 생각 또한 이 사달을 일으킨 다른 원인이었다. 그러니 누구 탓을 하겠는가. 



최상의 기억, 최악의 기억


현업 재직 시절 초빙 강사로 특강을 했던 경험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는 ㅇㅇ폴리텍대학이었다. 공감이나 수강 태도가 괜찮았다. 특히, 강의실 입구 '취업 트리'에 매달려 있는 학생들의 글에서 간절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ㅇㅇ고등학교는 학교의 백업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선생님들의 관심도와 열의가 인상적이었다. 50분 내내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면서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는 학생을 바로 잡아 주었다. 


가장 좋지 않은 경우는 ㅇㅇ고등학교였다. 대부분이 병역특례를 희망하는 남학생 들이라서인지 강의를 듣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엉망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이 있으면 건드리지 말고 그러려니 하라는 조언도 들었다. 


이 학교에서는 현재까지 특강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방송이어서 학생들을 볼 수가 없었다. 이번의 경우 학생들의 태도는 둘로 갈렸다.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앉자마자 자리를 잡고 취침 모드에 돌입했다. 선생님들이 뒷자리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이 학생들도 알고 있었을 텐데. 반면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달랐다. 관심은 물론 반응도 적극적이었다. 다만, 이렇게 섞여있다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는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왜냐하면


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두 번의 취업 특강은 모두 폭망 했다. 하지만 짐작컨대, 이 학교에 있는 동안 유사한  '땜빵' 특강은 또 생길 것이다. '대체 수업은 어렵고, 돈을 들여 외부 강사를 불러오거나 더욱이 시간이 임박해서는 강사를 구하지 못할 테니 나를 찾는 것이다.'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의도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게 될 테니까.


촉박한 준비 기간과 유동적인 시간, 장소라는 독립변수가 다시 작용하더라도, 나는 또 열의를 가지고 강의 준비를 할 것이다. 그리고 취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강의할 것이다. 


당연히 듣는 사람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일 수는 없다. 다만 몇 명이라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중 단 한 명이라도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그걸로 괜찮다. 왜냐하면, 당초 '33년 차 직장인 출신인 내가, 고교 알바를 결심한 동기'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그 초롱초롱한 눈빛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이전 10화 퇴직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