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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이 뭐길래

악마의 속삭임

by 화문화답

얼굴이 명함


아내와 외출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아내의 지인인 노부부를 우연히 만났다. 아내가 나를 소개하자 울긋불긋 화려한 차림을 한 노신사께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명함을 한 장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 명함의 앞뒷면에는 000 회장, 00 위원장을 비롯해서 적어도 예닐곱 개의 사설(?) 직함이 산만하게 적혀 있었다.


성성한 백발에 거동이 불편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이렇게 많은 지위나 신분이 필요한 모양이다. 사실 나는 시늉만 했을 뿐 받은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고 집으로 가져가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퇴직할 당시 차마 버리지 못해 집으로 들고 온 명함이 족히 수백 장은 넘었을 것이다. 30cm 정도의 긴 플라스틱 명함 통으로 네 통이나 되었으니까. 3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는 방증이다. 보통 명함은 주고받는 것이니까 아마 나도 그 숫자만큼 누군가에게 명함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명함을 전부 버렸다. 퇴직하고 서너 달이 지난 후부터는 자리만 차지할 뿐 전혀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명함통이 장식품은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명함을 받은 이들도 마찬가지로 이미 또는 머지않아 그것을 버릴 것이다. 더는 불필요한 기억을 덜어내듯, 이제는 닿지 않을 인연의 끈을 잘라내듯.


작은 사각 종이쪽지에 불과한 명함은 그 우스운 크기에 비해 적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내세우고 싶은 권위를, 영업 사원은 회신을 바라는 자신의 연락처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본인의 명확한 신분을, 신입 사원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회사에 대한 긍지를 담고 있다.


한때는 모바일 명함 같은 것이 반짝 나타나기도 했는데 명함은 뭐니 뭐니 해도 직접 주고받는 묘미가 있다. 작금의 엄청난 IT 시대에도 여전히 인쇄된 명함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인 것 같다. 하지만 또 모른다. 머지않아 터치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휴대 장치가 생길지도.


명함은 곧 직업을 상징하기에 퇴직한 나처럼 그 명함에 적을 소속과 직위가 없어졌을 때, 가끔 난처한 상황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받았는데 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짜로 지어내거나 이름과 연락처만 적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직자 또는 은퇴자라고 용감하게 적기도 한다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순히 용기 유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누구를 만났을 때, 상대방이 명함을 내밀면 이렇게 말한다. '죄송하지만 저는 얼굴이 명함이랍니다'. 이게 '저는 명함이 없는데요' 보다 피차간에 훨씬 마음이 가볍다.



쉬운 일도 어렵게


“취업부장님, 명함 몇 장만 주세요?”

“네, 여기요. 왜요?”

“기업체 미팅하러 가는데, 제 명함이 없어서 부장님 명함이라도 드릴까 해서요.”

“아, 명함이 필요하세요?”


취업부장은 몰랐다는 듯 딴소리를 한다. 어느 조직이든 사람이 새로 오면 명함부터 제작해 준다. 그런데 벌써 몇 달이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없다. 얼마 전 같은 구청 관할 5개 학교 취업지원관 모임이 있었다. 다들 명함을 교환하는데 나는 명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도 그랬다. 저는 얼굴이 명함입니다만!


내가 명함이 없다는 것을 취업부장은 그동안 몰랐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는 명함이 필요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혹시 명함 제작 비용 집행 방법이 번거로워서 일부러 모른 척? 아니다. 너무 바빠서 잊었겠지.


어차피 임시 계약직 명함이 뭐 그리 대수이겠나 싶어 입을 닫고 있었는데, 취업처 발굴을 위한 기업체 미팅을 진행하자니 명함이 필요해졌다. 33년 차 직장인 출신인 나에게 비즈니스에서 명함 없이 상대방을 만난다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후 또다시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취업부장은 여전히 다른 일로 분주하다.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있으면 계약이 끝날 때까지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해결책을 찾아보아야 한다. 조직도를 살펴보니 '행정 실무사'가 눈에 띄었다. 학교 업무 분장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적혀있는 대로 문구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분에게 교내 메신저를 통해 물었다.


"저, 혹시 명함을 제작하려면 어느 분께 말씀드려야 하나요."

"잠시만요.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불쾌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아봐 주겠다니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교감 선생님께서 취업부장에게 휙휙 걸어오시더니 단호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취업지원관님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취업부 안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뭐가 잘못된 것이다. 사태를 파악해 보니 내 명함 제작 건이 실무사에서 홍보부장에게로, 홍보부장에서 교감에게로, 교감에서 다시 취업부장에게로 돌고 돌아온 것이다. 취업부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사실 어이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행정 실무사는 왜 나의 명함 제작을 엉뚱하게 홍보부장에게 물어보았을까? 내가 명함이 필요한 이유를 학교 홍보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면 홍보부장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걸 왜 굳이 교감한테 가서 얘기한 것일까? 만약 이 대목에서 홍보부장이 취업부장한테 한마디만 물어보았어도 교감까지 확대되지 않았을 텐데. 교감 또 왜 그렇게 정색을 해가며 취업부장을 다그치듯 말했을까? 혹시 나 들으라고 일부러?



악마의 속삭임


이 학교에서 요새 가장 큰 이슈는 신입생 문제이다. 올해 신설 학과 신입생을 받았는데 진로가 불투명하다 보니 전학을 원하는 학생이 생기고 있다. 관리자들은 해당 학과의 취업 진로 설계에 대해 다시 주목하게 되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취업처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로드맵을 취업부장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이면에 크고 근본적인 문제들이 엉켜 있어 쉽게 풀어내기 어렵다. 채용 수요, 전공 적합성, 고졸자 자격증 인정 여부 등 이 바닥의 오랜 난제가 얽혀있다. 취업부장이나 학교 내부에서 완성도 높은 솔루션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이런 사항은 학과를 신설할 때 당연히 사전에 충분히 검토했어야 하지 않을까? 의문이 생겼지만, 이 이슈는 취업지원관의 업무에 해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능력 범위 밖이고 또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비록 아주 미미하더라도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태고자 마음먹었다. 그 일환으로 신설 학과 관련 취업처 발굴을 위해 기업체 미팅 약속을 잡아 놓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기업에 대해서는 내가 교사들보다는 좀 더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명함 사건(?)이 이런 나의 자발적 의지를 비틀어 놓았다. 이 정도쯤은 이미 각오했으니까 감정이 상할 것까지야 없다. 하지만 자꾸만 머릿속에 악마가 쳐들어와서 속삭인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 명함이 뭐길래. 그래, 일단 출근하면 어떻게든 하루는 가기 마련이야. 그냥 있어. 명함 쓸 일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러다 보면 눈 깜빡할 사이에 계약 종료를 알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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