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문화답 Apr 04. 2024

그가 돌아왔다

협의회 너 이런 거였어

10분의 의미


나의 근무 시간은 교사들보다 10분 빠른 8시부터이다. 찰나의 고요가 지나고 8시 20분 종이 울리면 교무실이 부산해다. 학교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50분 수업과 쉬는 시간 10분, 학교의 시간은 교육 계획서와 수업 시간표에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 수업을 제외한 대부분 일은 쉬는 시간 10분에 안에 이루어진다. 이 시간은 군대에서 '10분간 휴식' 못지않게 치열하다.


"선생님들, 잠시만요. 협의회를 하려고 하는데 다들 시간 괜찮으세요?"


2학기 들어서 출근을 시작한 취업부장이다. 그 역시 수업을 마치고 바쁜 10분을 보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묻는다. 책상 사이 파티션의  높이가 있어서 옆이나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람과 얘기하려면 꼭 일어나서 해야 한다.



협의회가 뭐길래


협의회는 간담회 또는 회식의 학교 버전이다. 다른 학교에 근무하는 어떤 취업지원관의 푸념(?)을 듣고 알았다. 그분은 '무슨 일만 있으면 협의회를 한다. 아직 어린아이와 남편이 있어 퇴근 후에 가정으로 다시 출근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난감할 때가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왠지 싫다는 뉘앙스로 들리지 않았다.


이 학교의 경우, 위 학교어떤 조건이 다른지 모르지만 한 학기가 지나도록 한 번도 없었다. 그 협의회 말이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매번 나를 빼고 했다. 취업부 선생님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한 명씩 빠져나가는 날이 바로 그날이었을 것이다.


그런가 보다 했다. 교사들끼리 긴히 협의할 일이 있겠지.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섭섭했다. 그런 감정이 대수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는 날이면 창문 너머 하늘에 시선을 빼앗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2학기 들어 취업부장이 바뀌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나의 협의회 참석 또는 참석 제외는 협의회의 본질이나 기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서의 리더인 부장이 가진 가치관이나 성향의 문제였던 것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


구(舊) 취업부장은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 항상 내가 누구인지 각인시켜 주었다. 그러면서도 '제가 안 챙겨 드리면 더 찬밥 신세일 거예요.'라며 본인이 나에 대해 모종의 배려를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찬밥 신세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만약 2학기에도 계속 이 분과 같이 일을 해야 했으면 아마도 힘든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2학기는 아이들이 현장실습 나가는 시기라서 챙겨야 할 것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이다.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서식만 17가지이다. 그만큼 많은 소통과 협업이 필요하다.


신(新) 취업부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고, 꾸미지 않는 수수한 스타일이다. 40대 중반의 여성으로, 만만치 않은 거리를 출퇴근하며 가족들과 살고 있다고 한다. 잘 웃는 얼굴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한다. 취업부 업무 경험이 있어 부서 업무 또한 척척이고 스피디하다.


반면, 학생들에게는 엄격한 선생님이다. 업무에 관해서도 단호한 면이 있다. 지난 학기를 휴직했는데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번 학기에는 '단단히 무장하고 복귀했다.'라며 절치부심했다.


신(新) 취업부장이 온 이후로 가장 달라진 점은 소통이다. 취업부장은 물론, 다른 취업부 선생님들과 업무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대화가 많아졌고 공감하는 부분이 늘어났다. 외딴섬이나 유령 같다는 느낌을 더는 받지 않게 되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야말로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



다른 리더십


내가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으니 적당한 장소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평소 주말에 아내와 자주 가던 ㅇㅇㅇ우렁쌈밥집을 제안했다. 마침 메뉴가 인당 예산에도 맞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가 인근이냐는 지리적 범위, 안건에 뭘 넣고 뭘 뺄지, 출발은 몇 시에 할 건지 같은 사족(蛇足)들로 인해 결재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엊저녁 뉴스에 100억이 넘는 국비를 지원받는 어떤 국립대 연구 기관은 100번을 넘게 한우 회식을 했다고 하던데 이 학교에서는 네 명이 12만 원 쓰기도 쉽지 않다.


식사를 마치고 마운틴 뷰가 좋고 디저트가 유명한 '인근 식당'의 인근 카페로 이동해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었다. 협의회 장소가 달라졌고, 예산 범위를 초과했을 것이므로 이 계산은 내가 했다. 내가 돈을 내는 것이 내 정서에 맞고 속도 편하다. 사실 밥 값도 그러고 싶었지만 선을 넘는 것 같아 자제했다.


그렇게 내가 참석한 첫 협의회가 끝났다. 33년 동안 경험했던 기업의 간담회나 회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으나, 어쨌든 협의회라는 테마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이나 새로울 것은 없더라도 목적에는 충실했다. 


'나 때'에는 회식에서 필수적이었던 음주에 수반되는 효과 이를테면, 사기 충전이나 내적 공감 부분은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것을 떠나서 협의회라는 이벤트에 나도 한 번 참가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싶다. 왠지 남은 기간 취업부 선생님들과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취업부장의 또 다른 리더십 덕분이다.


돌이켜보면, 기업에서 오랜 기간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남의 탓하며 일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다만, 어떤 그룹의 리더가 조직에 미치는 영향과 그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여러 번 목격하고 겪었다. 그런 원리는 이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