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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문화답 Mar 28. 2024

명함이 뭐길래

그럼 명함 쓸 일을 하지 마

명함이 주는 의미


아내와 외출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아내의 지인인 노부부를 우연히 만났다. 아내가 나를 소개하자 노신사께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 명함의 앞뒷면에는 000 회장, 00 위원장을 비롯해서 적어도 예닐곱 개의 사설(?) 직함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성성한 백발에 거동이 불편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이렇게 많은 지위신분이 필요하신 모양이었다.


작은 종이쪽지에 불과한 명함은 그 우스운 크기에 비해 적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압도적인 권위를, 영업 사원은 간절한 연락처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신입 사원에게는 긍지를 주기도 한다.


문제는 그 명함에 적을 소속과 직위가 없어졌을 때이다. 퇴직한 나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름과 연락처만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직자 또는 은퇴자라고 용감하게 적기도 한다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순히 용기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누구를 만났을 때, 상대방이 명함을 내밀면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죄송하지만 저는 얼굴이 명함이랍니다.’    

 


쉬운 일도 어렵게


“취업부장님, 명함 몇 장만 주세요?”

“네, 여기요. 왜요?”

“기업체 미팅하러 가는데, 제 명함이 없어서 부장님 명함이라도 드릴까 해서요.”

“아, 명함이 필요하세요?”


내가 명함이 없다는 것을 그동안 몰랐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는 명함이 필요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혹시 명함 제작 비용 집행 방법이 번거로워서 일부러 모른 척? 아니다. 너무 바빠서 잊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취업부장은 여전히 다른 일로 분주하다. 33년 차 직장인 출신인 나에게 비즈니스에서 명함 없이 상대방을 만난다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조직도를 살펴보니 '행정 실무사'가 눈에 띄었다. 학교 업무 분장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적혀있는 대로 문구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교내 메신저를 보냈다.


"저, 혹시 명함을 제작하려면 어느 분께 말씀드려야 하나요."

"잠시만요.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교감선생님께서 취업부장에게 오시더니 단호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취업지원관님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취업부 안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내 명함 제작 문제가 실무사에서 홍보부장에게로, 홍보부장에서 교감에게로, 교감에서 다시 취업부장에게로 돌고 돌아온 것이다. 취업부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악마의 속삭임


이 학교에서 요새 가장 큰 이슈는 신입생 문제이다. 신설 학과 신입생을 받았는데 진로가 불투명하다 보니 전학을 원하는 학생이 생기고 있다. 관리자분들은 해당 학과의 취업 진로 설계에 대해 다시 주목하게 되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취업처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로드맵을 취업부장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이면에 크고 근본적인 문제들이 엉켜 있어 쉽게 풀어내기 어렵다. 채용 수요, 전공 적합성, 고졸자 자격증 인정 여부 등 이 바닥의 오랜 난제가 얽혀있다.


당연히 취업지원관의 업무에 해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능력 범위 밖이고 또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이다. 하지만 비록 미미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그 일환으로 취업처 발굴을 위해 기업체 미팅 약속을 잡아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명함 사건(?)이 나의 자발적 의지를 비틀어 놓았다. 이런 것쯤은 이미 각오했으니까 감정이 상할 것 까지야 없다. 하지만 자꾸만 머릿속에 악마가 쳐들어와서 속삭인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 일단 출근하면 어떻게든 하루는 가기 마련이야. 그냥 있어. 명함 쓸 일을 안 하면 되잖아. 그러다 보면 눈 깜빡할 사이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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