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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범 Mar 29. 2022

학교를 위한 마지막 질문

지금 저의 책상에는 김종원 작가님의 ‘마지막 질문’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 책 44페이지를 보면 ‘자신 일처럼 타인을 위해 울어 본 적이 있는가?’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이 문장에 출렁다리를 건너듯 심장이 조여옵니다. 타인을 위해서 울었던 경험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당황하였습니다.   

  

이 책의 질문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누군가’ 대신에 ‘아이들’을 넣어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해 울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교직 생활에서 아이들을 위해 언제 울어보았을까? 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제자, 가정 상상하기 힘든 아이의 가정환경을 접했을 때 등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많은 제자를 만났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울어본 경험은 많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를 위해서 울어본 경험도 떠올려보았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들, 딸이 성장하면서 힘들게 했을 때, 직장 생활이 어려울 때,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나는 왜 아이들을 위한 울음에 인색했을까? 학창 시절 소리굽쇠 실험이 떠올랐습니다. 같은 진동수, 서로 다른 진동수를 가진 소리굽쇠 실험이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같은 진동수를 가진 소리굽쇠는 진동했지만, 다른 진동수를 가진 소리굽쇠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울음에 인색했던 이유는 진동수에 있었습니다. 타인이 가진 진동수와 내가 가진 진동수가 달라서입니다. 타인의 진동수란 그 사람의 고통, 슬픔, 기쁨 등 감정의 진동수입니다. 타인의 감정 진동수는 큰데, 공감하는 나의 진동수가 작다면 저처럼 울음에 인색한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타인의 진동수를 알아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진동수를 알기 위해서는 시인이나 과학자처럼 타인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특정한 행동을 유발하는 숨겨진 비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관심이고 사랑입니다.     

내가 아이들에 대한 울음에 인색했던 이유는 관찰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들의 숨겨진 면을 몰라서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어서입니다. 아이들의 평균적인 진동수 값으로 접근해서입니다. 당연히 내 감정은 진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마추어 교육자였습니다.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가 증가해서일까요? 아이의 숨겨진 비밀, 상처를 잘 찾아내는 선생님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선생님들의 공통점이 ‘눈물’입니다. 아이가 안타까워 눈물을 보입니다. 이 아이의 유일한 잘못은 부모를 비롯한 환경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의 눈물은 아이의 감정을 진동합니다. 선생님의 눈물은 아이에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아이도 선생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도주했던 배움이 다시 돌아옵니다. 어쩌면 아이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마지막 질문’ 앞에 학교라는 단어를 붙여봅니다. ‘학교를 위한 마지막 질문’은 무엇일까요? ‘선생님은 아이를 위해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김종원 작가님은 말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귀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 문장을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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