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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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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Oct 05. 2019

문예반 출신입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은 효도 뿐만이 아니다.

두 분의 글을 보고, 문득 씁니다.

- 곽재혁님의 '가을 사생대회의 추억'

- Mr. Gray 님의 '30. 90일간의 습작 여행 ① : 경험'




1.

나는 중학교 입학식에 학생들 앞에 대표로 나가 선서를 했다. 그때 반편성 배치고사 (반을 편성하기 위한 시험;;)에서 1등을 했기 때문인데 동점은 총 네 명이었다.(멋진 변별력이다.) 그 중 남학생이 셋, 여학생이 한명이었는데 나는 남학생 중 생일이 가장 뒤라는 (5월인데!) 이유로 여학생과 단상에 오르게 되었다. (참고로 남학생 셋은 대학교 같은 과에서 만나게 된다.)


그 탓이었는지 나는 대뜸 수학 경시대회반으로 차출되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몇 개의 경시대회 나갔고, 그 중 일부는 서울대회까지 진출하긴 했지만 수학이 재미있지 않았고, 선행학습을 한 것도 없었다. 나를 수학경시대회반으로 편입시켰던 수학 선생님은 1년 내내 늘지 않는 내 실력을 보시고선 한숨을 팍팍 쉬시다가 2학년이 되자 마자 나를 놓아주셨다. 반대급부가 필요했던 나는 특별활동 시간에 아무것도 안하고 놀자는 심산으로 문예반에 들어갔다. 고작 연필을 잡고 글 몇 줄 끼적이며 시간을 축이면 될테니 남는 시간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놀기에 딱이었다.


문예반은 L 선생님이 담당하고 계셨다. 중년의 여성분이셨는데, 외모를 떠나서 뭔가 풍기는 이미지가 드라마 속 문학 선생님의 느낌 그대로였다. 당시 나는 다른 국어 선생님 수업만 들었던 상태라 그분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었는데, 그 분은 희한하게 나를 기억해 주셨다. '뭐, 선서를 했던 학생이니까.'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시절 우리반은 놀기에 정말 좋았다. 우리 학교는 남녀 공학이지만 반은 성별에 따라 분리돼 있었다. 그러나 남자반이 6개, 여자반이 4개라, 'ㄱ' 자로 꺾인 모양새에서 남자 한 반은 반드시 여자반이 있는 면에 자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내가 바로 그 반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딱히 누가 뭐라하는 것도 없었지만) 괜히 멋을 부리고, 되레 더 오버를 하며 복도에서 놀곤 했다.


반의 상태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그것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을 정도다. 나는 반에서 1등을 유지했지만 전교 등수는 35등 정도 밖에 못했다. 전교 회장을 비롯해 학생회 간부의 50% 정도가 모두 우리 반이었다. 즉 공부는 안하고 잘 놀아서 외부 인지도는 높았던 것이다. (쓰면서도 돌아보니 무척 오글거린다.)



2.

어느날 문예반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역시나 내 단짝과 소근(거리는 것보다 훨씬 큰 소리였겠지만) 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L 선생님은 우리 자리 뒤를 지나가시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씀하셨다.


"강철근육은 저 영화, 책으로 이미 봤지?"


평소 같았으면 '아, 혼자 떠든 것도 아닌데 나만 걸렸네.' 했을 텐데, L 선생님의 말씀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떠드는 것을 제지하는 게 아니었다. 되레 믿음이 느껴졌다. "네."라고 대답한 뒤 나는 걸려서 고소하다는 눈빛까지 더 해 장난을 걸어오는 친구를 밀쳐냈다. 엄석대의 근엄함이 문득 내게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자리에 엎드려서 자는 척 했다.


실제로 나는 책을 읽었다. 학급 문고에 그 책이 꽂혀 있었고, 나는 거기 있는 책을 그냥 (거의) 다 읽었을 뿐이다. 나뿐 아니라 상당히 많은 친구들도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3.

자매 결연을 맺은 학교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오는 날이었다. L 선생님은 문예반끼리의 조화로운 만남을 축하한다고 의 아름다운 미소로 말씀을 하셨다. 그러더니 문득 나를 일으켜 세우셔서 이웃 학교 친구들에게 인사를 전하라고 했다.


장난치는 것은 한시간도 넘게 주절대던 나는 호기롭게 일어났지만 왠지 모를 L 선생님의 호의가 싫게 느껴졌다. 그래서 기운없는 '환영합니다.' 한마디를 내뱉고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뒤에서 웃어주셨다. 가에 슬픔이 어리는, 입술에 힘이 들어가야 겨우 지을 수 있는 미소 말이다. 나는 친구에게 장난을 걸며 그 미소를 외면했다.



4.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어느 날이었다. L 선생님은 갑자기 라디오를 꺼내시더니 노래 하나를 들려주셨다. '일요일이 지나가는 소리'라는 노래였다. 바닷가에 둘러앉아 누군가 통기타를 치면 다같이 박수치며 조곤조곤 부르기 적합한 노래였다.


노래 가사를 바꿔보자고 하셨다. 뭐든지 비트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나는 단짝 친구와 합심하여 엄청나게 창의적인 가사를 지어냈다. 물론 조금 잔인하고, 선정적인 구절을 담긴 했지만 말이다. 선생님은 기대에 가득찬 눈빛으로 나를 부르셨고, 나는 '조금' 선정적인 가사를 붙여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 좀 웃던 친구들도 표정이 갈수록 안좋아졌고, 선생님은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중간에 나를 앉히셨다. 안타까운 미소를 또 보았다. '대학생 때나 불렀을 법한 노래를 갖고, 이게 뭐라고.'. 나는 애써 미소를 외면했다.



5.

첫 해 수능은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내 주변 친구들은 무난히 허들을 넘었던 듯 다. 나는 목표로 하대학에 낙방했다. 내 점수는 공식 커트라인을 아슬아슬하게나마 넘겼지만 그 밖에 챙겨야 할 점수들에서 나는 모자랐다. 편하게 다니자는 생각으로 학원 등급 생각않고, 학비 면제 조건을 제시했던 집 근처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뭔가 다 짜증났다. 대학교에 간 친구들은 머리도 기르고, 염색도 하고 돈도 벌고 연애도 하던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하필 시커먼 지하도를 지날 때였다. 내 인생이 이렇게 어둡고 낮을 것이란 생각을 하던 차에 누가 뒤에서 불렀다.


"강철 근육이다. 강철 근육 맞지?"


L 선생님이셨다. 3년 넘는 시간 동안 거쳐지나간 학생들이 얼마였을 텐데 나를 기억해 주셨다. 어찌 지내냐는 말에 나는 그저 그렇게 지낸다고 대답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내가 재수를 하는지 대학엘 갔는지 어차피 관심이 없으실 것이라 생각했다. 지하도 계단을 오르는 내 등 뒤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근육이는 잘 될거야. 선생님은 그리 믿어!"

'아, 뻔한 소리 제발.'



6.

두번 째 수능에서 원하던 대학과 학과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공부하랴 돈 벌랴 바빴다. 어쩌다 지방 집에 내려오려치면 금의환향하는 장군이라도 된 듯 혼자서 의기양양했다. 집에는 어려운 책도 없었다. 고등학교 이전에 봤던 책들, 그리고 대학 시절 다 본 뒤 택배로 보낸 책들 뿐이었다. 몇 줄로 산처럼 쌓이는 책들도 내 자랑이었다. 그 좁은 집에서 책을 그리 쌓아두고 어찌 잤는지 지금 돌아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마침내 좁은 집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부모님이 책을 정리하자고 하셨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다 본 책들, 내 머리 속에 다 자리 잡았을 것인데 뭐가 문제겠냐 싶었다. 그렇게 정리를 하던 중 노트 두 권이 발견 되었다.


문예반 시절에 썼던 노트였다. '오호, 내 과거의 습작이로구나.'



7.

몇 장을 넘기지도 않아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렇게 바깥으론 틱틱대던 내가 노트 속 글만큼은 진솔되게 적어 내려갔고, 그 글마다 L 선생님의 자상하고 섬세한 언급이 달려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기억하는 내 모습은 늘 외향적이고 (좀 심하게) 장난을 치 우쭐대는 모습 뿐이었는데, 진솔하고 부드러웠던 내면의 모습들이 깡그리 잊혀진 채 노트에 잠들어 있었다. 이와 더불어 바깥으로 연결되었던 L 선생님 모습만 나는 기억했을 뿐, 노트를 통해서 선생님과 주고 받았던 교감을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단 말인가?



8.

나는 지하도에서 L 선생님을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사를 했었어야 했다.

나는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셨던 그 선한 노래를 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자매결연 학생들 앞에서 진솔된 인사를 건넸어야 했다.

나는 선생님이 책 많이 본다고 칭찬하셨을 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다.


아니, 그 노트를 펼쳤을 때 그분을 찾아서 못난던 모습을 사과드리고 감사하다고 말씀 드렸어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진짜로 성공하고 난 다음에.'라는 핑계에 묻혀버렸다.



9.

그때 L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과거를 생각할 때 그분이 전해주신 만큼의 부드러움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믿어주시던 그 모습이 전해주는 느낌 말이다. 내가 외부로 거칠게 대해도 노트 속 글로 주고 받던 내 모습이 진짜라 믿어주시던 그 모습 말이다. 가족이 주는 것과 또다른 든든한 지원군을 가진 느낌.



10.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은 비단 부모를 향한 효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 들어가면 연락을 드려봐야겠다. 이제 소주 한잔 드릴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아니, 어느새 훌쩍 지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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