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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Nov 19. 2019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사람의 탈을 쓰고.

나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믿지 않는다. 타고난 성정이 어떠하든 과거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를 갖기 위해서는 남을 나와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다. 내 감정/ 건강/ 재산/ 시간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감정/ 건강/ 재산/ 시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상대를 아프지 않게 하면서 자신도 다치지 않는다. 그게 발전의 전제다. 


이는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모성애/ 부성애가 무조건 생기는 게 아니다. 일단은 내가 피곤하고 힘든 게 먼저 느껴진다. 그건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나 아이가 자지 못해 울고, 먹지 못해 울면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배가 고플지 그 괴로움이 내 자식이기에 더 잘 투영될 뿐이다. 그래서 나의 졸림이나 피곤함을 이기고 자식의 졸림이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다시 한번 더 아이를 안는다. 


부모 자식 관계를 보면 이러한 패턴의 누적이다. 힘들지만 한 번 더 안고, 그렇게 아이가 웃는 모습에 그 힘듦을 잠시 잊는다. 아이가 좀 더 크면 서로의 의견 차로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한다. 수없이 반복한다. 같이 살기에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시 같은 이유로, 매번 화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해 가며 가족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꼭 내 자식이 아니어도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교과서에 많이 나오던 예가 그것이다. '우물가로 향해 걸음마를 해 가는 아이를 보고 구하러 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불행한 타인을 봤을 때 사람이라면 응당 느끼는 감정을 일컬어 맹자는 불인인지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제아무리 본성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에서 어긋나는 사례를 보면 가슴이 막힌다. 


얼마 전 3살 배기 아이를 친모가 포함된 성인 2~4명이 수차례 폭행하여 숨지게 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또 한 번 가슴이 답답했다.


나 역시 아이에게 화가 난다. 첫째와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싸운다. 둘째는 당장 어제도 새벽까지 칭얼댔다. 첫째를 내 뜻대로 윽박지르고, 둘째가 칭얼댈 시간에 나도 맥주 홀짝이며 TV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를 혼내거나 우는 갓난아기를 내버려 두면 그들은 온전히 나만을 바라보며 운다. 그들이 의지할 곳은 부모라는 그늘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들은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무섭더라도 어쨌거나 부모를 바라보며 우는 것이다. 


그때 드는 잔혹함에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내가 뭐라고 해도 나만 보고 우는 그 존재. 그들의 나약함을 내가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나약함이 곧 내가 그들의 주인이라는 것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대부분 부모는 당장 힘든 마음에 아이를 혼내었다가도 그 닭똥같이 눈물 흘리는 모습에 이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며 아이를 도로 안는다. 같이 우는 부모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패턴의 한 귀퉁이일 뿐이다. 


그러나 저 잔혹함에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있다. 아이를 내 것처럼 여기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다. 말을 아예 못 하는 갓난아기에게까지 그게 뻗치기도 한다. 때로는 아예 화풀이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기까지 한다.


예전에 아이를 화장실에 가둬두고 학대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그때도 소름이 크게 돋았다. 그 잔혹함의 장치 때문이었다.


화장실에 기분 좋게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볼일이 급했든, 씻고 싶든 모두 다급하거나 언짢은 상황에서 들어오는 장소다. 그곳에 아이를 넣어뒀다. 기분 나쁜 채 들어갔는데 거기에 아이가 또 있다. 자기를 바라보면 볼일 보는 데 기분 나쁘다고, 벽을 보면 또 그 초라한 행색이 보기 싫다고 짜증 낼 수 있는 장치다. 화풀이만을 위한 장치다. 나는 그 잔인함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화장실은 얼마나 추운가. 아이는 그 추운 욕조에서 굶다가 세상을 떴다.


아이에 대한 뉴스를 떠올리면 이와 연관해 생각나는 기사가 있다.


얼마 전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으려다 강물에 익사한 부녀의 시체가 발견됐다. 아버지는 딸을 먼저 국경 건너에 내려놓았다. 물이 불어나기 전 엄마를 데려 오겠노라고 다시 들어가려던 찰나 딸은 아빠와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러나 강물은 그들이 반대편에 다시 닿기 전에 금세 불어버렸다.


다음 날 뭍에서 발견된 딸은 아빠의 목에 팔을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아빠는 딸을 놓칠까 봐 자신의 셔츠 안에 딸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껴안은 채 세상을 함께 떠났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자식은 부모를 택한다. 그 밤에 시커멓게 흐르는 물이 무섭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왜 나쁜 부모들은 그러한 자식의 마음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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