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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Dec 14. 2019

무엇이 진짜인지 고민했다.

우사인 볼트, 그리고 미국 의사

와이프가 첫째를 데리고 외출 한 사이, 안고 있던 둘째가 잠이 들었다. 힙시트에 앞보기로 앉혀놓은 채라 고개가 불안하리만치 앞으로 숙여진다.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기대니 그 각도만큼 둘째도 내게 기대며 비로소 편안한 자세가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을 내리자 뭔가 닿는다. 육아로 잊고 살던 리모컨이다.


넥플리스를 틀어 단발성으로 끝나는 류의 볼거리를 (소리 죽여) 찾는다. 이럴 땐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다. 전자에 별다른 게 없어 후자를 찾는다.


그렇게 보게 된 것이 "I am Bolt."다. 모두 눈치챘듯 우사인 볼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솔직히 큰 기대를 않고 봤다. 그가 선천적으로 척추 측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단거리에 불리한 장신이라는 것, 물론 100미터를 주종목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의 우승 모습들을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 사실 두 번의 동일한 육아 상황에 걸쳐 겨우 다 본 것이지만 - 나는 꽤 깊은 잡상에 빠졌다.


선천적 척추 측만은, 가끔 경기나 스포츠 뉴스 하이라이트에서 짧게 볼 때와는 달리 한 시간 반 동안 온종일 그가 뛰는 모습만 보려니 정말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는 어깨가 상당히 비뚤어져 있었으며 그로 인한 골반의 불균형 탓에 뛰는 모습을 정면으로 보면 그야말로 '겅중겅중'이었다. 초반에 약하다가 중반 이후에 긴 다리 스프린트와 넓은 보폭에서 기인하는 적은 걸음 수로 역전 후 승리를 거머쥐는 것도 사실 겅중겅중한 스타트 때문이었다.


실제로 학창 시절 처음으로 우승한 사진을 보면 자이카 국기를 들고선 뺨이 한쪽 어깨에 닿을 만치 고개가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그를 눈여겨본 코치가 그 단점을(척추 측만과 큰 키) 장점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볼트는 그를 '세계 최고의 코치'라며 온전히 믿고 따랐다. 그 결과 그는 불리한 조건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되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엇이 진짜 장점이란 말인가? 남들보다 유리하게 타고난 성정일까? 아니면 남들보다 유리하게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 설령 그게 지금은 단점이라 해도 - 일까?


다큐멘터리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볼트가 아니라 코치의 독백이다. "유능한 선수를 발굴해 키우는 건 모든 코치의 꿈일 겁니다. 그중 볼트와 같은 선수를 만나는 건 정말 특별한 것이죠."


맹자의 인생삼락 중 마지막 항과 오버랩되는 이 구절은, 단언컨대 볼트와 코치의 입장을 바꿔도 정확하게 같은 의미와 중요성을 가진다.




- So, what is your symptom?(그래서 어떤 증상 때문에 저희 병원에 연락하신 건가요?)

- Oh, something on my back formed pus. It's been two days but it really hurts. It is so painful that I couldn't get sleep even on my back. (등에 뭔지 모르게 곪았어요. 이틀 정도 되었는데 너무 아파서 어제는 심지어 등을 대고 잠도 못 잤어요.)


등에 난 상처가 부었다. 며칠 지나면 자연히 가라앉을 줄 알았더니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이틀 째만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고통이 더 심해지고 말았다.


회사에 병가를 내고 급히 한인 피부과에 전화를 돌렸다. 후보는 세 군데였으나 한 군데는 내 보험을 받지 않았고 딴 곳은 오늘 비번이었으며 마지막 병원은 예약이 다 찼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곧 낫겠거니 하며 젊음만 믿고선 만약을 대비해 다음 주 예약을 걸었겠지만, 후끈거리는 등의 열감을 느끼자 차라리 단어 몇 개를 더 외우 외국 의사와 대면하는 게 낫겠다 생각이 들었다.


구글맵에서 '피부과'를 지우고 'dermatologist'를 입력한 다음 거리가 가까운 곳 중 평점이 좋은 데로 전화를 걸었다. 리셉션과 나눈 대화의 막바지가 바로 저 문장들이었다.


잔뜩 긴장한 나는 필수 단어 몇 개를 더 찾고 필사적으로 외웠다. 그 모습이 웃겼던지 와이프가 같이 가주겠다며 둘째까지 대동해 함께 나섰다.


리셉션은 수월했다. 보험 처리는 이미 몇 번 치렀기 때문에 용어가 익숙했다. 심지어 청구 절차가 꼬인 건 때문에 직접 전화를 걸어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의학 용어는 자신 없었다. 질병을 영어로 얘기했는데 내가 못 알아들어 심각한 상황을 놓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었다.


진료실에 기다리자 곧 들어온 의사 선생님은 밝은 미소와 함께 악수를 건넸다. 이후 둘째와 와이프를 향한 가벼운 얘기를 나눈 뒤 곧 진찰을 시작했다.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당장 'Could you please speak a little bit slowly? Because I am not familiar with Medical terminologies.(조금만 천천히 말씀 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의학 용어가 익숙지 않아서요.)'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 상처가 무척 성이 났네요.(angry) 정말 아프겠어요. 지금은 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drain 물 빠진다는 뜻) 우선 항생제를 줄게요. 주사로 놔야 해서 아플 거예요.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우리 몸은 계속 뭔가를 만들어 낸답니다. 그런데 뭔가 그 배출을 막으면 붓는 거예요. 항생제를 투여하고 약을 먹으면 작아질 거예요. 삼일 뒤에 다시 보고 또 얘기를 나눠봐요.'


못 알아듣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우려했던 것처럼, '표피에는 피지선이나 땀샘이 분포돼 있는데 불순물이 그 배출을 막을 경우 낭종이 생기고 이것이 세균에 감염되어 혈관 속 백혈구가 방어 기제를 발동하여 면역활동을 치른 결과물이 고름입니다. 이를 압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절개 후 낭종의 적출이 필요한데...'

라는 정도의 난이도조차 아니었다.


진료를 무사히 마치고 나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와이프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여보, 한국에서도 그렇게 설명하면 그 병원은 망해. 당신 어떤 병원에서든 일상 단어 이외의 설명을 들은 적 있어?"


그랬다. 나는 의학 지식을 배우러 병원에 가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 껏 증상을 설명한 뒤 의사 선생님들로부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을 듣고 적합한 치료를 받는 게 핵심이었다. 나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볼트의 단점은 진짜 단점이 아니라 실제론 장점의 씨앗이었다. 병원 영어의 진짜는 복잡한 의학 용어가 아니라  편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데 있었다.


나는 마틴 셀리그만이 주장하던 긍정 심리학을 인상 깊게 읽었고 그래서 단점을 어정쩡하게 강화하기보단 장점을 확실히 키우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ㅡ 내가 과연 진짜 강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덜컥 의문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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