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쓰기
(배경 사진은 글과 관계가 없다. 컴퓨터에 있는 배경느낌 나는 사진 아무거나 올렸다)
수필의 뜻에 맞게 의식의 흐름에 맡겨 글을 쓸까한다. 지금까지 수필이란 제목 아래 쓴 글은 어느정도 짜임새가 있었다. 온전한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글은 아니었다. 이번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수정하지 않고, 지우지 않고 글을 이어가볼까 한다. 최근에 읽은 자기계발서에서 무작정 쓰는 것의 유용함을 논했다. 무작정 쓰기의 유용함은 익히 알고 있다. 왜? 글쓰기 관련 서적을 자주 읽었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많이 자주 쓰라고 한다. 짜임새 있는 글이 없는 글보다 낫고, 짜임새 없는 글이 안 쓴 글 보다 낫다. 나는 글을 안 쓸 바에는 뭔가를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의식의 흐름 글에서 문단 나누기는 의미가 적다. 실제로 한 주제 덩어리가 모여 이뤄지는 게 아니다. 순전히 가독성을 위해 문단을 나눈다. 문단 내에서도 다른 이야기가 오고간다. 아직 이 글에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몇 줄 아래로 내려가면 소주제의 충돌, 문단 내 여러 이야기가 혼용될 것이다. 그게 맛이지.
의식의 흐름 글에서 보이는 기본 패턴은 내가 '지금 이 순간' 보고 느끼는 걸 적는 것이다. 그에 따라 볼까 한다. 나는 거실에서 발코니 창을 열어 놓은 채로 글을 쓰고 있다. 겨울 막바지라 그런지 때때로 덥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겨울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따뜻한 날이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통유리 벽으로 이뤄진 거실에 있으면 온실 속 식물이 된 기분이다. 우리집 거실은 온실이다. 태양열을 모아 온기를 보존한다. 겨울에 온기는 감사하고 여름에 온기는 거북하다. 에어컨을 틀게 만드는 주범이다.
식탁 위에서 글을 쓴다. 우리집에 책상이라 불리는 가구는 하나인데, 와이프가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그 가구는 와이프의 소유다. 식탁에서 쓰는 글도 나쁘지 않다. 거실에서 보는 풍경이 스터디(호주에선 작업실용으로 쓰이는 작은 공간을 스터디 혹은 스터디룸이라 부른다)에서 보는 풍경 보다 낫다. 거실에선 멜버른 시티와 알버트 파크 공원과, 공원 안에 있는 호수가와 좌측으론 세인트 킬다 바다가 보인다. 정말 훌륭하다. 훌륭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다. 여지껏 살아준 내게 고마울 정도다. 집세는 안 비싼데, 내가 성공한 인생이란 단어를 되뇌이게 만든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다.
식탁은 지저분하다. 어제 먹은 식기류의 일부는 설거지해서 정리했다. 일부는 남았다. 컵 3개, 물병, 병따개, 병뚜껑, 중국식 고추 기름, 에이솝 핸드크림, 펜과 노트, 헤인즈 케챱, 타바스코, 휴지, 냄비 받침, 세븐 일레븐 커피가 있다. 이렇게 글로 나열하니 어마어마한 카오스가 연상된다. 다만 하나하나의 부피가 작아서 생각만큼 지저분하진 않다(물론 지저분하다). 나는 깔끔히 정리된 곳에서 집중을 잘하는 편이다. 와이프는 반대다. 어지럽히고 치우지 않는다. 어지럽힌 곳에서 집중을 잘한다. 치울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이다. 나는 몇 번 치우다 손해보는 기분이 들어 간헐적으로 치운다. 이번 식탁의 모습도 간헐적 정리가 만들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막 쓰려고 하는데, 생각 단위로 문단이 자꾸 나뉜다. 습관이 무섭다. 습관을 벗어나려고 마구 타이핑하는데, 이 와중에 문단을 목적에 맞게 나눈다니. 틀을 깨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의식적으로 문단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의식을 거스르는 행위다. 글을 쓸 때 내 의식은 오더(질서)를 따르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좋은 점이다.
오늘부터 호주 빅토리아주는 락다운 4에서 3.5로 규제를 완화한다. 0.5는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가? 몇 가지 있다. 1. 외출 시간 1시간에서 2시간으로 연장 2. 개인이 개인의 집에 방문 가능 3. 2가정의 사람들이 최대 5명까지 외부에서 만날 수 있음 4. 도서관에서 픽업 대출 가능. 4번은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직접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책을 고를 수 없다. 인터넷에서 도서 목록을 검색해서 대여할 책을 골라 신청하면, 사서가 책들을 모아서 픽업할 수 있게 준비한다. 온라인 사이트에서 'Pick up avaiable'이란 체크가 뜨면, 가서 책 테이크어웨이를 하는 방식이다. 오늘부터 가능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사진집 5권과 사진 비평서 1권을 부킹했다. 픽업 가능 표시가 뜨길 기다리고 있다.지금은 오전 10시 45분이다. 도서관은 45분 전에 오픈했다. 아무래도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쌓인 대출 도서들을 수거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늦어지는 것을 이해한다. 다만 오늘 중으로 책을 빌려올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허허.. 벌써 8번 째 문단으로 돌입했다. 타이핑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왔다. 의식의 흐름 쓰기는 위대하다. 짧은 시간 내에 분량을 최대로 뽑고 싶다면 이만한 방법이 없다. 시작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체감 20분 쓴 것 같다. 20분 만에 7문단을 쓸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나도 대단하고 이 방법론도 대단하다. 종종 써야겠다.
분량이 길어지면서 든 의문이다. 과연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이 있을까? 독서모임 참여자 중 하나였나, 와이프였나 모르겠는데, 누군가가 내 글을 비평한 적이 있다. 이야기가 없어서 읽기 어렵단다. 이야기의 위력은 너무 대단해 몇 번 더 들었다간 신물이 나올 정도다. 내 글엔 이야기가 없(거나 적)다. 썰 푸는 식으로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글 곳곳에 배치한다면 사람들이 읽기도 좋고, 재미도 있을텐데. 알면서 나는 왜 그러지 않는가? 내 글쓰기 방식을 고수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편한 방식을 따르는 게으른 인간이라 그런가보다. 하지만 항상 안주할 순 없지. 다음 문단에선 이야기를 써보겠다.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흠... 아 어렵군. 이야기를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쓰는 건 쉬워도 말이다. 근래 있었던 흥미로운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아 한가지 생각났다. 하지만 이건 내 치부를 드러내는 아주 민망한 이야기다. 나는 선택에 기로에 놓였다. 글쓰기 연습이냐 나의 사생활 보호냐. 나는 사생활을 소중히 여기지만 딱히 남에게 오픈하는 걸 꺼리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니 글쓰기를 위해 나의 부끄러움을 기꺼이 마주하자.
며칠 전부터 용변을 보는데(민망한 상황이다보니 고상하게 표현하게 된다. 원래 내 언어로 말하자면 똥 싸는데) 피가 나왔다. 삼일 정도 증상이 지속됐다. 어디에 베인 것처럼 시뻘겋고 점성이 없는 피가 났다. 변기물을 (빨갛게 물들어 장미처럼 I'll make it red, make it red이라고 아이즈원이 라비앙로즈에서 읖조린 구절이 떠오른다) 염색했다. 삼일차엔 피가 많이 났다. 다행인 점은 별도의 복통이나 두통, 탈장 등의 증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피의 점성과 색으로 미뤄볼 때 피부가 찢어진 게 원인이 아닌가 싶었다. 피를 보고 놀랐지만 안도했다. 와이프가 걱정할까봐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말했다. 내 참을성이 이 정도인가보다. 와이프는 리서치를 업으로 삼고 있다. 짬에서 나온 바이브로 의학 자료를 검색했다. 대장암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며칠 경과를 보기로 했다.
리서치한 당일인가 다음날 우리가 장보러 집을 나섰다. 시간이 한정됐기에 우리는 동선을 나눴다. 내가 식료품을 구매하고, 와이프가 주류를 구매하기로 했다. 식료품 쇼핑이 끝나고 리쿼샵에 가니 와이프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기다리다 그녀가 왔다. 그녀는 잠시 약국에 들렸다고 했다. 우리는 귀가했다.
집에서 장본 물건을 정리하다가 약국에서 산 제품 봉투가 나왔다. 나는 와이프 개인 용품을 구매한줄 알았고, 정리하라고 말했다. 이 맥락에서 여러분은 자연스레 내 항문 출혈과 관련된 어떤 약품이 나오겠거니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쓰다보니 너무 뻔한 전개다. 실제로 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의 문제는 이것이다) 의식의 흐름 글에서도 난 맥거핀을 쓰지 않는다. 왜? 자연스레 맥거핀을 피하는 나의 글쓰기 습관과 논리 때문이다. 이런 자기 자랑 문장이 맥거핀이다. (그래 나는 목적을 달성했다) 봉투에선 바르는 약과 먹는 프로바이오틱스가 나왔다. 나는 그녀의 세심함에 깜짝 놀랐다(여러분은 안 놀랐고). 내 대장과 항문 건강을 생각해주는 건 와이프밖에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은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리게 했다. 플롯이 비슷하진 않은데 주제가 비슷하다. 이런 러프한 공통점은 나의 문학적 소양의 얕음을 드러낸다. 내가 소양이 깊었다면 이 상황에 더 부합하는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쨌든 나의 치부(진짜 치부)를 드러내며 이야기를 마친다.
이야기의 힘을 여러분이 느꼈으면 좋겠다. 다만 이야기 부분까지 글을 읽은 사람이 없을 것같단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내 글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 없는 글을 10문단정도 읽기 위해선 인내력과 나라는 사람에 대한 호의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세상엔 재미없는 글 10문단 읽을 정도의 인내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고, 나를 모르는 온라인 세상에 나란 사람에 대한 호의를 가진 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답이 나온다. 이야기까지 읽은 사람은 없거나 한 두명 될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롭게 들렸는지 묻고 싶지만 질문이 닿질 못한다. 이것이야 말로 전하지 못한 편지다.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우리가 기억하는 고향은 더는 실존하지 않는다- 벤야민이 말했다) 벤야민 형님 보고 싶습니다. 사실 잘 알지 못하지만 인용하면 제가 있어보입니다. 레퍼런스하는 존재로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슷한 분으론 칸트, 라캉, 바르트, 푸코 형님 정도가 있다. 잘 모르는데 친한 척해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니 또 한번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영국남자 톤으로)
생생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맞춤법 교정이나 퇴고 일체하지 않음 (+있어 보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