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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Feb 24. 2024

흐름의 의식

나는 일상을 산다. '일상'이라는 단어가 패턴화된 인간의 삶을 말한다. 패턴은 보편이다. 인간은 굴레에 머문다. 칸트 말대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분명한 한계는 매번 새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일상에도 변주 가능 영역이 있다. 기꺼이 변주하느냐 그러지 않느냐로 나뉜다. 나는 좀처럼 변주하지 않는다. 매일 도돌이표를 찍는다. 일상이 반복 재생이다.

 


또 Hikari에 왔다. 한번 단골 카페를 정하면, 주 5일 출근 도장 찍는다. 익숙한 환경에선 두리번거리는 시간 생략한다. 앞 문장을 쓰며 대단한 인간이 됐다는 착각을 했다. 메타(구 페이스북)의 CEO 저커버그는 매번 같은 옷을 입는다. 그의 옷장엔 같은 브랜드, 같은 소재 티셔츠로 가득하다. 옷 고르느라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다. 나와 그의 치명적인 차이는 여가다. 나는 여가 시간이 썩어날 정도로 많고, 저커버그는 그렇지 않다. 굳이 두리번거리는 5분 아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효율을 따지며 같은 카페에 온다. 카페에 들어오면 1분 안에 글쓰기 환경이 조성된다. 커피가 서빙되기 전에 한 문단을 채운다. 



익숙한 정도가 지나칠 때가 있다. 그때는 나도 변주한다. 단골 카페에 앉아서 블로그를 켜고, 마땅히 쓸 말이 없을 때 '의식의 흐름'이란 소제목을 달고 글을 쓴다. 오늘이 그렇다. 반복이 물린다. 단어의 위치를 교차한다. '흐름의 의식'이란 소제목을 쓴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짜릿해. 충분히 새로워. 장난식으로 쓴 제목이다. 오늘 치 변화는 충분하다.


익숙함을 좇으면 생기는 장점이 있다. 물리적으로 거슬리는 게 없어 생각에 에너지 대부분을 할당할 수 있다. 내가 즐기는 활동은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손가락 움직이는 것 이외의 신체 활동이 필요치 않다. 나는 인문학 애호가다. 인문 애호가의 특징은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기를 즐긴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짜 맞추는 과정에서 핵심을 발견하거나, 최소한 재미라도 찾는다. 오늘도 먹잇감을 찾았다. 흐름의 의식, 흐름의 의식... 단어를 되뇐다. 어감과 흐름을 보고, 의미를 생각한다. 의식의 흐름과 동의어 같으면서 다르다. 강조점의 위치가 다르다.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한다. 앞선 단어는 수식이 된다. 그러니까 흐름(Flow)이 주인공인지, 의식(consciousness)이 주인공인지 문제다. 흘러가는 의식과 의식의 흘러감. 전자는 수동적인 뉘앙스가 강하고, 후자는 비교적 능동적이다. 의도를 갖고 흘리기 때문이다. 자, 의식을 흘려보내며 생각을 캐치하겠어. 거름망을 한 손에 쥐고 물결을 따라 움직인다. 항해의 끝에 거름망에 걸린 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물살 아래는 이런 것이 있었구나! 가끔 거름망의 막대가 길어지기도 한다. 심해로 들어간다. 내 생각의 근간, 무의식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발견한다.


요컨대 '의식의 흐름'이 정확한 표현이다. 내가 의도를 갖고 의식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흘러가며 생각 조각을 모은다. 하지만 흐름의 의식 또한 문제가 없다. 이렇게 사소한 뉘앙스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여전히 의미가 통한다. 동의어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다. 내 의도가 사소한 변주라면, 흐름의 의식은 합격이다.


인문학 매니아의 삶은 비교적 즐거운 게 아닐까? 쇼펜하우어 책을 발제도서로 정했다. 작년 12월 선정 도서였는데 참여자들의 사정(대체로 내 여행 사정)으로 1월, 2월로 밀렸다. 이번에도 참여자의 일정이 맞지 않았다. 결국 책을 한달 더 미뤄야 하는 상황이 됐다. 4개월 한 책을 이어가려니 루즈해진다. 인상을 글로 정리하며 모임을 대체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모두 동의하고 글을 써 공유했다. 책을 한 번 훑었다. 기억은 금세 휘발된다. 아! 이런 내용이 있었지- n차 독서는 재발견의 시간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생은 고통이다. 목적을 이루지 못 하면 결핍에 고통받고, 이루면 권태에 고통받는다. 그의 결론은 '욕망하지 않기'다. 쾌락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이것을 갖게 되면 즐겁겠지, 누굴 만나면 즐겁겠지, 어떤 활동을 하면 즐겁겠지- 여러 즐거움의 단서를 없앤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 삶에서 즐거움을 추가하지 않는다. 인간 행복의 핵심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다. 행동경제학의 주장이기도 하다. 고통을 줄이는 게 행복의 정답이다. 얼마 전 이동진이 본인의 유튜브 '파이아키아'에서 한 말과 맥이 통한다.


"나는 하기 싫은 일 하나를 안 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 10가지를 포기할 수 있다."


추론을 해봤다. 이동진도 쇼펜하우어와 행동경제학을 좋아하지 않을까? 이동진은 당대의 독서가다. 독서의 장점 중 하나는 의사결정 능력 신장이다. 카너먼은 고통이 핵심이라는 주장을 행동 분석과 사고 실험으로 논증한다. 막 신나고 막 즐거운 사건을 원하면 인간의 쾌락 민감도가 낮아지고 우리는 즐거움에 무뎌진다. 매 순간 반복하는, 의식이 있는 동안 언제고 할 수 있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는 게 최고의 행복이다.


의식이 있는 동안 언제고 할 수 있는 행위는 무엇인가?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독한 상태에서 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 고독은 홀로 떨어져 외로운 상태를 뜻한다. 고독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만난다. 이해를 못 받는 느낌이 들면 다른 사람을 만난다. 완벽한 고독에서 해방은 없다. 더 좋은 방법은 고독의 성질을 바꾸는 데 있다. '고독 = 나쁜 것'이란 도식을 바꾸면 된다. '고독= 좋은 것'은 될 수 없어도 최소한 '나쁘진 않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다. 사람은 무리 속에서도 고독하다. 나와 너의 생각을 100% 싱크할 수 없다. 남과 소통을 위해 언어가 필요하다. 생각을 언어로 치환해 누군가와 나눈다. 생각과 언어의 괴리로 인해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다. 결국 인간은 언제나 고독하다. 혼자 있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고독과 친하다. 그리고 그가 바로 의식이 있는 동안 언제고 할 수 있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고독과 친해지기 위해선 놀이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왜?를 던지고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과학과는 또 다르다. 우리 감정은 사실 관계로 답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의 영역에 있다. 어제 맞았던 근거는 오늘 틀릴 수 있다. 이런 감정이 있을 수 있고, 근간에 이런 게 있을 수 있다. 확정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왜냐하면 이렇기 때문이야. 저자의 왜냐하면에 공감하면 나의 (임시적) 답이 되는 것이다. 인문학이 뭐냐고 묻는다면, 느끼함을 감수하고 '영원한 묻고 답하기'라 답한다. 2024년의 내가 내린 (임시적) 답이다.


'흐름의 의식'이든 '의식의 흐름'이든 가리키는 대상은 같다. '생각나는 대로 손가락 휘두르고 그 안에서 의미 찾기'다. 약간의 뉘앙스 차이, 전제 차이, 능동 수동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상 사느라 바쁘다. 뜻이 통하는 이상 미묘한 디테일 구분 짓는 것은 경제적 행동이 아니다. 우리 뇌는 에너지 총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인문학 하기는 이 경제성을 역행하는 행동이다. 인문학 매니아로서 장난으로 지은 흐름의 의식이란 소제목을 분해한다. 케이스를 열고 모터를 보고, 제동 장치를 보고, 구리스가 얼마나 발린지 본다. 완벽히 같은 외관 속에 마이너한 디테일 차이가 있다.


단골 카페에 자리 잡고, 커피 홀짝이며 5시간씩 앉아 있는다. 점주 입장에선 속 타는 일이다. 내 입장에선 유쾌한 일이다. 커피값 6불 내면 에어컨 잘 나오고 읽을거리 많고, 가끔 사람 구경하고, 공짜로 물 마실 수 있는 환경을 얻는다. 체류 기간은 내 의지에 따라 나뉜다. 오래 앉을수록 경제적으로 이득이다. 나는 경제적 이득을 보기 위해 기어코 그 공간을 몇 시간 점유한다. 굳이 카페를 찾는 이유는 헛짓거리 안 하기 위함이다. 체면을 볼모로 제재를 가한다. 사람들 이렇게 많은데 모바일 게임하지 않을 거지? 넷플릭스로 드라마 보지 않을 거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한다. 




정적으로 산다. 잠 깬다. 침대에서 한 시간 눕는다. 외출한다. Hikari 의자에 5시간 앉는다. 카페 문 닫을 즈음 나온다. 매장 사무실 의자에 3시간 앉는다. 귀가한다. 서재 의자에 2시간 앉는다. 침대에 눕는다. 잠 잔다. 내 하루는 의자와 침대 위에 존재한다. 글 쓰고, 책 읽는다. 둘 다 묻고 답하는 활동이다. 세상에서 내가 위치한 곳의 좌표를 찍고, 흘러가는 생각을 포획하고, 행동의 원인을 찾는다. 모든 과정에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질문이 너무 많다. 대답하다 보면 하루가 끝난다. 밖에서 보면 정지화면이지만, 안에는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다. 시답잖은 문제에 천착한다. 의식의 흐름과 흐름의 의식을 비교하며 3시간 보낸다. 할 만하다. 앞선 표현을 빌려오자면, 의식이 있는 동안 언제고 할 수 있는 행동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비교적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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