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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Feb 03. 2017

얼음과 대화하다

 "아 씨발 존나 춥네"


 학창 시절 하굣길에서 나누는 대화는 거칠었다. 겨울이 되면 도보로 통학했다. 꽁꽁 언 도로의 위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10분 거리를 30분 걸려 가려니 짜증이 치밀었다.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걸음걸음 귀찮음을 직격으로 맞았다. '와 멀다. 춥다. 자전거 탔으면 진작 도착했을 텐데.' 구시렁대며 눈 앞에 보이는 작은 빙판을 깨트렸다. 친구와 같이 저주를 퍼부었다. 거지 같은 얼음. 


 "Can I get a cup of water with some ice Please?"


 돈 주고 물 사 먹는 게 당연한 요즘이다. 호주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면 눈치를 덜 보고 얼음물을 요구할 수 있다. 물과 얼음을 추가금 없이 얻을 수 있다니, 완전 이득이다. 뜨거운 커피를 얼음이 담긴 컵에 부으면 아이스커피가 된다. 하나의 가격으로 두 가지 즐거움을 누린다. 얼음 몇 개에 커피의 맛과 인상이 달라진다. 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을 입에 넣는다. 시원함이 입 안에 가득하다. 덩어리가 작아지면 와작 소리를 내며 얼음을 깬다. 더위를 부수는 기분이다. 


 "다 만들었어 나와"


 친구와 같이 먹을 요량으로 차가운 육수에 면을 넣는다. 여름엔 냉국수와 냉면이 맛있다. 한인 마트에서 국시장국 원액을 사거나, 육수용 분말을 산다. 면이 거의 익을 때쯤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육수를 만든다. 물 만으론 시원함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에, 얼음을 넣는다. 면 요리는 계절 가리지 않지만, 계절에 어울리는 국물의 온도가 있다. 여름이면 쫄깃하고 시원한 면발로 뜨거운 식도를 달래준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여름 면발의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얼음은 필수다. 면을 다 먹고 얼음 동동 떠다니는 시원한 국물을 그릇째 마신다. 이게 여름의 즐거움이지. 


 "고생하네"


 인터넷에서 특수부대의 겨울나는 방법이란 글을 읽었다. 그들은 영하 10도, 체감 온도는 그 이하라는 날에 얼음을 깨고 계곡에 들어간다. 샤워할 때 물이 조금만 차가워도 유난 떤다. 겨울에 얼음물 입수라니, 지옥이 따로 없네. 온기가 가득한 방 안을 둘러본다. 따뜻하게 덥혀진 침대 사이로 들어간다. 전기장판의 온기가 등에 전해진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상상하니 당연한 일상이 감사하다. 평생 빙판 깨면서까지 계곡에 입수할 일은 없겠지.


'너무 비싼데?'


 한국인이 운영하는 빵집에 가서 메뉴표를 본다. 팥빙수 16불. 하나에 만 오천원인 셈인데, 크기는 작은 그릇에 봉긋하게 담길 정도. 양은 한국의 절반, 가격은 두 배. 호주의 물가는 주기적으로 소비의 경각심을 심어준다. 얼음 몇 덩이 갈아서 팥 올린 이 별 볼일 없는 간식에 16불을 써야 하다니. 여자친구 친구들 앞에선 없던 배포를 만들어야 한다. 커피 몇 잔, 팥빙수도 하나 주세요. 카드는 주머니 밖을 나가고 싶지 않다. 팥빙수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말해줘. 생각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영수증 드릴까요?


 인간처럼 사물 역시 하나의 본질로 규정하기엔 쓰임이 많다. 0도 이하의 온도와 물이 만나면 얼음이 된다. 물의 여러 형태 중 하나인 얼음마저 이처럼 다른 모습, 다른 인상, 다른 역할을 갖는다. 나도 누군가에겐 존나 귀찮은 존재, 누군가에겐 가끔 만나는 즐거운 존재, 누군가에겐 자신의 처지를 위안하게 만드는 존재, 누군가에게는 실속 없는 존재로 비칠 수 있다. 가능하면 가끔 만나 소식을 들어 즐거운 냉면 육수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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