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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May 18. 2017

뒤지고 싶냐?

 내 글 쓰는 버릇 중에 하나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제목으로 쓰는 것이다. 구상 없이 갑자기 생각난 자극적인 말을 제목란에 옮긴다. 뭘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막연함이 즐겁다. 이런 제목이라면 어떤 글을 쓸까? 쓰면서 대답한다. 추상적이고 비이성적인 제목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을 부른다. 모든 내용은 즉흥적이다. 이런 형식의 글쓰기는 꿈꾸는 것과 같다. 논리가 없고, 기복이 심하고, 무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글쓰기는 이래야 한다는 당위성을 벗어나면 더 긴 글쓰기 여정이 가능한다. 네비 보고 목적지로 운전하는 것은 일이다. 반대로 목적 없이 페달을 밟을 땐 드라이브가 된다. 드라이브는 즐겁다. 글쓰기가 운전이라면 이런류의 글은 드라이브다. 게다가 기름도 먹지 않는다.


 대개 뒤지고 싶냐는 말은 철학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 죽음을 사유해볼까? 삶의 이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물리적 제약을 벗어날 때 진정 자유로울까? 육체 없이 자아가 존재할까? 흥미롭지만 여기선 아니다. 네가 나의 기분을 망치고 있다. 그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상황에 따라 물리적 충돌이 있을 수 있다. 등의 경고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런 경고엔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멈춤, 지속이다. 질문에 맞춰 대답한다면, '뒤질 준비가 됐다.' '뒤지고 싶지 않다.' 멈춤을 골랐을 때 상대에게 좁밥으로 보인다는 리스크가 있다. 적당한 균형감을 가져야 한다. 물리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좁밥이 되지 않는 방법을 재빠르게 찾아 실행해야 한다. 상대가 자기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대립된 가치의 충돌은 빈번하다. 내 안에도 힘의 줄다리기가 있다. 


 일본어 실력이 뒤지고 있다. 일본인과의 마지막 대화가 일 년 전이다. 아무 조치 없인 완전 뒤질 수 있다. 제2언어는 쓰지 않으면 금방 실력이 줄어든다. 일본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싶어도, 막상 한 번 이상 만나기 부담스럽다. 자주 써먹으라고 협박하는 한편, 불편하다고 거절한다. 


 블로그는 뒤질 것 같은데 안 뒤진다. 계속 뭘 쓰는데, 방문자는 줄어든다. 아카이브 시스템이 제 역할을 못 한다. 초창기에는 네이버가 자주 노출해준 덕분에 방문자가 어느 정도 있었다. 네이버가 결국 블로그의 영양실조를 발견했다. 재미도, 정보도 없는 글을 퍼 나를 필요가 없다. 테드톡의 강연을 보는 일은 영어실력, 지식 획득에 도움이 된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생소한 세계를 이야기한다. 최근엔 테드톡의 디렉터가 강연자로서 발표를 했다. 주제는 테드톡 강연자의 소양이었다. 강연자가 되기 위해선 대중의 가슴을 울릴 특별한 메테리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자기만족으로 강연할 생각이면 근처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블로그 내용을 토대로 테드 톡 강연을 신청한다면, 즉시 거절이다. 블로그 존재 이유가 자기만족이기 때문이다. 


 사 먹는 커피는 맛있다. 두 시간째 홀짝이며 반 정도 마셨다. 소변을 오래 참다 보니 방광이 뒤지려고 한다. 카페에서 화장실까지 거리가 멀다. 혼자서 카페를 오는 편인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화장실 갈 때마다 짐을 방치한다. 한번 짐 싸서 나가면, 눈치 보여 카페로 돌아올 수 없다. 참다 참다 짐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광이 요단강에서 돌아왔다.


  그간 브런치에 업데이트한 글이 꽤 된다. 몇 개는 링크를 걸어 페이스북 개인 계정에 노출시켰다. 지인분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체크하시죠. 어느 순간 낯간지러워 뒤질 것 같아 업로드를 멈췄다. 얼마 뒤엔 모든 링크를 삭제했다. 그리고 실명으로 기재되어 있던 작가명을 변경했다. 인터넷 세상에 자신을 증명할 증거를 없앴다. 뒤진 거나 다름없다. 익명성에 힘입어 자유롭게 자신을 폭로할 수 있다. 복면가왕에서 거북선 remix 부르고, 패배 후에도 복면을 벗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설명충 등장. 거북선 리믹스는 애창곡인데, 방송용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아도 쓰고 싶은 글 쓰고 신분도 숨기겠다는 뜻이죠.


 예술에서 비평가의 입김이 세다. 예전에 쓴 비평글 중 하나는 캐슬린 킴이 쓴 예술의 가치를 보는 시선을 다루고 있다. 21세기의 복잡한 세상엔 다양한 판단 기준이 있다는 게 요점다. 그러나 여전히 비평가의 입김이 제일이다. 내가 1~5를 썼는데, 어떤 문학 평론가가 나타나 오 이 글은 16, 30을 다루고 있군. 왜냐면 이런이런 이유 때문이지.라고 해주면 완전 땡큐인데. 후훗 제가 의도한 것이 그것입니다. 제대로 봤군요. 얻어걸리는 문학 피카소가 되면 신이 나겠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니 요행은 뒤져야 한다. 사회 정의를 위해, 자신을 위해서.

 

 가끔 이런 막 뱉는 글을 쓰며 얻는 득을 생각한다. 글쓰기 실력을 늘리는 것도 아니고, 사고의 틀을 넓히는 것도 아니고, 실용적이지도 않고, 정보의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식 비밀 공유의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장력을 키워주는 것도 아니고,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것도 아니다. 계산적인 내가 볼 때, 쓸 이유가 없다. 드라이브는 기분전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뒤져야 하는 글인데, 뒤지지 않는다. 


 최근에 여자친구가 말했다. 네가 정기적으로 칼럼 쓰기 전에 쓴 글이 난 더 좋아. 그때는 정리된 느낌이 덜했지만 참신하고 보는 재미가 있었어. 근데 지금은 매번 쓰는 패턴 답습하는 것 같아. 나만의 작법이다, 스타일이다라고 변호하는 건 알겠는데, 내가 느끼기엔 그래. 애매했다. 글을 많이 쓰면 쓸 수록 내가 사는 건가 뒤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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