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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건너온 선물의 슬픔

버려나 하나

by 악어엄마

사바는 파키스탄에서 왔다. 서른 초반, 미혼의 무슬림 여성, 독일에 혼자 건너와 비자로 괴롭히는 인간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종합병원 간호사로 자리 잡았다. 온 지 5년 만에 독일 시민권과 운전면허증도 땄다.


올해 가을, 사바는 독일 여권을 들고 고국 파키스탄으로 휴가를 간다고 했다. 가족들 선물을 사야 한다며 슈퍼마켓 카트를 밀었다. 과자, 젤리,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손에도 봉지를 잔뜩 들었는데도 “이제 태블릿을 사러 가야 한다”라고 했다. 열한 살, 열두 살짜리 조카들이 받고 싶은 선물을 리스트로 보내왔단다. 나는 속으로 ‘뭐 이런 뻔뻔한 애들이 다 있나’ 했다. 사바는 결국 가방 추가 요금까지 내며 고향 방문 짐을 채웠다.


사바에게 나는 엄마가 인천공항에서 사 오신 비싼 마스크팩 한 묶음을 건넸다. 그리고 혹시 파키스탄에서 마살라(향신료)와 툴시차(Tulsi, Holy Basil)를 사 올 수 있냐고 부탁했다. 나름대로 연대의 표시였다. 독일에서도 마살라나 차를 살 수 있지만, “네가 먹는 걸 나도 먹는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민자끼리 음식을 교환하며 맛을 공유하는 것보다 서로를 인정하는 방식은 없다고 생각했다.


한 달 넘는 고향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사바는 저녁 약속 자리에서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꺼냈다. 남편 쓰라고 향수, 내가 부탁한 마살라, 툴시차, 그리고 검은 손가방. 사실 그녀 엄마가 내 선물로 옷을 사라고 했는데 내 취향에 안 맞을 것 같아 겨우겨우 가방으로 타협했다고 했다. 에코백만 메고 다니는 나에게 손가방도 사실 취향이 아니었지만 고맙다고 받아왔다. 무엇보다 물 건너온 툴시차가 반가웠다. 카페인이 없어도 정신이 번쩍 들고 집중력이 확 오르는, 커피보다 훨씬 나에게 잘 맞는 차였다. 시내 남아시아 상점에서는 구하기 힘들어서 더 기대됐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을 끓여 차를 우렸다.

엉?


냄새가 이상했다. 딸기향이었다.

‘유기농’이라고 쓰인 포장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욕이 튀어 나왔다.


스티커는 정품을 찍은 사진을 칼라복사한 것이었다. 핸드폰 스캔 기능을 쓴 건지 모양은 찌그러져 있었고, 해상도는 낮아 글씨가 뭉개져 읽을 수 없었다. 유기농 툴시차에서 인공 딸기향이 날 리가 없었다. 인터넷에 “파키스탄 짜가 차 Pakistan counterfeit tea”를 검색했다. 예상이 맞았다. 남아시아에서는 유통 불가능한 차 찌꺼기와 쓰레기를 섞어 가짜 차를 파는 게 흔하다고 했다. 사바가 사 온 것은 인도 브랜드 FGO의 짝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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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도 나고, 미안하고, 황당하고, 온갖 감정이 밀려왔다. 독일 사는 한국 여자를 위해 자기는 안 마시는 툴시차를 찾아 헤맸을 사바의 모습과, 그런 그녀에게 가짜 툴시차를 내놓았을 양심 없는 가게 주인을 머리에 그렸다. 그리고 독일에서 파키스탄 가족에게 돈을 송금해가며 사는 미혼 고모에게 “먹고 싶은 과자 브랜드”와 “태블릿 기종”을 당당히 밝히는 조카들을 상상했다.


선물이 성립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공감대가 필요하다. 관계와 계급과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없으면 어떤 선물은 말 그대로 독약이 된다. 물을 건너온 선물에 들어 있는 세계가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나의 세계를 담아 선물할 때, 어떤 사람의 세계에서는 ‘안전에 대한 의식이라고는 없는 가게 주인’까지 눈치 없게 딸려오기도 한다. 사바가 이 조잡한 포장을 보고도 이 게 가짜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건, 한 편으론 비교적 안전한 규범 속에서만 자란 나의 특권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우린 딱 보면 아는 것들—사실 그게 정체성이고 문화이고 오랜 시간 쌓인 감각이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미국 노교수가 유통기한이 15년 지난 고급 인삼차 세트를 보여주며 “이게 뭐냐”라고 묻던 일이 떠올랐다. 한국 부모가 멀리서 공부하고 있는 자식의 "미국 교수님"을 위해 비싼 인삼차 세트를 손에 쥐여 보냈을 텐데, 선물이 뭔지 뜯어보지도 않은 채 다락에 넣어둔 그 미국인의 무지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버리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보관은 했던 그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물 건너온 선물은 그래서 애달프다. 물건만 오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한다.


사바가 준 다른 선물에는 "미국, 캐나다, 영국, 중동, 호주, 뉴질랜드 수출 부적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 이 것도 먹기가 괜히 찝찝하다. 사바에게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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