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 Jan 07. 2021

우리 아빠



  아빠는 어릴 때 힘들게 살았다. 청송에서도 제일 골짜기, 그리고 그 동네에서도 제일 못 사는 집. 그 집의 막내아들 우리 아빠. 할아버지마저 13세에 돌아가셨다. 친구처럼 고무신 신고 학교 간 적도 없었고, 아빠의 크레파스를 가져본 적도 없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아빠는 색깔을 잘 모른다. 중학교 시험 붙던 날 할머니는 동네 떠나가라 우셨단다. 학교 보낼 돈이 없다고. 학교 가지 않고 집에서 집안일을 돕던 아빠는 어느 날, 할머니께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와 형이 있는 대구로 왔고, 두 형의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가난은 계속 아빠를 따라다녔고, 결혼해서 엄마를 만날 때까지 아빠는 하루를 걱정하는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이런 환경에서 컸던 우리 아빠는 나에게 어떤 아빠였을까. 

  "아빠, 차 사고가 났어요."

  "거기 가만히 있어래이. 아빠 금방 가께."

"아빠 이번 설에는 우리 가족 어디 놀러 가요?"

"어디 갈까? 너거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해봐라. 어디든 가자."

"릴리야, 아빠가 맨날 술 먹고 와서 미안테이."

"릴리야, 니 건강은 좀 어떠노? 내는 맨날 니 걱정뿐이대이."

우리 아빠는 세상에 둘도 없는 딸바보다. 받은 사랑이 별로 없다 보니 아빠는 사랑의 표현방법을 잘 모르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아빠에게 사랑받았다고 느낀다. 아빠가 힘들게 사셨기에 딸에게는 절대로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생각하셨기에 참 풍족하게 살았다. 편안하게 살았다. 가끔씩 아빠의 짜증이 나의 짜증으로 왔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도 그건 잠시뿐. 아빠의 짜증보다 아빠의 사랑이 나에게는 훨씬 크다. 엄마의 일에 대한 열정 때문에 두 분 사이가 안 좋았을 뿐이지, 나에게는 최고의 아빠였다. 차 사고가 나도 맨 먼저 전화하는 사람이 아빠였고, 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전화하는 사람도 아빠였다. 큰 수식어가 없어도, 긴 말이 없어도 옆에서 묵묵히 내가 가는 길을 지켜봐 주신 건 우리 아빠였다. 

난 아빠랑 똑같이 생겼다.

난 아빠랑 똑같이 일을 편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철저히 검토해서 실수는 없다.

난 아빠처럼 음악을 사랑한다. 

난 아빠처럼 악기 연주를 잘한다

난 아빠처럼 노래를 잘한다. 합창도 했다.

난 아빠처럼 성실하다. 꾸준하다.

난 아빠처럼 술을 즐긴다.  

난 아빠처럼 눈물이 많다. 

난 아빠처럼 욕도 가끔씩 잘한다.

난 아빠처럼 돈이 없어지면 무섭다. 

난 아빠처럼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난 아빠처럼 운동을 잘하고 싶다.

난 아빠처럼 다른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리고 싶다.

난 아빠처럼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난 아빠 딸일 수밖에 없네. 다시 태어나면? 난 다시 아빠 딸이고 싶다. 그냥 우리 아빠가 참 좋다. 다시 만나서 내가 어릴 적, 아빠의 젊을 적 추억을 더 만들고 싶다. 대체 불가 우리 아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더 해빙 The having - 나를 having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