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적은 일기
2017/11/18
Sea day
여기는 내가 솔로 피아노 세트를 연주하는 곳!
오늘 처음으로 솔로 피아노 연주했는데, 그럭저럭 잘했지만 평소에 연습 좀 할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ㅋㅋ
90분 연주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사람들이 연주 들으러 많이 와줘서 고마웠지만, 주목받는 건 늘 어렵고 지친다. 이런 걸 극복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밴드 멤버들을 만났다! 뮤지션들이랑 어울리는 거 그리웠는데 이렇게 또 재밌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니 기분이 좋다. ㅋㅋ
기타리스트 이름은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ㅋㅋㅋ 발음 한마디만 들어도 이탈리안인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곱슬머리에 안경 쓴 아담한 미켈란젤로. 약간 제페토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인물이다.
베이시스트는 키가 2미터쯤 되는 캐나다인 올리비예. 굉장히 차분하다. 베이시스트들은 대부분 우직하고 차분한 것 같다.
아담한 미켈란젤로랑 거대한 올리비예 둘이 룸메라는데 패트와 매트같다. ㅋㅋㅋ
세컨드 키보디스트는 Joe라는 영국인인데, "죠-"라고 하 면 될 것을 왜 "죠-ㅓ"라고 발음하니.. 오랜만에 영국 영어 좀 듣겠군. 하여튼 여기선 미국영어가 흔치 않다. 다 가지각각의 영어를 하는데 서로 잘 알아듣는 신기한 곳이다.
드러머는 미국인 아담! 조금 차가워 보이는데 말은 많고 빠르다.
미켈란젤로, 올리비예, 조, 아담,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린 5인조 "The Band"다. 밴드 이름 좀 만들어주지 더 밴드가 뭐람... ㅡ.ㅡ
멤버들이랑 저녁 먹고 탁구랑 Foosball을 했는데 나 진짜 못하네.ㅋㅋㅋㅋㅋ 새로운 취미 발견!! 열심히 해서 배 떠나기 전에 프로가 될테야!!!
이번 배에도 역시 나 혼자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있는게 더 이상하지 뭘. ㅎㅎ
"Are you from Korea? 안녕하쎄요~" 듣는 것도 익숙하다.
난 한국인인데 미국에 살아.. 라고 1000번 말할 준비도 되어있다.
이제 칵테일 한잔 마시며 클래식 음악 들으러 가야지. 뿅
2017/11/19
Sea day
어젯밤에 여기서 별 가득한 하늘을 봤는데 너어어어무 예뻤다. 왕 별똥별도 봤다. 이번 배는 Officer's Bar가 이렇게 뱃머리랑 붙어있어서 놀다가 바깥바람 쐴 수 있는 게 좋다! 진짜 어젯밤 하늘은 여태 본 밤하늘 중 두 번째로 아름다웠다.
오늘 저녁까지 내 이름표가 없어서 많은 크루들이 날 이상하게 쳐다봤다. 스파에서 일하냐, 씽어냐, 샵에서 일하냐, 등등 다 틀린 걸 물어서 기회 될 때마다 나는 엊그제 온 피아니스트라고 소개를 했다.
이름표 픽업하러 가는 길에 또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가 멍청이처럼 걸어 다니는 게 티가 났는지 오피서 한분이 "Young lady, what do you do here?" 속 시원하게 물어봐주시고 길안내를 해주셨다. 내가 이름표도 없고 유니폼도 없이 돌아다녀서 누군가 했었단다. 게다가 오늘은 종일 일도 없이 돌아다녔으니 의아하게 봤을 만도 하지. 내일부턴 이름표 달고 다닐 테니 좀 덜 눈치 보이겠다.
오늘 너무 심심해서 빅뱅이론을 무려 15편이나 봤다. 2년 전이랑 다르게 티비에 볼거리가 많아서 그나마 덜 심심하겠다. 인터넷 667mb짜리 사놨는데 하루 만에 100mb를 썼다. 이번에도 샌디에고 가서 폭풍쇼핑을 해야 할 듯하다. 잘 챙겨 온다고 챙겼는데 역시 갑작스레 오는 바람에 빠뜨린 게 많다.
하.. 암튼 오늘은 너무 심심한 날이었다. 잠은 안 오고 인터넷을 맘껏 할 수도 없으니 이렇게 끄적이면서 잠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근데 배만 고파지네. 내일 아침엔 또 트레이닝이랑 드릴이 있어서 일찍 일어나야 된다. 형광색 구명조끼 입고 집합... 안전교육 중요한 건 알겠는데 너무 자주 한다. ㅠㅠ
2017/11/20
Aruba!!
이틀의 Sea day를 보내고 오늘은 아루바에 왔다.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서 크루 트레이닝받고 구명조끼 입고 드릴 했는데...
내 머리 높이 = 사람들의 조끼 높이
하필 집합해서 중간에 낑겨 서있어 가지고 사방에서 뚱땡이 구명조끼로 내 머리를 쿵쿵 ㅠㅠ
다시는 중간에 안 서있을 거야. 다음부턴 맨 앞에 서야지.
오늘 일당은 쇼핑으로 탕진했다.
괜찮아, 돈은 언젠간 없어지지만 옷은 안 없어지니까 이득^^. 뭐래..
미렐라가 하도 아루바 아루바 거려서 엄청 예쁘고 대단한 덴 줄 알았는데 별거 없더만! 올 초에 갔던 Grand Turk 같은 바다를 기대했는데 실망.
Grand Turk 바다색은 모아나 그래픽 같았는데, 하와이도 그렇기를!!!!
일당을 통쾌하게 탕진하고 배에 들어와서 솔로피아노 두셋을 했다. 정말 아무거나 쳐도 된다고 해서 내 곡도 치고, 잘 모르는 곡 초견으로도 치고, 엊그제보단 맘도 편하고 수월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매번 같은 걸 칠 수 없으니 레퍼토리를 늘려야 하는데 연습할 곳이 없어서 어쩌지!
아, 오늘 저녁엔 내가 좋아하는 세비체가 나왔다!!! 뮤지션들이랑 같이 저녁 먹는데 한 아저씨가 같은 테이블에 앉길래 그냥 아무개 오피서인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캡틴이었다네?ㅋㅋ 너무 쿨해서 그냥 친구인 줄ㅋㅋㅋ
저녁 먹고, 공연 보고, 빅뱅이론 보고, 사람들이랑 수다 떨고, 뱃머리에서 별 보고 들어오니 새벽 두 시네. 별 하늘 진짜 예쁘다. 계속 생각날 거 같다.
2년 전에 같은 배에서 일했던 친구 두 명을 여기서 또 만났다. 별로 안 친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네?
정말 신기한 게 댄서 애들은 어쩜 성격이랑 행동이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지..? 와 정말 2년 전 캐스트랑 다른 애들인데 행동이 똑같아.. 말 많고 심난하고 오버 리액션에, 남자 댄서들 게이인 것도 똑같고..!!
성격 밝고 친근하게 대해줘서 고마운데 너무 정신이 없다. 나 좀 차분한 친구들이 좋은 것 같아.. ^^
내일은 또 일이 없다.. 피아노 치게 해 줘.. 심심해.. 예전엔 하루에 4-5시간씩 연주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것도 서서!!! 그래도 적게 일하는 베짱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차원이 다른 베짱이 라이프다.
내일부터 또 3일이나 sea day다. 중미 몇 군데 들렀다가 sea day 연속으로 5일 보내고 하와이에 도착한단다. 하하하. 서비스업 하는 친구들은 sea day를 엄청 싫어한다. 모든 승객이 배에 있으니 당연히 그들에겐 바쁜 날이다.
나도 sea day를 별로 안 좋아한다. 이유는... 뷔페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 머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