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크루즈에서 노르웨이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곳이다.
알래스카 항구를 일주일마다 반복했듯이 이번엔 노르웨이 항구를 왔다 갔다 하는 루트였다.
반복 없이 매일 새 탐험하는 지중해 크루즈만큼 재미있진 않아도 황홀한 경관 속에 살면서 피아노 연주한다는 건 굉장히 감사스러운 일!
노르웨이 첫 번째 항구는 Flåm(플롬)이었다.
Flam에 내리자마자 느낀 건 알래스카랑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크루즈 피아니스트 in 알래스카 편에도 비슷한 사진이 있다.)
여러 번 방문할 예정이어서 첫날은 정처 없이 항구 근처를 거닐었다. 일종의 사전답사랄까?
플롬은 다른 노르웨이 항구도시에 비해서 평지가 넓은 편이었고, 이 날은 맑고 밝은 날이어서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사진으로도 물론 피오르드의 웅장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런 건 실물로 봐야 한다.
피오르드(Fjord)라는 단어는 미국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배웠다. 그때 지리에 관련된 단어(Fjord, Peninsula, Gulf, Bay)들을 배웠는데 fjord는 스펠링이 특이해서 유난히 더 기억에 남았다.
한국에서 갓 온 초등학교 4학년에겐 꽤 어려운 단어들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난 그 시절 미국에서 잠깐 배웠던 것들을 거의 다 기억한다.
나니아 연대기(The Witch, the Lion and the Wardrobe) 소설이 Reading class 주 교재였는데 다 이해하진 못해도 엄마의 도움과 영화 시청으로 재밌게 공부했던 기억도 나고, 지리 공부를 할 때 몇 번 펼쳐본, 책장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Atlas 지도책은 항상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국으로 떠날 때, 아쉬움과 함께 저 Atlas 책 한 권만 가지고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만큼 내가 좋아하는 책이었다.
물론 그 마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책을 가지진 못했지만 아직도 세계지도를 보면 그 교실에 있던 Atlas가 생각난다.
그때 세계지도에 대한 흥미는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게 될 내 미래에 대한 암시였던 걸까..!?
아무튼, 노르웨이 방문은 Fjord라는 단어를 배우면서 그림으로만 보던 풍경을 드디어 실제로 보고 느끼는 설레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런 사진을 보고 있자니 한국의 흔한 산골짜기 같아 보이기도 한다. ㅎㅎㅎ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꽤 된 시점에 노르웨이를 갔던지라 이게 흔한 풍경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미국에 사는 동안은 산을 볼 일이 없었고, 여태 크루즈로 다녔던 곳은 대부분 도시였어서 이렇게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듯한 자연은 마음을 뻥 뚫리게 했다.
노르웨이 물가는 상당히 비쌌다.
커피 한잔에 2-3유로 정도 하던 지중해 국가들에 비해 두 배는 넘는 물가였다.
그래서 노르웨이에서는 와이파이가 필요하지 않은 한 카페도 많이 가지 않았다.
같은 항구에 또 올 때마다 새로운 지역이나 액티비티를 찾아 나섰다. (그래봤자 어떤 산길을 걷느냐의 차이가 다였지만..ㅋㅋ)
물가 초원에서 귀여운 아기 염소들도 봤다.
내 어린 시절 국민 동요의 한 장면이었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있어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플롬이 늘 맑지만은 않았다.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엄마 찾아 음매 아빠 찾아 음매 울상을 짓다가~”
국민동요의 후반부 같은 날에 플롬에 내리기도 했다.
비가 오고 날이 흐리면 맑은 날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그런 날엔 크루즈에서 내리지 않고 크루즈 창 밖이나 데크에서 경치를 감상했다.
그러던 중 커다란 무지개도 보았다.
인생에서 이렇게 큰 무지개를 본 건 손에 꼽는데 그중 한 번이 바로 이곳, 노르웨이 플롬이었다.
다양한 날씨를 체험할 수 있는 건 같은 곳에 여러 번 와야 누릴 수 있는 보너스였다.
플롬 방문 n번째에는 자전거 라이딩도 했다.
친구 빅터는 직원들이 크루즈 내에서 대여할 수 있는 자전거 애용자였다.
같이 자전거 타자는 빅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도 자전거를 빌려서 물길을 따라 라이딩을 했다.
무지개 떴던 날과는 다르게 해가 쨍쨍한 날,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만이 유일하게 사람의 손이 닿은 문물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자연이 선사한 푸른빛이었다.
중간에 소 농장이 있길래 잠시 소들과 교감도 좀 하고(?) 러시아어로 소가 뭔지도 빅터가 가르쳐줬다. (기억 안 난다)
소를 보고 난 이 날 만큼은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코닝스담이 보이는 물가에서 사진도 찍고, 빅터는 나랑 놀면서 영어를 많이 배웠다.
미국 애들보다 내가 영어 설명을 쉽게 잘해준다며 best English teacher라는 타이틀까지 줬다.
나랑 놀다 보면 자연스레 새로운 영어 단어를 알게 됐고, 그때마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두곤 했다.
사실 내 어휘력은 부끄러울 만큼 부족한데…ㅋㅋㅋ Elaborate, Stoic, Capable 등의 단어를 가르쳐준 기억이 있다.
확실히 내가 코닝스 담을 떠날 때쯤 빅터의 영어실력은 초반에 비해 많이 향상되어 있었다.
나 같은 친구가 없지~
피오르드 지형 특성상 군데군데 폭포가 많았다.
그중 규모가 있는 폭포를 보러 가는 등산 코스가 나의 To-do 리스트 중 하나였다.
이 날 등산 메이트는 빅터와 마티였다.
베프 다음으로 친했던 빅터와 마티, 이 둘은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라 같이 다니기 참 편했다.
대부분의 엔터테인먼트 동료들은 너무 요란해서 재밌으면서도 피곤해질 때가 많았는데 빅터와 마티는 튀지 않으면서도 소소하게 재밌는 친구들이었다.
드론 뷰 아니고 내 눈 뷰!
돌아보니 당시 멋있는 영상을 참 많이 남겼는데 대부분 하드드라이브에 묻혀 있는 게 아쉽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크루즈 여행의 아쉬운 점은 항구 근처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구경하고 떠난다는 점이다.
플롬 항구 주변은 다양한 방식으로 탐험했으니 이번엔 관광 상품(Shore excursion)을 신청해서 플롬의 안쪽을 볼 기회가 있었다.
승객들과 관광버스를 타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 내륙으로 들어왔다.
구름 낀 날씨 덕분인지 피오르드 절벽이 더 짙고 깊어 보였다.
금수강산 대한민국 출신들에게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같은 뷰이려나?
플롬 외의 다른 노르웨이 협곡 항구들도 사실 다 비슷하긴 했지만 각각의 곳마다 다른 추억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