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류유산이라니, 내가. (3)

by 연주신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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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류유산 진단을 받은 다음날이 밝았다.

잠도 많이 못 자고 눈도 부어서 늦잠 좀 자고 싶었지만 예정된 운전면허 기능시험을 보러 아침 일찍 나가야 했다.

시험장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순간이 있었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슬픔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울 때가 아니잖아, 유튜브로 대충 숙지한 기능코스 시험 봐야 하니까 집중!!


미국에서 10년 넘게 운전한 내가..!!!! 기능시험에서 떨어졌다. 띠로리..

3초 이상 정지 구간에서 3초 전에 이동해서 감점, 그리고 우회전하다가 뒷바퀴가 차선에 닿았다고 감점.

에라잇… 걱정했던 T 주차는 시도도 못해보고 시험장을 나와야 했다.

쳇… 또 시험 보러 와야 하네.


날이 추웠다. 오들오들 떨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샀다.

그래~ 이제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운동도 편하게 할 수 있고, 이렇게 원래 일상대로 돌아오고 좋네!


집에서 아침을 먹고, 어제 차마 유산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지인 몇 명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 얘기를 곱씹으며 내 손으로 또 타이핑을 하고 있자니 눈물이 또 흘렀다. 걱정하는 가족의 카톡을 받고도 눈물이 나서 또 휴지를 한 움큼 쓰레기통에 버리고 눈가 부기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한 시간 정도 통역 일을 하러 출근을 해야 했다.

이때부터 생리통 같은 통증이 생기면서 약간의 출혈이 시작됐다. 슬슬 자연배출이 되는 건가? 그래도 일은 가야지.

난 이제 임산부가 아닌데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지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아직 가방에 달려있는 핑크 배지를 당장 떼는 게 맞는 일인 거 같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며칠만 더 고집부리기로 마음먹었다. 난 내일모레 입원도 해야 하고, 아직 내 뱃속엔 룰루가 있긴 있으니까, 임산부석에 앉아있다가 진짜 임산부가 오면 비켜줄 생각으로 그냥 핑크석에 앉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눈물이 글썽였다.

일하는 동안은 최대한 사람들과의 눈 맞춤을 피해서 어찌 저찌 눈물을 참아냈다.


아랫배 통증이 조금씩 심해져서 오늘내일 중에 임신조직이 자연스레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입원 날짜 전에 싹 빠져나와서 약물이나 수술이 필요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일 연주 중에 아프고 출혈이 심하면 어떡하지? -> 진통제랑 오버나이트 챙겨가는 게 내 솔루션이었다. 공연 하루 전에 대타를 구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팀에게도 지장이 생길 수 있으니 내가 해야지. 출산하는 것도 아닌데 아픈 거 참고 피아노 치는 거야 할 수 있지 뭐.


나도 참 징하다, 싶었다. 징징이 아니고 징이.

감기기운만 있어도 결근하고 일에서 손 떼는 사람도 많은데 유산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아침에 면허시험부터 출근에, 다음날은 재즈 페스티벌 연주하러 저 멀리 대전까지 가겠다니.

개근상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건 줄 알고 큰 사람은 이렇게 되나 보다.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면 내 아이는 나보다는 좀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키워야지. 할 일 좀 못하고 징징거려도 괜찮아!(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때만ㅋ)


퇴근길에 임산부석에 또 앉았다. 난 정말로 배도 아프고 피도 나니까 이번엔 합리화가 한결 쉬웠다. 멍하게 핑크석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중년의 아줌마가 나를 덮칠 듯이 다가오더니 “아이고 학생, 나 좀 앉자.” 하고 다짜고짜 내가 앉아있는 임산부석에 몸을 들이밀었다.

너무 순식간이라 상황파악도 하기 전에 이미 난 그 아줌마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 앞에 서게 됐다.

붐비는 지하철도 아니었고 그 아줌마가 넘어질 만큼 흔들리는 지하철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게 앉고 싶으면 일반석에 앉아있는 건장한 남자한테 가서 비키라고 해볼 것이지, 하필 임산부석에 와서 “학생, 나 좀 앉자“ 라니, 진짜 가지가지한다…… 그것도 하필 오늘.

“여기 임산부석이에요”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싶어 아무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쫄보라 그런 말 못 한다. '임산부석에 앉아있다가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나 같은 임산부는 그 앞에 서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하다. 임산부석은 제발 제발 비워뒀으면 좋겠다.)


집에 오자마자 “오빠!!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와.. 방금 진짜 역대급 웃긴 일 있었다?? 진짜 와~~~~~“

남편은 바로 “왜, 또 임산부석 누가 안 비켜줬어?” 하고 바로 이야기 주제를 눈치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임산부석 진상을 봤으면 남편이 그렇게 바로 알아챌까 ㅋㅋㅋㅋ


남편과 기분 전환을 위해 저녁 먹으러 빕스에 갈 준비를 했다. 매년 카드사에서 나오는 상품권으로 빕스를 가는 건 우리의 연중행사다. 보통 기쁜 기념일에 신나는 마음으로 가는데 이번엔 슬픔 극복하러 가는 빕스.

그나저나 배가 점점 더 아파오는데 괜찮으려나… ㅠㅠ

통증과 출혈이 심해지길래 철분제를 먹고 식후에 먹을 진통제와 생리대를 넉넉히 챙겼다.


집을 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아랫배가 더 아프고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서 화장실에 갔더니 예감대로 심상치 않은 덩어리가 나왔다.

지름 3cm 정도 되는 젤리 같은 핏덩어리였다.

어제 브이로그에서 봤던 유산된 아기집..! 바로 이거구나..!!

이 안에 젤리 곰 같은 태아가 있겠구나 싶었지만 무섭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안에 있는 팔다리가 뿅 나온 룰루의 형태를 봤다면 달랐겠지만 그건 영원히 보지 않기로…

그냥 신기하고 홀가분했다. 아랫배 통증도 많이 잦아들었다.


아기집 덩어리가 나왔다고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자기도 보고 싶은데 왜 안 보여줬냐며 아쉬워했다.

에이 그걸 뭐 하러 봐.. 그냥 핏덩어리였어~~~

우린 크게 안도했다. 그럼 입원 안 해도 되겠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빕스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컨디션도 좋고 날씨도 좋고, 그렇게 기분 좋게 집을 나와 남편과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5분쯤 앉아있다가 정류장 벤치에서 일어서는 순간, 여자들은 아는, 생리가 후두둑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강렬히 들었다. 이건 일반적인 생리 느낌이 아니었다.

아.. 이건 생리대가 못 버틸 거 같은데….. 까만 츄리닝 바지를 입긴 했지만 바지에 좀 묻을 거 같았다…

마음 졸이며 일단 버스에 탔다.


내리자마자 화장실 가야지.

아까 나온 덩어리가 다가 아니었나?

오늘 종일 피가 나왔는데 또 나올 게 있단 말이야?

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남편에게 상황을 속닥속닥 말하고 정류장 바로 앞 백화점 1층 화장실로 달려갔다.

세상에.

집에서 나온 핏덩이는 그냥 예고편에 불과했구나?

이번엔 웬 내장 같은 게 주먹만큼 나와 있었다. 아마 태반 같은 거겠지?

이런 어마무시한 게 나오다니.

이번에도 역시 무섭진 않고 오히려 신기해서 한참을 관찰했다.

그동안 태아를 위해 이런 걸 만든 내 몸이 대견했다.

임신은 끝났지만 그동안 열심히 일했다, 나야. 기특해.

예상대로 생리대는 역부족이었고 까만 바지가 살짝 젖었다.

다행히 오버나이트 생리대를 챙겨왔기에 처치를 잘하고, 백화점 1층에서 만 원짜리 츄리닝 바지를 사서 갈아입었다. 바지 득템!!!!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고 아랫배가 날씬해진 기분이었다.

"오빠, 몸무게 1킬로는 줄어든 느낌이야!!!" (줄지 않았다)

자궁이 깨끗이 비워진 거라고 확신했다.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다. 입원 취소 해야지~~


빕스에 대기를 걸어두고 우린 아이쇼핑을 하며 소소한 데이트를 했다. 특별한걸 안 해도 같이 다니면 그냥 재미있다. 기분이 더 많이 좋아졌다. 이제 둘이서 스케이트도 실컷 타고, 스키장도 가고, 회도 먹으면서 재밌는 연말을 보낼 기쁜 기대가 마음을 채웠다. 빕스에서 달콤 바삭한 와플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집에 돌아와 우리의 필수 루틴, 맘보 밤산책까지 다녀오니 금요일도 저물었다.


냉장고에 붙어있던 룰루 초음파 사진도 떼고, 창틀에 놓은 w009 주수 달력도 치웠다. 다음 아기가 생기면 다시 놓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슬픈 마음 없이 집을 정리했다.

그렇게 그날 밤은 울지 않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이젠 정말 울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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