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눈을 떴다. 계류유산 진단을 받은 지 딱 48시간 되는 때였다.
남편과 나는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아이스 스케이팅 강습을 받으러 간다.
나는 피겨, 남편은 쇼트트랙.
같이 아이스링크 다니는 건 우리에게 큰 즐거움이다. 그래서 임신 중에도 스케이팅 강습을 그만두지 않았다.
내가 자주 넘어지는 강습생이었으면 임신하자마자 그만뒀을 텐데, 난 굉장히 (과하게) 조심스럽게 타기 때문에 임신 중에도 조심조심 스케이팅을 해왔다. 너무 조심스럽게 타서 실력이 전혀 늘지 않는 게 단점이었지만, 체력도 좋고 입덧도 없는데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그만 두면 너무 답답하고 오히려 스트레스일 것 같아 안전한 스케이팅은 괜찮게 여겼다. 그리고 위험한 순간 한번 없이 정말 괜찮았다.
이번 토요일 강습 역시 빠지고 싶지 않았다.
전 날 내장 덩어리 같은 게 내 몸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밥도 잘 먹었고, 잠도 잘 잤고, 통증도 없으니 아이스링크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제 뱃속에 태아가 없으니 덜 조심스럽게, 좀 과감하게 타도 된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용기가 생겼다.
두 시간 스케이팅 강습을 마치고 우린 바로 대전 재즈페스티벌로 출발했다.
토요일 낮이라 세 시간이나 달려야 했다.
생리처럼 출혈이 있었지만 아프거나 크게 불편한 건 없었다.
내 임신과 유산 소식을 다 알고 있는 밴드 멤버들과 공연 준비를 하면서 간단하게 내 컨디션 얘기를 했다.
다들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면서도 건강한 아기 금방 생길 거라는 긍정적인 응원을 해주니 나도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고마운 밴드 멤버들, 내 임신 소식을 알았을 때 진심으로 많이 기뻐해줬는데.. 조만간 또 다 같이 기뻐할 수 있기를.
해가 지니 날이 추웠지만 전 날 임신 조직이 대부분 배출되어서 그런지 아무런 지장 없이 공연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늦은 밤 집에 도착해서 씻자마자 잠들고, 눈을 뜨니 일요일 오전 11시였다. 10시간을 푹 잔 거였다.
그럴만하지. 목, 금, 토 3일 내내 잠도 많이 못 자고 몸과 마음 모두 쉴 틈이 없었으니..
고생했다, 나야. 8주 정도 임신이라는 여행에 잠깐 다녀왔다가 일상으로 복귀한 거야! 이제 쉬자!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데 예정대로 입원 안내 문자가 왔다. 전화해서 입원 취소를 요청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거실로 나왔더니 맘보도 아직 졸린지 소파에서 꿈쩍도 안 하고 눈빛으로만 아침 인사를 했다. 맘보는 피곤할 이유가 없는데 우리의 피로가 옮았나? 아무튼 존재만으로도 우리집에 사랑과 위로와 기쁨을 가득 채워주는 맘보다.
그렇게 아침잠을 많이 잤는데도 초저녁에 또 낮잠을 잤다.
베프가 우리집에 놀러오는 꿈을 꾸며 한참을 자고 일어났더니 베프로부터 카톡이 와있었다.
남편이 안방으로 오더니 "ㅇㅇ이 지금 우리집으로 온다네?"
"엥? 지금?? 나 ㅇㅇ이 우리집 오는 꿈 꾸고 있었는데???"
내 꿈은 역시 미래에 대한 힌트를 자주 보여준다.
내가 자느라 답장이 없자 베프는 우리집에 잠깐 와도 되냐는 연락을 남편에게 했고, 내가 깼을 땐 이미 우리집에 거의 다 온 상황이었다.
내 유산 소식을 듣고 손수 반찬과 닭곰탕을 만들어 배달하러 온 거였다. ㅠㅠ
본인도 지금 심난한 시기면서.. 낮잠 퍼질러 자고 있는 날 위해 따뜻한 집밥 배달이라니.. 고맙고 미안하고..
ㅠㅠ
정성으로 가득한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채웠다.
울지도 않고 감정의 요동 없는 평안한 일요일을 보냈다. 입원해서 고생하고 있었을 거 생각하니 근 3일의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진 게 감사했다.
유산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자연배출이 되기 전에 약물치료나 수술을 했을 수도 있었고, 반대로 목요일 검진을 안 했다면 이유도 모른 채 피를 쏟아낸 후 유산 사실을 알았을 텐데 그럼 얼마나 더 충격이 컸을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여러 가지로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슬픔이 가라앉고 평안함이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게 가장 감사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계류유산 진단을 받은 3일 전 아침부터 지금까지 ‘왜 나에게?’ 보다는 ‘나는 모르지만 다 이유가 있겠지, 하나님이 날 무조건 힘들게만 하진 않으실 거야’ 하는 희망을 그렸다.
근거 없는 자신감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냥 그렇게 믿고 사는 사람인 걸?
월요일 아침엔 한의원에 갔다, 임신 지원금 바우처로 유산 후 진료 및 한약 처방을 받으러.
한의원 원장님께서 슬픈 눈빛으로 위로를 해주셨는데 순간 또 눈물이 찔끔 흘렀다. 이틀 만에 나온 눈물이었지만 어제 괜찮았던 마음을 되새기고 금방 그칠 수 있었다. 자궁 회복에 좋다는 한약을 받고 침도 맞았다.
찬 음식, 찬 바람 무조건 피하고 항상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하셨는데 집에 가는 길이 무척 추웠다. 통증은 없었지만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후엔 산부인과 진료도 가야 하니까 환자가 맞긴 맞지..
보스한테서 연락이 왔다. 내일 출근 가능 여부를 묻는 카톡이었다. 계류유산이며 길게는 2박 3일,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입원해야 한다고 지난주에 입원안내문 사진과 함께 사실대로 통보를 드린 상태였다.
월요일 아침인데, 내가 입원해 있을 날인데, 모든 상황을 다 아는 사람이 다음날 출근 여부를 묻는 카톡을 보니 화가 나서 눈물이 터졌다.
아니, 본인이 아무리 남자여도 그렇지, 어떻게 유산해서 죽은 태아 배출하러 입원한다는 사람한테 최대한 빠른 출근을 바랄 수가 있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하루 더 쉬라고 하지는 못할 망정 ‘월요일 하루 일 쉬었으니 화요일은 가능?’ 이라니.
화나고 서럽고 짜증 나서 울었다. 이건 유산의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유산과 입원에 대해 카톡으로 통보했을 때 보스는 안타까워하며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원래 꽤 자주 있는 일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몸조리 잘 해요" 라고 위로했는데, “자주 있는 일”이 위로의 의미가 아니라 “감기처럼 흔한 일, 별 거 아닌 일" 의 의미였나? 싶은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물론 출근하라는 압박이 아니었다는 건 안다. 하루 이틀 더 쉰다고 해도 흔쾌히 이해해 줄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보스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냥 단순히, 내 출근 여부에 따라 조정해야 하는 게 있으니 혹시 출근 가능한지 팩트를 물은 거였지만 그 질문 한마디를 마냥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건 몸이 낫는 게 다가 아닌데, 거기까지는 눈곱만큼도 생각 안 하는 사람이 내 보스라는 게 너무너무 실망스러웠다. 나는 지난주 금요일에도 눈물 참고 출근했고, 일 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아파서 쉰 적 없고, 이번에도 하루라도 일 더 빠지려고 일요일 입원하려던 건데 이런 내 노력은 알 리도 없지, 그래, 돈 버는 재미로 사는 결혼 안 한 남자가 뭘 알겠어!!!!!
금요일 낮 이후로 눈물이 그쳤었는데 또 울게 만든 보스가 미웠다.
진료 예약시간에 맞춰 산부인과에 가는 길에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남편이 같이 씩씩거려 줘서 좋았다.
보스 때문에 눈이 또 부은 채로 산부인과 원장님을 마주했다. 원장님은 내가 아직도 유산의 슬픔에 빠져있는 줄 아셨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금요일에 출혈과 함께 자연배출이 되어서 입원 취소 했고 지금은 출혈도 많이 줄었다고 말씀드리고 초음파 진료를 받았다. 초음파 스크린엔 역시 룰루가 없었고 지지직거리는 흑백 화면이 다였다.
“말씀하신 대로 깨끗하게 다 배출 됐네요, 난소 상태도 괜찮고요. 그래도 당분간은 피가 더 나올 수 있어요. 무리하지 말고 몸 따뜻하게 회복 잘하시면 또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진료 또 오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원장님의 담백한 진단을 받고 진료실에서 금방 나왔다.
이제 진짜 끝!!!!
다음 임신 때까지 산부인과 또 올 필요 없다!!
여태껏 홀가분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은 진짜 진짜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었다.
이제 한약 잘 먹고 씩씩하게 지내다 보면 건강한 아기 생기겠지!
이렇게 마지막 산부인과 진료로 마침표를 찍은 지 딱 일주일이 지난 오늘이다. 그동안은 정말 울지도 않고 임신 전과 다를 거 없이 잘 지냈다. 하루는 남편과 영종도에 가서 예쁜 노을도 보고 맛집에도 다녀왔다.
물론 출근도, 연주도, 모든 주어진 일도 웃으며 해내고 있다. 운전면허 기능시험도 붙었다!
달력을 보니 임신테스트기 두 줄을 본 날로부터 딱 6주간 룰루와 함께 했었다. 새로운 세상에 잠시 여행 다녀온 6주.
지금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의 기분과 같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비슷한 여행 언젠가 또 가보고 싶다 '
이 긴 글을 쓰던 중에 울컥하는 순간도 있었고 앞으로도 룰루 여행을 떠올리면 눈물이 또 날 수도 있지만 그럼 그런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또 지나가겠지.
다음에 임신을 하면 또 이런 상황이 올까 봐 불안 불안하겠지만 그때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그저 또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수밖에.
이렇게 가을이 오면 떠오를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기억력이 좀 덜 좋아도 될 것 같은데 난 또 요 근래의 일분일초를 다 기억하겠지.. 임신과 출산하면 기억력이 나빠진다는데, 다음 아기는 과연 내 기억력을 훼손하려나? 기억력 나빠져도 괜찮으니까 떠나지 말아 주라~~~
그나저나 룰루 덕분에 먹고 싶은 거 다 먹어서 3kg나 쪘는데 이건 언제 뺀담?? ㅠㅠ 얄미운 룰루!!!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