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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다미 Mar 28. 2024

애정 결핍이 만든 아픔

일 년의 유예

형형색색의 꽃이 화려한 화단 앞에 발길을 세웠다. 튤립, 팬지, 양귀비. 모양도 이름도 다른 꽃들의 화려함에 정지된 시선. 다르게 생겼어도 조화로울 수 있구나. 우리 집 분위기와 사뭇 다른 꽃밭에 마음을 빼앗겼다.

     

고드름처럼 뾰족한 말투는 언제부터였을까. 속 깊은 딸의 변화는 한순간 일어나지 않았다. 늘 무언가를 하며 즐거워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했다. 등교 시간 늦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깨우는 일상. 아프다고 못 일어나는 딸을 볼 때면 가슴에서 천 불이 일었다. 결국, 그날도 딸을 깨우지 못하고 출근했다. 점심때가 지나서 병원 가겠다는 딸의 전화를 받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료확인서 한 통이 면죄부라도 되는지. 등교하지 못한 날은 언제나 병원행이다. 겉으로 멀쩡한 것 같다고 꾀병 부리지 말라는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아프다면 그것도 병이니까.      


“왜 나만 참아야 하는데.”

“뭘 참았는데. 지금도 소리 높이고 있잖아.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

“언제까지 말해줘야 알 거야!”

딸의 울부짖음이 집안을 흔들었다. 아침에 잘 일어나자고 한마디 했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내 행동은 언제나 오답이라는 딸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늘 안절부절못했다.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이 벌어진 뒤 후회해 봐야 소용없겠지. 무섭고 걱정된다.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남편은 요지부동 꼼짝하지 않고 나와 딸을 비난했다.     


뭐가 못마땅한지 혀를 끌끌 차는 남편. 딸을 향한 그의 눈빛은 차갑다. ‘아빠 맞나?’ 나를 보는 눈빛이 아닌데도 섬뜩했다.

“다 맞춰주니까 위아래를 모르지.”

어이없는 말이 숨통을 조여왔다. 딸은 늘 내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남편은 내가 필요 이상으로 딸을 챙긴다고 말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고무줄처럼 팽팽한 두 사람의 의견에 머릿속이 꼬였다.     


딸은 아빠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아빠가 놀아주는 몸 놀이는 아이의 맑은 웃음을 자아냈다. 높이 띄워 서울구경시켜주고 목말도 태워 줄 때면 까르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호기심 많은 딸을 남편은 받아주지 못하고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차렷해!”, “손 내리고 똑바로 서.”

예쁜 모습을 찍어달라며 카메라 앞에서 춤추는 딸에게 언성을 높였다. 일거수일투족을 조종하는 소리에 치가 떨렸다. 아무 말 못 하고 굳은 자세로 사진을 찍던 어린 딸은 오죽했을까. 명령하는 말이 아이를 옥죄는 것 같아 그냥 찍어주라고 한 소리 거들었는데, 곧장 남편의 가시 돋친 말이 날아들었다.

“뭐? 그냥 찍으라고? 너 혼자 다 해!”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내가 그랬듯, 딸도 자포자기에 빠졌다. 입을 닫으며 마음도 서서히 닫았던 걸까. 말수가 줄고 내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곤 했다. 차츰 서로 마음의 문이 닫혔다. 나는 아이가 고립되지 않도록 아픔을 읽어주는 엄마였을까? 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뿐이었다. 일방적인 사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든 끝내고 싶었고 그럴 수 있다면 사과는 백번도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미안해” 사과를 들은 뒤에야 남편은 다시는 자기 말에 토 달지 말라는 엄포 하에 나를 다스렸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무것도 못 하고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온전히 나만의 잘못일까.      


열 살 무렵 친척 집에서 두 살 어린 여동생과 2년 동안 살아온 남편. 사촌이 컵라면 먹는 모습을 바라만 보던 여동생은 배고프다고 떼를 썼지만 아무리 떼써도 먹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습관은. 말을 듣지 않는 동생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도, 울다 잠든 동생의 모습에 남편은 가슴이 찢어지듯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추운 골방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 흘렸다는 그의 과거는 들을 때마다 내 마음도 쓰라리게 아팠다.      


그에게도 애정결핍이 있었다.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책임감만 쌓으며 애어른이 된 사람. 원하는 것을 억누른 채 살아낸 과거.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며 딸에게 엄한 훈육을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래서 참고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 목까지 차올랐다. 늘 아슬아슬한 세월이었다. 잘해주면 잘해주는 대로 불편했고 화를 내면 그 자체로 불행했다.      


고민 끝에 이혼을 결심했다. 헤어짐을 처음 생각한 것은 아니다. 20여 년 동안 한 달에 보름은 말하지 않는 남편의 침묵을 버틸 때마다 마음먹었다. 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맹수처럼 나를 물어버릴 듯한 사람 곁에서 버틴 세월. 헤어지고 싶은 순간마다 경제적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이들이 어려서 '참을 인' 자를 가슴에 수백 번 새기며 견뎌왔다.     


텃밭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니 꽃들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튤립은 뒤쪽, 팬지는 앞쪽, 양귀비는 듬성듬성. 높이와 생김새가 다른 꽃들이 미풍에 흔들흔들 몸을 움직였다. 차분하고 평온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모습이었을까? 가시가 표표히 박힌 선인장처럼 서로 날을 세워가며 맞대고 살아온 건 아닐까. 부모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채 부모가 된 사람. 그 사람 옆에서 나는 작아졌다. 엄마의 자리를 이탈해 어디론가 숨어버리려 했다. 그저 눈치만 보며 가슴을 삭였으니까. 내 상처만 보였으니까.   

   

‘엄마의 위치’가 새삼스레 다가왔다.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 지켜내야 하는 자리는 어디였을까? 쉽게 넘겼던 단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제라도 내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겠다. 몇 번의 방황과 어긋남이 있다 하더라도, 내 자리를 찾아가련다. 피하지 않으련다. 딸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일 년만 더. ‘가족’이라는 흔들린 울타리를 지키려 노력하기, 쉽게 허물어 버리려 하지 않기.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다. 우리 엄마처럼 넓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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