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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다미 Apr 25. 2024

새싹의 부드러운 힘

버텨라!

혼자만의 노력이 지루하고 힘든 오후 바람을 느끼고 싶어서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로드를 타니 속도감이 좋았다. 얕은 경사를 가볍게 지나 내리막을 달렸다. 엉덩이를 들고 상체로 속도 조절을 하며 바람을 즐겼다. 겉옷으로 걸친 남방이 펄럭거리며 속도감을 높여주었다. “그래 이 맛이야.” 김혜자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맛에 자전거를 탄다. 내리막을 달릴 때 나는 자유를 느낀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영혼의 자유. 자전거와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 고뇌와 번민이 훨훨 날아가는 순간이다.      


공원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끌며 여유를 즐겼다. 잔잔한 물의 흐름을 바라보다 새들의 날갯짓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정한 곳으로 흘러야 하는 물과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새.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 이치이고, 새는 방향의 자유가 있다. 규칙이 있는 물과 자유로운 새. 나는 지금 규칙이 있는 삶일까, 없는 삶일까. 일상이 지루했고 내가 고루해 보였다.      


해고 이후 재계약하면서 한 해만 더 일하기로 하던 해 코로나가 시작됐다. 온 나라에 멈춤이 퍼졌다. 거리 두기로 인해 아이들은 집에서 수업했고, 건축일을 하는 남편의 일도 멈췄다. 가족 모두가 집에 있고 나만 출근할 때 ‘책임’이란 단어가 무겁게 짓눌렀다. 딸의 미술 학원비와 새 차 할부금, 대출금까지 숨통을 조였다. 남편이 간간이 일을 나갔지만, 최저시급인 내 월급을 합쳐도 모든 물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허덕거림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만약 해고라는 위기가 없었다면 나는 ‘멈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버티지 못했을 위태로움이었다. 급할수록 심호흡하는 습관을 들이며 버텼다. 어쩌면 버티는 것은 오래전부터 습득된 내 장점인지도 모른다. 오직 내면에만 집중하며 힘겹게 일 년을 버텼다.     


딸이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고 난 뒤 책임을 남편에게 넘겨주었다. 이제부터 가정 책임지라고 큰소리치고 집안에 들어앉았다. 그동안 가슴 속에서 들끓는 알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내 안에서 자꾸 다른 길이 있다고 알려주는 듯했고 그 길을 찾기 위해 “직장졸업”을 선언했다. 앞으로는 회사에 다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직장졸업을 선언한 또 다른 이유는 너무 강한 내 성격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억눌림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했는지 상사의 지시가 듣기 싫었다. 이미 처리된 일을 다시 확인할 때면 나를 못 믿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 상사에게 불친절했다. 못난 내 성격을 보고 난 뒤 부끄러웠다.     


퇴사하고 일 년이 지났다. 지난 시간이 흘러가는 강물 위로 펼쳐졌다. 나는 언제쯤 저 새들처럼 자유로이 날 수 있을까 고민할 때 바람의 저항을 못 이긴 새가 다시 물 위에 앉았다. '날 수 있어도 힘이 없으면 날지 못하구나!' 날아오르기 위해선 어떤 힘을 더 길러야 할까 고민하며 걸음을 옮겼다.     


고개 숙이고 무심히 걷다가 강가에 심어진 이름 모를 나무 앞에 발길을 다시 멈췄다. 연두색의 작은 새싹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심쿵! ‘어떻게 나왔어?’ 작고 보드라운 새싹을 살며시 만지며 새싹의 탄생기를 역추적해 보았다. 나뭇가지 안에서 새싹은 바깥세상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지 모른다. 부드러운 바람, 따뜻한 햇볕, 아름다운 나비의 날갯짓. 세상에 대한 기대를 안고 태어났겠지.     


세상은 새싹의 기대대로 아름답고 따뜻했을까? 절대로. 바람은 세차고 햇볕은 따끔거리고 거미가 줄을 쳐댔을 테다. 소문과 전혀 다른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뒤 새싹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다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가능한 역주행이다. 나뭇가지가 원망스러워 이별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잎을 싱싱하고 단단한 줄기가 꽉 붙잡고 있어 떨어질 수도 없다. 이때 새싹이 할 수 있는 일은 버티는 것뿐이다.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시간이 답이다. 새싹은 서서히 나뭇잎이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부드러운 바람과 아름다운 나비를 볼 수 있겠지.     


내 상황도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을 수도 있다. 낭만적일 것이라 생각한 직장졸업은 시간의 자유를 주었지만 불안함도 많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나 따뜻한 햇살이 아니라 가시 돋친 말들이 난무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 이전의 불안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왔다면, 지금은 주변의 말에 흔들릴까 봐 불안하다. 이상하다고 틀렸다고 말하는 그들, 멈추길 바라는 시선.     


남들과 다른 나만의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선 나도 새싹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거미가 줄을 쳐도 버텨야 한다. 다행히 나에게 싱싱한 줄기가 생겼다. 운명처럼 소개받은 도덕경. 노자의 도덕경이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을 믿고 새싹처럼 버텨보자. 버티는 것은 내 특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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