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놀이터 공포증

자폐 스펙트럼 아이의 사회성

by 청크리

“애가 말이 느릴수록 다른 애들을 많이 만나야 해. “

“엄마 아빠랑만 놀면 어떡해. 이제 친구랑 놀아야지.”

“너무 혼자 뛰어다니는 거 아니야? “


우리 아이가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은 뒤 심심치 않게 듣는 조언이 있다. 그건 바로 엄마, 아빠의 개입 없이 다른 아이들과 따로 놀게 하라는 말이다. 나도 진심으로 그러고 싶다. 나도 어느덧 아이를 키운 지 6년 차인데 휘뚜루마뚜루 슬리퍼를 신고 아이 뒤를 바삐 쫓아다니는 일을 졸업하고 예쁜 샌들을 신고 우아하게 앉아있어보고 싶다. 때로는 나도 다른 엄마들과 한가로이 수다를 떨면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아직도 걸음마 떼는 돌쟁이를 키우듯 아이를 끊임없이 주시하며 따라다녀야 하고 최대한 멀리서 지켜보다가도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을 해줘야 한다.


우리 아이는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표현이 서툴기에 놀이터에서 쉽게 오해를 살 수 있다. 누군가는 오해가 생기고 해결해 나가는 것 또한 사회성 발달의 일부이니 그냥 아이들끼리 내버려 두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수로 부딪혀도 사과는커녕 쳐다도 보지 않고 휙 지나쳐 가버리는 우리 아이를 상대 아이는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 그 아이의 엄마는 쌍심지를 켜고 본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아이의 외적인 모습은 아무런 문제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기에 바깥세상에서는 그에 부응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점점 더 요구되고는 한다. 심지어 우리 아이는 키가 큰 편이라서 한 살 정도 더 위로 보고는 하는데 그런 아이를 혼자 내버려 뒀다가는 자칫하면 그저 무례한 아이로, 이기적인 아이로 낙인찍히며 여러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게다가 내가 따라다니며 갈등 상황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한다면 말을 못 하는 우리 아이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가 없기에 상대방 아이 말만 곧이곧대로 믿다가 우리 아이가 억울해지거나 상처받는 크나큰 리스크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무수한 이유로 내 에너지 소모가 너무나 커져서 말 그대로 ‘기 빨리는’ 놀이터란 공간이 내게 공포의 대상인 때도 있었다. 그나마 한가한 놀이터는 부딪혀 볼 만해도 하원 이후의 미어터지는 놀이터는 정말로 가기가 싫었다. 다른 아이들과 자꾸 비교하게 되는 나 자신이 싫기도 하거니와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우리 아이를 보는 게 마음이 아프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콩나물시루처럼 많은 아이들 속에서 우리 아이가 갑자기 하이톤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놀랄만한 행동을 하면 순식간에 이목이 집중돼서 위축이 되는 나는 죄인이 되어 식은땀이 줄줄 낫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이렇게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되는 것만 같았던 자격지심이 가득했던 시기가 지나고 이제 나는 하원 후에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와 놀이터로 향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아이도 나도 당당하게 놀이터에 가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놀이터라는 세계에서 겉돈다면 겉돌고 눈인사를 나누는 사람 하나 없지만 우리도 누구나처럼 재밌게 놀 자격이 있다. 한없이 작아지고 자기 연민에 빠져서 우리는 놀이터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미처 몰랐던 아주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놀이터에서 실컷 놀 권리가 있다.


우리 아이는 놀이터를 너무 좋아하지만 또래 아이들처럼 원활하게 소통하며 놀지는 못한다. 가끔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손을 계속 펄럭이기도 하고 쉴 새 없이 방방 뛰기도 하며 흔히 말하는 상동행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의아한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마치 같은 급이 아닌 듯이 배척돼야 할 second citizen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나는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눈치 보고 쉽게 주눅 드는 나의 기질을 찍어 눌러가며 로키엄마로서 어깨를 피고 위풍당당하게 놀이터로 향한다. 예전처럼 더 이상 우리를 격리시키며 숨거나 피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second citizen: 2등 시민. 법적 지위는 시민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차별받는 시민을 의미함.


그렇게 나는 미소를 띠고 의연한 모습으로 놀이터에 들어서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속으로는 민폐를 끼칠까 봐 두려운 마음이 항상 공존한다. 아직도 우리 아이가 그 어떤 돌발행동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종종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진다. 나도 다른 엄마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요새 애가 자꾸 왜? 왜? 물어대서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요”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자연스레 친목의 물꼬를 트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럴 수가 없는데. 우리 아이가 정상발달이었다면 아니 그냥 말만 좀 트였어도 어찌어찌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싶다가도 ‘애초에 내 성격에 놀이터에서 다른 집들과 왁자지껄 놀지 않았겠지 뭐' 하며 긍정회로를 돌려본다. 한 이솝 우화의 이야기처럼 ‘내가 못 먹는 포도는 시겠지’ 하며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발달지연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조언대로 우리 아이가 나와 쉽게 분리되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논다면 참 좋겠지만 아직 그런 어울림은 우리 아이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아이는 또래를 유심히 관찰하고, 호기심을 갖고, 모방도 한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아이가 놀이터에서 얻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기에 여러 어려움이나 단점을 뒤로 한채 매일 놀이터라는 작은 사회를 최대한 즐기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아이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놀이터의 이점을 떠나서 아이가 놀이터를 그저 너무나도 좋아하기에 매일 두 시간 정도는 나가 노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천방지축 에너자이저인 아이와 놀이터에서 살다시피 하다 보니 소심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을 대처하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로키의 행동에 당황하는 사람들과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 우리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사과하고, 중재하고 설명하다 보니 덩달아 나의 사회성이나 임기응변도 조금씩 발전해 나갔다.


이미 머리가 굳을 대로 굳은 다 큰 어른인 내 사회성과 처세술도 이렇게 나아질 수 있는데 우리 아이의 사회성도 쭉쭉 올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 일 없이 정상발달 아이를 키웠다면 나 역시 이 사회성이란 놈을 만만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삼삼오오 모여 노는 아이들 사이에 우리 아이를 툭 던져 놓으면 자연스레 어울리게 될 거라고 자신하며 말이다. 그렇게 또래를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아이의 언어발달에 드라마틱한 도움이 되고 말이 트일 거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아이를 전적으로 믿고 좀 더 자유롭게 풀어줘야 한다고 답답해하면서 말이다.


물론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접하는 건 대부분 긍정적인 경험치가 되어 쌓인다. 전반적으로 또래 아이들이 언어, 놀이, 정서 등 모든 성장발달을 자극시켜 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아이의 사회성은 대부분 본인의 일방적인 놀이성을 받아주는 사람이 필요한 수준이라서 그 모든 걸 맞춰줘 가며 놀아주는 친구를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게다가 자신의 아이가 오롯이 맞춰주는 역할을 자처하는 걸 그저 흐뭇하게 바라봐주는 부모를 찾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보호자 없이 놀이터에 나와 노는 초등학생 형이나 누나 중에 너그러운 아이와 어울리게 되는 경우는 있어도 보호자가 있는 상태에서 또래가 맞춰주며 노는 경우를 보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나 같아도 좀 독특하고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아이에게 내 자식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춰주고 배려해 주는 모습이 백 프로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대답 한번 해주지 않다가 수 틀리면 휑하니 딴 데로 가버리는 아이를 짝사랑하듯 따라다닌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수십 가지의 이유로 나는 오늘도 놀이터에서 우리 아이에게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개입을 하고는 한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아이를 속 편히 놀이터에 풀어놓지 못한 채 몸과 마음이 내내 분주하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하늘 위를 유유히 비행하면서도 육지의 모든 걸 간파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독수리처럼 늘 주시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만반의 태세를 갖춰야만 한다.


어쩔 수 없이 내 아이가 최우선일 수밖에 없는 로키엄마인 나는 심지어 우리 아이가 언어의 장벽으로 느낄 소외감까지 신경 쓰고 챙기느냐 정신이 없다. 크면 클수록 우리 아이는 언어적 표현이 서툴 뿐 속은 계속해서 여물어가며 생각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래와 자신을 비교하기도 하고 본인이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느끼며 주눅 드는 안쓰러운 모습이 내 눈에는 보인다. 아무래도 완벽주의자 기질에 자존심이 워낙 센 녀석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나의 복잡한 속마음과 우리의 지난 서사와 발달과정등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는 나는 어쩌면 놀이터에서 아이를 과잉보호하거나 유난을 떠는 엄마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해나 요행을 바라고 놀이터를 가는 것도 아닌데. 그저 오늘도 놀이터에서 최대한 무탈하게 놀고 편안한 마음으로 귀가하게 해달라고 남몰래 기도하며 아이를 주시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이렇게 애타는 나의 마음을 그저 기본값으로 장착하고 놀이터로 들어설 뿐이다. 해맑게 까르르 웃는 로키와 뛰고 구르며 노는 나의 밝은 모습 이면에는 오만가지 걱정과 수심이 가득하지만 그건 아이는 몰라도 되는 오로지 엄마인 나의 몫일뿐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복잡한 심경에 솜이불이 물에 젖은 마냥 마음이 무거워졌겠지만 이제는 이게 나의 역할이라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지나치게 심각해질 필요 없이 아이와 놀이터에 왔으니 그저 신나게 놀며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에 대처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달지연이 없는 아이와 부모 역시 충분히 겪을만한,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누구든 어느 정도 놀이터에서 겪는 고충이라는 것도 말이다.


아이의 발달지연을 알게 된 뒤 골든타임에 연연하며 수시로 발달사항을 체크하던 내가 이제는 육아에 있어 노심초사하지 않고 한결 유연해지고 있다. 속앓이를 하는 것도, 오해를 받는 것도 그러려니 하며 예전처럼 무너지지 않고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회복탄력성은 어디 가서 돈을 주고도 얻기가 힘든데 아이를 통해 이런 값진 인생수업을 받게 되다니 삶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처음 우리 아이에게 자폐 스펙트럼 진단이 내려질 당시에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니 말이다.


한때는 놀이터가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듯이 앞으로 아이를 키우며 불현듯 어떤 공포심이 생겨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새 ‘이것 또한 지나가리, 이겨내리’ 하는 의연하고 단단한 마음이 자라났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내가 안달복달해서 놀이터 공포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부딪히고 적응해 가며 단단해졌듯이 앞으로도 그때그때 맞닥뜨리는 산을 하나씩 넘을 수 있겠다는 배짱이 생겼다.


작년만 해도 비교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감정조절이 미숙해서 차례 기다리기를 힘들어하던 로키가 이제는 알아서 줄을 서고 그네를 탄다. 심지어 기다리고 있는 다음 친구 타라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양보할 줄 도 알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에게 사회성이란 남들이 흔히 떠올리는 쉽게 옮겨 붙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아니지만 확실한 건 아이의 마음속 작은 불씨가 서서히 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놀이터에서 갈등이 생겼을 경우 로키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 나갈 능력은 없다. 하지만 내가 설명을 해주면 거부하고 울다가도 금세 이해하고 수용하며 내 말을 따를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느린 속도라도 아이는 주변을 점점 더 살피는 아이로 자라나고 있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다가도 다른 아이가 내려오려 하면 후다닥 비켜서며 그 아이와 내 눈치를 쓱 본다. 사실은 놀이터에 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제지할 엄마 몰래 벗으려고 내 표정을 살피며 사각지대로 도망가기도 한다. 그렇게 장난꾸러기의 얼굴로 저 멀리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나를 놀리듯이 깔깔 거리며 달아난다. 그렇게 나와 숨바꼭질 아닌 숨바꼭질을 하기도 하고 아직도 애기처럼 까꿍놀이도 하며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논다.


놀이터에서 보는 다른 또래 아이들은 어느새 보호자의 도움 없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놀기도 하고 편의점에 가서 어떤 간식을 사 먹을지 의논을 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우리 아이는 아직 놀이터에서조차 손이 많이 가는 아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의 사회성의 불씨가 조금씩 더 커져가며 언젠가는 나의 둥지를 떠날 때가 올 거란 것이 신기하게도 피부로 느껴지는 나날들이다. 조금씩 사회적 눈치가 생기는 아이를 보며 아이는 아이만의 사회성과 자율성을 기반한 독립적인 삶을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조금 더딜지라도 우리는 매일 놀이터라는 배움의 터전으로 향한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속도가 아닌 방향에 집중하고 있기에 오늘도 그저 머리가 땀에 흥건히 젖을 때까지 신나게 놀아본다. 오늘도 우리는 주어진 하루하루를 기꺼이 살아내고 이런저런 근심을 뒤로한 채 열심히 뛰어놀아본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들도 우리는 계속해서 배워 나가야 하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억울하지도 분통하지도 않다.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커 있는 아이와의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며 신중하고 소중하게 쌓아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제 와서 보니 아이의 존재만으로 효도한다는 이 예쁜 시기를 슬로우모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뜻밖의 선물 같기 때문이다. 본래 성격이 급해서 발걸음조차 빠르디 빠른 나는 아이가 아니었다면 매일을 빨리 감기 한 것처럼 살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여전히 남들과는 다른 우리의 모습에 문득문득 서러워지기도 하고 까마득한 미래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조금 느린 아이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서로 발맞춰 걸으며 웃고,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맘껏 사랑을 표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가혹한 형벌이라 생각했던 아이의 발달지연이라는 blessing in disguise 속에 우리 세 식구가 지난 시간 동안 참 열심히도 커왔다. 사소한 일에도 전전긍긍하고, 소심하고 예민해서 무엇하나 흘려듣지 못하고 담아두던 내가 아이로 인해 나만의 소신을 갖고 우직하게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드디어 로키엄마라는 이름으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blessing in disguise: ‘시련으로 위장 한 축복’ 이란 뜻으로 겉보기에는 불행처럼 보이지만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진 일 또는 전화위복.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알록달록한 색을 지닌 나의 아이를 키우며 오히려 그 어떤 잡음 속에서도 나만의 템포를 유지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아이 덕분에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하는지 분간해 내는 힘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 말이다.


우리 아이는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성장해 온 엄마, 아빠라는 버팀목의 사랑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니 아무리 느리다 한들 꾸준하게 잘 성장해 나갈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로키만의 속도로 사회성이 꽃피워가며 언젠가는 내가 아이의 인생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날이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때는 놀이터라는 즐거운 동심의 공간 속에서 홀로 시들어 가던 내 모습과 한겨울에도 맨발로 뱅글뱅글 돌기만 했던 지난날의 로키가 떠오른다. 그 암흑기 속에서는 우리가 이만큼 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로키의 사회성을, 또 우리의 미래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대도 이제는 너무 겁먹지 않으려 한다.


뒤돌아보니 한발 한발 떼기가 너무 무서워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걸었던 가시밭 길도 아이와 함께 걷고 나니 어느새 꽃길이 되어 있더라. 그래서 이제는 안다. 아무리 우리만 겉돈대도, 아무리 나만 헉헉거리며 아이 뒤를 쫓아다니고 뛰어다녀야 하는 엄마래도 로키와 함께라면 어디든 내게 꽃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아이와 함께 걷고 있는 이 길 위에서 그 어떤 시선에 찔려도, 그 어떤 말에 찔려도 아프거나 두렵지 않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아이는 엄마라는 갑옷을 입은 채 놀이터로 향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