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안 걸려도 걸릴 사람은 걸리는...
며칠 잠을 못 자고 무리했더니 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며칠 더 무리했더니 콧물이 나오고 기침이 심해져서 병원을 찾았다. 1분 정도 진찰한 의사는 감기라며 약을 처방해 준다. 감기에다 비염 증세까지 심해진 것 같다. 나는 찬바람과 추위에 반응하는 알레르기성 비염을 갖고 있다. 찬바람과 추위 때문에 비염 증세가 심해진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울에 힘들겠다며 걱정하지만, 내가 찬바람 때문에 진짜로 힘든 건 여름이다. 겨울에는 추위가 싫어서 밖에 잘 안 나간다. 어쩌다 밖에 나갈 때에는 목도리나 마스크 등으로 싸매고 다니기 때문에 추위에 노출되는 시간과 부위가 많지 않다. 하지만 요즘 여름에는 어디를 가도 냉방이 너무 잘 돼 있어서 찬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다. 특히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의 냉방이 지나친 데다, 겨울처럼 두꺼운 옷이나 목도리를 하고 다닐 수도 없어서 찬바람을 피하기 어렵다. 한여름에 지나친 냉방으로 인한 찬바람 때문에 비염과 감기로 고생이라니…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오죽하면 예전에는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했을까? 무조건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소비지상주의’의 부작용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점점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을 소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소비지상주의.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소비지상주의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식품 시장이라고 했다.
‘소비지상주의 윤리가 꽃피었다는 사실은 식품 시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통 농업사회는 굶주림이라는 무시무시한 그늘 속에서 살았다. 오늘날의 풍요사회에서 건강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만인데, 그 폐해는 가난한 사람이(이들은 햄버거와 피자를 잔뜩 먹는다) 부자들보다(이들은 유기농 샐러드와 과일 스무디를 먹는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입는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의 모순이 지나친 냉방과 식품뿐일까? 우리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 아니 꼭 필요한 소비라고 믿는 것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이 벌려고 노력한다. 자녀들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야근에 주말 근무까지 하며 학원비를 벌지만, 정작 그들과 대화는커녕 얼굴 볼 시간도 없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못 하고 사이가 어긋나는 부모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려고 생각했을 때였다. 결정을 못 내리고 고민하다 퇴직 후의 장점과 단점을 비교, 분석했다. 장점은 열 가지도 넘었지만 단점은 딱 한 가지, “수입 단절”이었다. 그곳을 그만둔 뒤에 다시는 그 정도의 수입을 벌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단 한 가지에 불과했지만 중요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 정도의” 수입이 정말 있어야 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때 나의 소비생활을 체크하면서 모순적 소비, 필요 없는 소비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나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옷과 가방, 구두 등이 있었다. 반 이상은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고, 안 신어 본 것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보관할 공간이 필요해서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안 입는 옷과 구두들을 처분하고 더 이상 사지 않는다면 넓은 집이 필요 없지 않을까?
또한 나 역시 너무 많이 먹고 살을 빼기 위해 다시 돈을 쓰고 있었다. 주로 외식을 했는데 음식 가치에 비해 쓸데없이 비쌌고, 양이 많은데도 남기기 싫어 많이 먹었다.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면 이중으로 돈을 절약하게 된다. 다행히도 30~40대에게 가장 큰 지출 항목인 자녀 교육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이렇게 모순된 소비와 필요 없는 소비를 줄인다면 큰돈을 벌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건강 관련 비용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출되는 비용이라 “아프지 말아야” 했다. 정말 다행히도 지병이 없었기에 평소에 좋은 식습관과, 일을 안 해서 생기는 시간에 운동으로 체력과 면역력을 향상한다면 건강도 좋아질 것 같았다. 하기 싫은 일 하느라 생기는 스트레스도 줄어들어서 스트레스성 질환도 줄어들지 않을까? 실제로 당시 스트레스 해소(및 스트레스성 질환 예방)에 사용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수입과 소비를 비교, 정리해 보니 당시 직장을 다니면서 벌던 정도의 큰 수입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뒤돌아보면 나의 계획이 모두 맞았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모순적 식품 소비와 건강에 대해서는 옳았다. 필요한 것 이상을 먹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위한 소비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여유가 생긴 시간에 운동을 하고 스트레스가 줄다 보니 체력이 좋아지고 면역력도 향상되어서 예전처럼 몸살 등으로 아파서 누워있는 날도 줄어들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지나친 냉방으로 인한 여름감기는 어쩔 수 없지만…) 체지방 등 신체 지수와 혈압, 혈당 등 건강 수치도 모두 건강 범위 안에 들어 수치로만 보면 오히려 20대 때보다 더 건강한 모습이다.
다만 아직도 예쁜 옷과 가방을 볼 때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매할 때가 있다. 특히 예전에는 잘 안 맞았을 옷들이 예쁘게 어울릴 때 충동적으로 구매하게 된다. 좀 더 노력이 필요한 영역이다. 가끔은 큰 보너스를 받아서 럭셔리한 휴가를 갔다 왔다거나 투자 성공으로 차를 바꿨다는 친구들을 볼 때면 흔들리기도 한다. 천 번쯤은 흔들려야 비로소 멈추게 되려나...
하지만 절대 흔들리고 싶지 않은 건,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참고 억지로 하느라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번 돈을 행복해지기 위해서 쓰는 바보가 되지는 않겠다는 다짐이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기침이 주말 내내 누워서 쉬었더니 줄어들었다. 여름 감기는 지나친 냉방 때문이기도 하지만 잠을 못 자고 무리했던 게 더 큰 것 같다. 잠시 쉬어 가면서 구본형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짐을 다져 본다.
젊어서는 돈을 벌기 위해 젊음을 쓰고, 나이 들어서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돈을 쓰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네. 그때그때 미루지 말고, 그때의 정신으로, 그 순간 인생에 찾아든 기쁨을 추구하라는 말이네.
– 구본형 <마지막 편지> ‘제발 떠나게, 일 밖에 모르는 M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