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댄서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양구 공연 이후에도 크고 작은 대회들이 있었다. 양구 대회 동기 아이들은 거의 모든 대회에 참가했지만 나는 다른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다거나 일이 바쁘다 등의 핑계를 댔지만, 동네에서 열린 대회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1년 전 공연을 마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회’라는 퀘스트를 수행했기에 더 이상 대회에 나갈 이유가 없었다. 사실 처음 벨리댄스를 시작했던 때에 생각했던 모든 버킷 리스트를 이뤘기에 벨리 댄스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에 계속 다니고 있었다.
여전히 수업에는 나 혼자였다. 초급반에 새로운 수강생들이 많이 들어왔다고는 했다. 하지만 수업이 있는 요일이 달라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사정이 생겨 초급반 수업 시간에 와야만 했다. 학원에 도착해 보니 열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준비를 마치고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서인지 왁자지껄 시끄러운 속에서도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수업이 시작됐고 기본 동작을 따라 했다. 몇 달 만에 다른 사람들과 연습해 보니 재미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렇게 쉬운 동작을 왜 저렇게 못하는 걸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했던가. 내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이니 쉬운 동작도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마치 처음부터 잘했던 것인 양 우쭐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조금 더 자신감을 더해 잘난 척을 했다.
기본 동작이 끝나고 안무에 들어가자 나의 잘난 척은 보다 더 심해졌다. 그들이 몇 주째 연습하면서도 못 따라 하는 동작을 그날 처음 하면서도 거의 완벽히 따라 하고 있었던 거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왠지 으쓱해졌다. 그동안 잘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왜 아직도 저런 동작이 안 될까?’, ‘언제쯤 나는 은비처럼 예쁘게 웃을까?’라고 스스로를 꾸짖기만 했었는데, 혼자서 연습해서 몰랐을 뿐 나는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다음 중급반 시간에 다시 선생님과 단둘이 연습하러 왔다. 전날 수업이 끝나고 내가 급히 나간 뒤에 초급반 학생들 사이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저렇게 잘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저렇게 예쁘게 하려면 얼마나 해야 하나요?’, ‘나도 2년 정도 하면 저런 예쁜 옷이 어울리게 될까요?’ 등 모두 내가 꼬마 댄서들을 보며 했던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그런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뭔가 울컥했다. 앞으로 자주 초급반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날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웃으며 예쁘게 춤을 췄던 것 같다. 칭찬은 진짜로 고래도 춤추게 했다. 춤뿐이 아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퀘스트를 모두 수행했다고 생각했던 벨리댄스에 또 하나의 퀘스트가 떠올랐다.
초급반 수강생들 사이에서 워너비가 되자 학원 다니는 게 더욱 즐거워졌다. 이제는 내게 직접 ‘너무 잘한다’며 말을 걸거나, 이런저런 걸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시크하게 대답을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나도 춤으로 누군가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열 살 때쯤 발레를 배우는 수미를 부러워했던 꼬마가 삼십여 년이 흐른 뒤에 상황이 뒤바뀐 것이다.
하루하루 마냥 즐겁던 어느 날, 선생님은 강사가 되어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왜 없겠는가? 본격적으로 춤을 배울 때부터 가졌던 꿈 중의 하나가 실버 무용단을 조직해서 월드 투어를 하는 거다. 은퇴 후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5, 6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무용단을 만들어서 세계를 춤을 추며 여행하겠다는 꿈이다. 월드 투어라니 거창해 보이지만 우리가 BTS도 아니고, 공연을 하며 돈을 벌려는 건 아니다. 공연은 그저 핑계일 뿐, 함께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여행하며 재미있게 놀고 싶은 거였다.
처음 학원에 왔던 날 벨리 댄스를 배우면서 뭘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말했던 내 꿈이다. 3년도 더 지났는데 선생님은 나의 꿈을 기억하고 있었다. 꿈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떠오르는 대로 답했던 거지,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허황된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머물렀고, 10년 후를 그려 보는 글에도 늘 등장했다. 아니 글로 쓰면서 더욱 구체화되었고, 이루고 싶다는 생각도 점점 커졌다. 하지만 그때 내 실력에, 차마 입 밖으로 내기가 민망해서 그냥 꿈만 꾸고 있었던데, 선생님이 먼저 지도자 과정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고 있었다.
벅찬 마음에 바로 오케이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누구를 가르칠 실력은 안 되는 것 같아서 망설였다. 적지 않은 비용에 6개월이라는 시간도 부담스러웠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선생님이 말했다.
“강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저렇게 되고 싶다’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춤을 잘 추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데, 회원님은 그런 사람이에요.”
이런 말을 듣고 어찌 홀딱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바로 다음 주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실버 무용단을 만들어서 월드 투어를 하겠다는 망상이 어쩌면 실현될지도 모를 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림 출처: https://www.balletforadults.com/forever-bal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