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사람인데 어지럽죠. 어지러워도 참고 도는 거예요."
- 김연아
강사 과정은 나 말고도 두 명이 함께 하기로 했다. 한 명은 1년 정도 다녔기에 수업 시간에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한 명은 벨리 댄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시작부터 좀 실망스러웠다. 1년을 다닌 사람은 중급반에 속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초보적인 동작도 제대로 못하는, 재능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른 한 명은 이제 겨우 두 달 정도 된 사람인데 같이 수업을 한다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기분 나쁜 게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수업 진행도 어려울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 우려를 전했다. 선생님은 걱정하는 바를 이해하면서도 강사 과정은 일반 취미반과 달리 기초부터 다시 꼼꼼하게 익혀야 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을 거라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안무를 예쁘게 하지는 않아도 동작은 정확하다는 게 나의 자부심이었는데, 첫 시간부터 자부심이 무너졌다. 그냥 거울로 보기에 정확한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근육을 어떤 순서로 움직여야 되는지 알고 그대로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뿐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근육을 제대로 사용해서 움직이는 지도 구분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떻게 하는지 뭐가 잘못 됐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두 사람보다 훨씬 오래 했기에 대부분의 동작을 더 익숙하게 더 잘했지만, 오래 한 만큼 잘못된 습관이나 움직임도 많았다. 배의 근육이 아니라 호흡을 이용해야 하는 동작들이 특히 그랬다. 사실 잘못된 움직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흡을 이용하는 것보다 근육을 사용하는 것이 쉬웠고,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비슷해 보였기에 그동안 꼼수를 쓴 것이었다. 단순한 안무일 때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웨이브를 하면서 쉬미까지 같이 하는 복합 동작을 하려면 반드시 호흡을 이용해야 한다. 나는 습관을 잘못 들인 탓에 그때까지 그런 동작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이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야 하니 정말 제대로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반면에 배운 지 2개월 밖에 안 됐다고 얕봤던 지혜 씨는 호흡을 이용해 정확한 동작을 구사하고 있었다. 참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첫 시간부터 제대로 깨진 덕분에 나의 부족한 모습을 똑바로 보고 제대로 배울 수 있었으니까. 초급반 수강생들의 워너비라는 칭찬에 내가 진짜 프로 댄서라도 된 듯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보다 조금 멀리 왔을 뿐, 아직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강사 과정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이론 수업이었다. 벨리 댄스의 기원, 유래, 발전, 다른 지역으로의 전파 등 궁금했던 점을 이집트의 역사와 함께 흥미롭게 배웠다. 수천 년 전 중동의 여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 뜨거운 사막에서 이 춤을 추었을지, 왜 손을 그렇게 움직이는지 등을 알고 나니, 동작도 더 잘 표현되는 것 같았다.
역시 아직도 나는 머리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몸이 따르는 사람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과정은 지루했지만 뜻밖의 재미도 있었다. 마야(Maya)라는 동작을 할 때였다. 마야는 골반을 옆으로 최대한 빼서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안 쪽으로 원을 그리듯이 만드는 동작이다.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하는데 마치 옆으로 세운 ‘8(∞)’자를 그리듯이 움직인다. 나에게 마야는 그리 어려운 동작이 아니었다. 초급반 학생들이 나를 보며 잘한다고 감탄했던 동작 중에 하나가 마야였다. 마야는 어렵지만 벨리댄스의 독특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동작이기 때문에 어느 안무든지 반드시 들어가는 동작이다. 이 동작을 잘했기에 부러워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잘하는 것처럼 보였던 건 골만이 아니라 발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골반 근육을 이용해서 위로 올렸던 것이 아니라 발꿈치를 이용해서 골반을 들어 올리고 내렸던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큰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 발꿈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골반 근육을 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나는 선행 작업을 제대로 못한 채 눈속임만 하고 있었다. 취미가 아닌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는 당연히 고쳐야 하는 나쁜 습관이었다.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아예 발꿈치를 바닥에 붙이고 연습을 했다. 골반 근육만 이용하려다 보니 동작이 작아서 답답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무슨 동작을 하는지 모르겠을 정도였다. 그저 근육이 자극되고 움직여야 하는 부위가 아프다는 느낌을 통해서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계속 연습을 하다 보니 점점 동작이 커지면서 제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몸이 아픈 거였다. 몇 년 전 첫 수업 후에 온몸이 아팠던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하게 골반과 허벅지가 아팠다. 선생님은 근육을 정확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며 좋은 현상이라고 했다. 아프지 않으면 제대로 하는 게 아니라면서...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런데 몇 날 몇 주가 지나도 골반을 사용하는 동작을 할 때면 또 아팠다. 익숙해질 거라더니 어떻게 된 걸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물어봤다.
“마야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여전히 골반을 옆으로 움직일 때 아파요. 제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제대로 잘하고 계신 거예요. 저도 지금도 마야를 할 때면 골반이 아픈 걸요.”
“선생님도 아프다고요? 익숙해지면 안 아픈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프지요. 다만 참고 안 아픈 척하는 거죠.”
익숙해진다는 것 아프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픔에 익숙해진다는 말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10여 년 전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도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사람인데 어지럽죠. 어지러워도 참고 도는 거예요."
한 TV 쇼에서 스핀을 그렇게 많이 하면 어지럽지 않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김연아 선수가 아름답게 스핀을 하는 모습은 너무도 편안하고 우아해 보여서 인간의 모습이 아닌 듯 보인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진행자처럼 프로 선수들은 어지럽지 않을 거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그들도 사람인지라 어지럽다고 했다. 다만 연습으로 극복하고 참는 것뿐이다. 그즈음 그녀가 스핀을 하는 모습을 정지화면으로 캡처한 이미지가 인터넷에서 돌아다녔다. 이를 악물고 얼굴이 빨개진, 우리가 알고 있던 그녀의 우아한 얼굴과는 다른 모습이 담긴 이미지였다. 평소와 다른 모습 때문에 웃기는 사진으로 악용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인간다운,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잘 담긴 사진이었다. 그처럼 세계적인 선수도 어지럽다는데... 선생님도 매번 아프다는데... 내가 아픈 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아프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나도 이제 프로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