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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Oct 08. 2023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성공은 형편없는 선생님이다.
이것은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은 절대 잘못될 리가 없다고 믿도록 유도한다.

      - 빌 게이츠


  다음날 오후, 시험장으로 꾸민 학원에 들어갔다. 이미 시험을 마친 지혜 씨와 선미 씨 그리고 다른 학원에서 온 사람들이 편한 얼굴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두 시간 뒤에 시험을 마친 나의 얼굴도 저렇게 편해지겠지, 생각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먼저 필기시험. 어려운 문제는 없었으나 시간이 좀 부족했다. 너무 여유 있게 풀었나 보다. 겨우 시간에 맞춰 다 풀었다. 바로 결과가 나왔는데 다행히도 다 맞았다. 주관식 마지막 문제의 답을 아주 짧게 썼는데 너그럽게 점수를 매긴 것 같았다.

이제 본격적인 시험인 실기 테스트. 평소에 어려워하던 협회장 한 명만 심사위원으로, 그것도 바로 눈앞에 두고 테스트를 받으려니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자타공인 ‘시험이 체질’이라 할 정도로 연습 때 보다 늘 시험 결과가 좋았던 나의 시험운을 믿고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워밍업, 기본동작 콤비네이션, 강사 안무 2개 중 하나 그리고 개인 안무의 순서였다. 워밍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얼굴이 굳어 있었는데, 너무 잘 짰다며 웃으며 따라 하는 심사위원 덕에 긴장이 풀리고 몸도 풀렸다. 콤비네이션이야 워낙에 자신 있었던 거라 잘 넘어갔다. 강사 안무는 연습한 두 가지 중 하나를 제비 뽑기로 하는데, 내게는 특별히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줬다. 하나(1번)는 좀 짧고 쉬운 안무인 대신에 다양한 감정 표현이 필요한 안무였다. 다른 하나(2번)는 길고 안무가 복잡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웃기만 하면 되는, 감정 표현이 단순한 안무였다. 우리는 연습하는 내내 ‘1번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로 2번은 꺼렸다. 마지막날까지 안무를 못 외우는 친구도 있었다. 원장이나 심사위원도 내가 당연히 1번을 고를 거라 생각했을 거다.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감정표현은 나의 가장 큰 약점이기 때문에 1번을 표정 없이 춘다면 감점이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어려운 안무인 2번을 틀리지 않고 잘 마친다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끝부분이 약간 헷갈리긴 했지만 2번은 너무 길어서 끝까지 가는 경우가 거의 없고, 중간에 음악을 끈다고 원장님이 언질을 주기도 했다.

나는 2번을 골랐고, ‘정말 2번이 맞냐?’고 확인까지 마친 후에 2번에 맞춰 춤을 추었다. 하지만 원장님의 언질과는 달리 음악은 중간에 멈추지 않았고, 5분 가까이 되는 안무를 모두 마쳐야 했다. 중간에 한두 번 헷갈린 곳이 있었지만 티 안 나게 잘 넘어갔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다만 쉬는 시간 없이 바로 개인 안무를 해야 돼서 좀 지치긴 했다.

마지막 개인안무야 말로 나에게 맞춘 안무라 별로 어려울 것도 없고 순서를 잊을 것도 없는 가장 자신 있는 항목이었다. 역시 틀린 부분 없이 잘 넘어갔고 합격을 확신했다. 원장과 심사위원도 수고했다며 합격을 내비치는 말을 했다. 하지만 다른 두 심사위원의 동영상 심사가 있어야 하니 공식적인 결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월요일에 발표하겠다며 시험을 마쳤다.


  오랜만에 연습 없이 주말을 편히 쉬었다. 월요일 오후. 벌써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아직 원장의 연락이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합격이라 생각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월요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전화기를 보니 원장님으로부터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왠지 데자뷔가 느껴지며 불안해졌다. 

‘합격이라면 그냥 문자로 남겨도 될 텐데, 왜 굳이 통화를 하려고 하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기쁜 소식을 목소리로 직접 전해주고 싶어서일 거야.’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첫마디에서 떨어진 걸 알 수 있었다. 각각의 점수가 어떻고, 심사위원의 평가가 어떻고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졌고, 너무 아깝게 1점 차이로 떨어졌다고 하지만 결론은 떨어졌다는 거였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결과도 물어봤다. 선미 씨도 안타깝게 떨어졌다고 했다. 지혜 씨는 다행히도 가까스로 합격점을 받았단다. 같이 고생한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붙었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아니 화가 났다. 그럴 리가 없었다. 1번 춤의 안무를 잘 못해서 내가 도와주고, 2번 춤의 안무를 못 외워서 포기했던... 기본 콤비네이션을 못 짜서 원장님이 대신 짜줬던 지혜 씨도 합격을 했는데, 내가 못 했다고??? 화가 나는 걸 너머,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어 결과를 인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장님도 나의 반박에 일부 수긍했지만, 영상을 본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달랐다고 한다. 영상으로는 동작들이 작게 표현되어 무슨 동작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들도 꽤 있었다고. 반면에 안무를 헷갈려 얼버무리는 부분은 눈에 확 띄어서 점수를 깍지 않을 수 없었단다. 가장 자신 있었던 개인 안무는 너무 활기가 없어서 점수를 주기 어려웠다고 했다. 마지막에 하느라 힘이 빠진 상태에서 했는데 영상으로는 그 부분이 특히 거슬렸다는 말을 덧붙였다. 

“실제로 봤으면 전혀 그렇지 않았을 텐데... 너무 아쉽네요.”

원장의 위로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다시 화가 솟구쳐 오르며 그냥 다 그만두고 싶을 뿐이었다.



그림 출처: https://www.freepik.com/premium-photo/adorable-little-girl-ballerina-looking-grumpy-sitting-alone-floor-ballet-school_789244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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