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와 '세상은 준비된 자에게 길이 열린다'라고 한다. 내가 지난 10개월 동안 시드니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은 그 당시에 내가 스스로 준비된 수준에서 세상을 보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자신을 더 잘 알게 해 주었고 세상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게 해 주었다. 그래서 호주 워홀을 갔었던 것을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조금 더 영어를 준비하고 갔었다면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꼈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
첫 직장 Vespa cafe에서 일한 지 약 3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일하면서 커피 학원을 다니면서 커피도 한 달 가까이 배웠다. 이제는 나도 손님들을 위해서 커피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사장님과 조셉 형에게 바쁘지 않은 시간에 내가 손님들에게 커피를 만들어줘도 되겠느냐하고 물었다. 그들은 내 부탁을 거절했다. 이미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여럿이 있었고 나는 내가 하던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서운했다. 그동안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는데 가끔씩 커피를 만드는 것도 허락해주지 않는 것이 야속했다. 출퇴근 거리도 멀고 마침 근무 시간도 약간 줄고 있어서 이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사장님께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를 잘 챙겨주었던 조셉 형에게 죄송했지만 커피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너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첫 직장을 급하게 그만두게 되었다. 이쯤에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직장을 그만둘 때는 이직할 곳을 정하고 그만두고, 여자 친구와 헤어질 때는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이별을 하는 게 맞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현재 직장과 사랑에 충실하다가 인연이 아니면 잘 끝맺음하고 이후에 다른 직장과 사람을 찾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새 직장을 찾는 것은 내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제는 경력이 있어서 카페에 이력서를 넣으면 처음보다 면접 연락이 자주 왔다. 시드니 대학 근처에 한 오지 카페에서 면접을 보고 트라이얼(같이 하루 이틀 일을 해본다)을 했다. 트라이얼에서 합격돼서 채용이 되었지만 이후에 일을 하다가 의사소통의 장애로 해고가 되었다. 바로 연이어 한국인 매니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도 트라이얼을 통과하고 며칠 같이 일을 하다가 역시 동료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해고되어야 했다. 이 주 연속으로 이렇게 해고가 되고 나니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 직장에서도 안 당한 해고를 이후에 두 번 연속당하니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역시 조셉 형의 은혜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집 근처 본다이 해변에 위치한 백패커스(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서 하우스키퍼(청소하고 침대를 정리한다)로 일을 시작했다. 체력은 자신이 있었기에 일은 할만했고 보수도 괜찮았다. 하지만 바리스타가 되는 목표를 버리지 않고 계속 커피를 배웠다.
백패커스에서 한 달 반 정도 일할 후에 나는 다시 카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그곳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 이력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 영어실력으로 오지 카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한인 카페에만 이력서를 넣었다(그래도 스트라스필드 같은 한인 거리만큼은 넣지 않았다). 첫 직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채스우드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면접 연락이 왔다. 그곳에는 40대의 한국인 남자 사장님이 계셨고 나에게 라때 두 잔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이제는 면접 경험이 쌓여서 떨지 않고 그럴듯하게 커피를 만들었다. 사장님께서는 나를 마음에 들어하셨다(내 외모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사장님은 앞으로 며칠 더 면접을 볼 예정이고 그 후에 나에게 연락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후에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나는 안된 줄 알았다. 구직활동에 지쳐서 시드니 생활을 여기서 그만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날(2018년 크리스마스였다) 사장님이 선물처럼 나에게 직업을 주셨다. 나는 그렇게 바리스타가 되었고 원 없이 손님들을 위해서 커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 비자가 끝날 때까지 약 4개월 동안 일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중간에 나를 대신해서 일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그에게 내 자리를 넘겨주고 나는 유학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서 예정보다 빠르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목표로 했던 오지 카페에서 바리스타는 아니었지만 소기의 성과는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다. 바리스타에 집착을 하면서 첫 직장동료들과 우정과 개인적인 여유를 조금 잃었지만, 대신에 다른 경험들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지난 10개월 동안 시드니 생활은 나에게 너무 행복한 시간이어서 돌아온 이후에도 늘 그리워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서 그 환상을 깨기보다는 내 마음속에서 첫사랑 같은 애틋함으로 남겨두고 싶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과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모두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것들을 다시 떠올렸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쓰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브런치라는 공간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나의 추억을 정성스럽게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읽으실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