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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슈퍼우먼이 되고 싶지 않아

by 구르미

나는 한때 진심으로 만능이 되고 싶었다.
육아도 완벽하게, 일도 완벽하게, 사랑도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누구에게든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지 내 욕망이나 성취 욕구의 표현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무언가 강요되어온 억압이었다.


결혼 전엔 나름대로 ‘내 삶’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고,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나만의 커리어를 만들어 나갔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사랑과 존중이 가득한 공간을 만들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구조적인 요인을 함께 짚어보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는 여전히 여성을 다역할 수행자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프레임 속에서, 동등한 파트너십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레 무너진다.

결혼 전에는 ‘함께 성장하고, 서로 의지하며, 사랑으로 살아가겠다’는 믿음이 현실에서 각자의 극심한 스트레스와 한계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나 버리기 때문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체력과 감정을 소진하며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막연한 기대에 매달리지만, 결국은 서로에 대한 실망과 오해 속에서 감정의 균열이 시작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부터 세상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 역할엔 매뉴얼도, 실수에 대한 관용도 없었다.
직장에서는 업무를 다 마치지 못하고 퇴근하면 눈치를 봐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의 양육과 교육, 남편의 식사, 부모님의 건강까지 챙겨야 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정서적 안정과 영양까지 고민하며,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가사를 도맡아 가족의 끼니를 책임졌다.
나는 식사를 거르면서도 가족들의 식사 시간은 철저히 지켰고, 내 밥한번 차려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끼 못챙긴 질타를 받았다.
‘좋은 딸’, ‘좋은 며느리’로서 양가 부모님을 살피고, ‘좋은 직원’이 되기 위해 야근도 해야 하는 그야말로 그 많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을 고군분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디에서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수고했다, 잘했다'는 말로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웃는 얼굴 뒤에는 탈진한 나를 숨기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피로와 슬픔을 삼켰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내가 몹시 힘들고, 지쳐 있다는 것을...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탄생을 넘는다.
육체적인 변화뿐 아니라, 정체성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격랑을 동반한다.

나는 한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한 아이의 전부가 되어야 했다.

밤을 새우는 것도,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도, 아이가 아플 때 죄책감에 무너지는 것도 모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교육도, 정책도, 제도도 내 감정과 몸과 시간을 충분히 돌보아주지 않았다. ‘엄마는 원래 그런 거지’라는 말들 아래 나는 점점 투명해졌고, 내 이름도, 욕망도, 꿈도 희미해졌다.


출산 후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가 ‘탄생’이라 부르는 이 일은, 한 존재가 사라지고, 또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 역시 ‘아이의 엄마’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나였던 한 존재를 보냈던 것이다.


하루는 24시간밖에 없는데, 그 안에서 일과 가정을 완벽하게 균형 잡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기대 자체가, 이미 여성에게 불공정한 게임은 아닐까?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도 늘 부족하고, 미안하고,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그 감정.

일-가정 양립이라는 말 아래,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여성들이 ‘다 잘하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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