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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정, 양립정책

by 구르미


아이가 태어나던 2007년 당시, 정부는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를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육아휴직 기간은 1년으로 늘었고, ‘고용 평등법’은 모성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 했다.

보건복지부는 국공립 보육시설 확대를 약속했고, 기업엔 ‘가족친화인증제’를 권장했다.

정책은 있었지만 문제는 ‘현장’이었다.


다행히 나는 노동법을 준수해야만 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에 기본적인 권리는 누릴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직업에 종사하던 다른 여직원들의 사정은 달랐다.

“팀 정리도 안 끝났는데… 타이밍이 좀 그렇네.”

그 말은 ‘기분 나쁘다’는 뜻이었고, ‘복직 후 자리가 없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들의 직장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개인 사정 다 봐주면 다른 직원들이 힘들어지지 않겠냐?”

‘네 사정이 우리 일에 방해 된다.’라는 뜻이었고, 육아휴직을 쓰는 내내, 그들은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회사에 다시 복귀한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때 핵심업무를 맡았으나 복귀 후 단순업무를 해야 했으며, 육아로 인해 ‘능력’을 잃은 것도 아닌데, ‘언제든 대체 가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편 집에서도 ‘일과 가정의 균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사설 어린이집은 비쌌고, 국공립 어린이집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믿고 맡길만한 곳도 많지 않았다. 살림과 육아는 오로지 엄마의 몫이었고, 나를 비롯한 그 시대의 엄마들은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집에서 일을 하며, 밤에는 잠을 설치며 육아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스스로 밥한번 해 먹을줄 몰랐고, 자신에게 소흘한 아내를 못마땅해 했다.

야근이라도 있는 날이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가슴 졸이며 퇴근을 서둘러야 했고 집에서는 남편에게 질타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지만, 가정도, 회사도, 제도도 ‘일과 가정을 모두 해내는 여성’을 실제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역시 매일같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아이가 눈앞에서 울고불고 하는 걸 그냥 두고 나올 것인가. 또 아이들은 얼마나 자주 아픈지,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는일도 그 일로 직장의 눈치를 보며 지각, 조퇴, 결근을 하거나 외출을 하는것도 모두 엄마들의 몫이었다.


사실 그 시대의 일-가정 양립정책은 ‘있는 듯 없는’ 이름뿐이었다.

정책은 있었지만, 현실은 여성의 희생과 포기로 유지되었고 나 역시 두 세계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했다.

워킹맘이라는 말은 멋있게 들릴지 몰라도, 그 속엔 무수한 눈물과 자책이 녹아 있었다.

나는 가정에서 ‘이기적인 엄마’였고, 직장에서는 ‘성실하지 못한 직원’이었고 아이에게는 '늘 부족한 엄마'였다.

그러다가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엄마의 가슴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2007년~2010년 당시 일-가정 양립정책 요약 참고자료


2007년: 육아휴직 급여 상한 월 40만 원 → 2008년 50만 원으로 인상

2008년: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 도입

2009년: 가족친화기업 인증제 본격 확대


그러나 사회는 제도와 법률에 대한 이용률 저조와 여성의 경력단절 심화를 가져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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