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대한 응급의학회 30주년 기념사업 06
"그 당시에는 길병원이 장점이 있었다면,
응급의학의 중요성을 오너들이 인식을 했었죠.
그래서 길병원만 특별하게 전과에 대한 권한을 받았어요,
응급의학과에서. 입원권을 다 가져갔죠. 굉장히 파격적이었고.
그 당시에만 해도 레지던트 들어가는 게 어려운 시절이라,
다른 과 레지던트들이 거부할 수 없었어요."
"그 당시에도 그런 결론을 냈는데, time-oriented 된 전문가다.
각 해당 과에 sub-specialty 다 있고 그러니까.
자기 맡은 시간에 일을 처리해줄 수 있는.
집에 있는 황금 송아지보다는 병원에 있는 나무 막대기가 귀하다
이런 개념으로 얘기를 하는 거죠."
"응급의학을 한다면, 정말 돈 때문에 할 수는 없는 거고.
정말 자기가 환자를 위해서 뛰어 보겠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하지 말고, 있다면 괜찮은 학문이죠.
응급의학은 멋있는 과가 아니고 봉사하는 과라고 생각을 해야 해요.
개념이 좀 다릅니다."
이름 : 정호성
응급의학과 전문의 번호 : 38번
수련병원 : 가천대 길병원
현근무지 : 강릉동인병원
Q 선생님께서 처음에 시작하셨을 때는 전국에 몇 분 계셨나요?
A 제 기억으로는 18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Q 선생님께서 3회시죠?
A 기수로 정확히 하면 4기가 돼요. 4기가 11명이었고. 12명인가?
Q 길병원에서 처음으로 의국을 만드신 건가요? 길병원 1기이신가요?
A 그렇죠.
Q 어느 분하고 수련을 같이 받으셨습니까?
A 김상은 선생님하고 둘이서 같이 했지요.
Q 응급의학은 어떻게 처음 알게 되셨어요?
A 아주 우연히, 솔직하게 얘기하면 무엇인지 몰랐다가. 내과를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1년을 재수를 해야 하는데, 그때 응급의학을 알게 되고 하자 그래서 시작을 했어요. 길병원에 이근 선생님 모시고 했죠.
Q 이근 선생님께서 응급의학이 뭐라고 설명을 해주셨나요?
A 따로 설명은 듣지 못했고, 그것보다는 선배들이 “새로운 과니까, 새로 개척해서 하자”라고. 정확하게 말씀은 안 하셨던 것 같아요.
Q 당시 길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많았죠?
A 아마 그 당시에는 전국으로 제일 많았을 거예요 응급실 환자가 (지금도 그렇습니다).
Q 응급실에서 죽는 사람도 많았죠?
A 네. 화장실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고 다 있었죠. 인턴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청나게 혹사당하는 시절이었으니까.
Q 첫날 출근하실 때 생각이 나세요?
A 첫 날 보다는, 나도 인턴을 계속하면서 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없어요. 그니까 응급실 인턴 하면서 바로 레지던트 시작한 거고. 우리 때는 근무가 병원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까. 꼬박 새도 그다음 날 근무를 해야 하니까 그런 기억이 나요.
Q 1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가셨나요?
A 2주에 한 번 쉬었나 그랬던 것 같아요.
Q 응급실에 숙소가 따로 있었습니까?
A 처음에는 없었는데, 나중에는 따로 방을 만들어서 있게 됐죠.
Q 주로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응급의학과 전공의로서 하는 일이?
A 처음에는 응급의학을 잘 모르니까, 전반적인 것을 한번 쭉 봤죠. 보다가 다른 과 연락해서 입원시키고 하다가 응급의학을 제대로 한 것은 한 1년 이상 지나고 개념을 알았던 것 같아요. 그때는 응급의학에 대한 개념이 없고 전국에 있는 병원마다 다 달라서 그랬던 기억이 나요.
Q 선배가 없으니까, 1기시지 않습니까? 그럼 뭔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야기하거나 방패막이 해주실 분이 안 계셨네요?
A 없었어요. 책에서 궁금했던 것 물어볼 데도 없고. 하나하나 배워갈 때니까 병원에 다른 스태프들도 모르고. 기존의 외과 하시던 분들은 당연히 모르시니까 굉장히 어려운 점이 많았었어요. 중간에 기억이 나는 게 원주 기독병원의 황성오 선생님, 복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Q 원주에 많이 가보셨나요?
A 아니요. 원주는 3년 차 때인가 한 달 파견을 갔었어요.
Q 당시 수련받던 선생님들이 원주응급의학과를 상당히 많이 부러워했었다고 얘기를 하시던데요?
A 아마 그때 기억으로는 당연히 내과 쪽 때문에 그랬던 것 같고. 대부분 응급실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외과가 외상이 주로 지키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개념이 전혀 달랐죠. 실제 환자가 내과 환자가 더 많은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외상, 외과계 이런 식의 환자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Q 그럼 선생님 2년 차 되시고 밑에 양혁준 선생님이 들어오신 건가요?
A 네.
Q 선생님이 뽑으셨습니까?
A 양혁준 선생님은 자기가 스스로 지원해 왔어요. 어느 날 갑자기 와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 학문이라고. 아 그러면 당장 들어오시라고. 그랬던 생각이 나요.
Q 후배들이 들어오고 1기로서 책임감이 많이 늘었겠네요? 수련 커리큘럼이라든지 프로그램이라든지.
A 그럼요 그래도 그 당시에는 길병원이 장점이 있었다면, 응급의학의 중요성을 오너들이 인식을 했었죠. 그래서 제 기억으로는 1년 뒤부터는 길병원만 특별하게 전과에 대한 권한을 받았어요, 응급의학과에서. 그게 기억에 남아요.
Q 다른 과에서 반발이 많았겠는데요?
A 많았어도, 위에서는 그거 싫으면 나가라 이런 식이였으니까.
Q 구체적으로 뭐 어떤 입원권이라든지?
A 입원권을 다 가져갔죠. 그전에 기억나는 것은 원장, 진료부장, 수련부장, 각 과 chief(의국장)들 다 모아서 회의해서 확인을 받아가지고 진료를 했죠.
Q 아직도 그걸 못 하고 있는 병원들이 많은데요?
A 힘들 것 같은데, 그니까 각 과 별로 요즘은 더욱더 심해진 것 같고.
Q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적이었네요?
A 네 굉장히 파격적이었고. 그 당시에만 해도 레지던트 들어가는 게 어려운 시절이라, 다른 과 레지던트들이 거부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다들 고생할 때니까, 부작용도 있었어요. 응급의학에서 잘못해서 다른 과 입원을 시켜 놓아 가지고 그 과에서 고생을 하고 그런 것도 있었죠.
Q 다른 과 트러블을 선생님이 주로 해결을 하셨습니까?
A 그렇죠. 근데 대체적으로 트러블이 다음날 chief끼리 (해결하죠).
Q 전문의가 되시고 나서 바로 시험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럼 전문의 되시고 나서 어디로 제일 처음 가 있으셨던 거예요?
A 전문의 되고 나서는 우리가 2월 달 수료받은 것 같은데, 저는 길병원 스태프로 있었죠.
Q 선배들이 보기에는 바로 전문의 시험을 본 복 받은 기수라고 생각을 했을 것 같네요.
A 당시에 응급의학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다른 병원에서 이게 뭐냐는 식의 개념을 가졌어요. 제가 기억이 나는 게 터키 봉사 갔을 때, 터키 현지에 있는 소아과 의사가 진료를 하게 됐는데. 전공이 뭐냐 그래서 응급의학이라고 했더니. 왜 이런 사람이 왔냐고 대놓고 앞에서 그러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1주일 지나고 나니까, 응급의학과가 이런 과다라고 알았죠. 사회적으로 응급의학과가 그때는 과라고 얘기하고 어려웠죠.
Q 영동 세브란스가 제일 먼저 생겼고, 가톨릭 대 생기고 길병원은 좀 나중에 생겼잖습니까. 다른 병원 선생님들하고 교류가 좀?
A 1년 차 때는 교류가 안 됐었던 것 같고. 2년 차인가 3년 차 때부터 전공의들 모임을 자주 가졌죠. 레지던트들끼리 모여서 교류하고 술먹고 그랬어요.
Q 모여서 무슨 얘기를 주로 하셨나요?
A 그 당시에 우리가 뭐를 수련을 받아야 하냐.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나. 스스로 우리 레지던트들끼리 얘기를 많이 했죠.
Q 무엇을 수련받아야 된다고 결론이 났습니까?
A 그때 최소한 ACLS, ATLS는 기본으로 하고. 필요한 것은 각각 얻어서 하자라고 결론이 났던 것 같아요.
Q 응급의학 전문의 시험은 어려웠었나요?
A 아니요. 쉬웠습니다(웃음).
Q 어떻게 준비하셨습니까, 텍스트도 없는데?
A 예상문제집도 있었고. 미국에 문제집 비슷한 거 있었고. 한두 달간 공부한다고 했죠.
Q 모여서 하셨습니까?
A 12명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원주 쪽에 모여서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Q 원주에서 치악산 아래 앉은뱅이 술, 술을 많이 드셨겠네요?
A 그렇죠. 공부하다가 술도 먹고, 수영장도 있고. 콘도 빌려서 12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자 맡은 것 서로 정리해서 발표하고 공부했던 것 같아요.
Q 응급의학과 수련받으면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으셨습니까?
A 많았습니다. 그리고 과에 대한 아픔도 있고. 개인적으로 응급의학과는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도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과니까, 그렇게 권유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은.
Q 그럼 실제로 나갔다가 들어오신 적도 있으신가요?
A 아 그런 적은 없습니다.
Q 주로 어떤 때 무엇 때문에 그만두고 싶으셨어요?
A 뭐, 수련 방식이라던가. 과에 대한 커리큘럼이라던가. 그런 것이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과연 이것을 해도 될까? 물론 일 자체는 여러 가지 할게 많아서 재미는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당시까지만 해도 굉장히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었고요.
Q 해보시니까, 응급의학과가 뭐던가요?
A 그냥 그 당시에도 그런 결론을 냈는데. time-oriented 된 전문가다 그 정도밖에 말할 게 없는 것 같아요. 각 과 해당 과에 sub-special 다 있고 그러니까 이제는. 자기 맡은 시간에 일을 처리해줄 수 있는. 그런 얘기죠. 집에 있는 황금 송아지보다는 병원에 있는 나무 막대기가 귀하다 이런 개념으로 얘기를 하는 거죠.
Q 선생님 하면 개업을 또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A 개업만 아니고 한 5년만 있으면 집에서 떠나는데. 응급의학과가 원래 장점이 미국 예를 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곳, 시골로 갔다가 도시로 가고.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프리한 직업이기 때문에 의사로서는 되게 좋다. 그걸 장점으로 꼽았기 때문에, 이왕이면 많이 움직여보자. 그래서 제 기억으로는 다 대학에 남는데 저 혼자 동서울 병원에 가서 개인 종합 병원에 응급의학과를 개설했을 때 제가 아마 월급이 많았었던 것 같고. 제 월급이 응급의학과 월급의 표준이 되었던 것이 기억이 나요.
Q 개업해 계실 때도 제가 기억하기로는, 개업한 사람들도 응급실 한 번씩 와서 일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A 개업도 응급의학과를 달고 해 봤어요. 역시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저는 처음에 정형외과 선배랑 같이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좀 피해 갈 수 있었던 거죠. 아직도 응급의학으로 개업을 하려 하면 어렵죠.
Q (응급의학의로 개업하는 것이) 왜 어렵죠?
A 다른 사람들이 각 과 전문가를 원하지, 응급의학과 의사한테 진료받으려고 그러지는 않아요. 가족들도 그래요(웃음).
Q 응급실을 떠나 계시니까 응급실이 그리우시던가요?
A 그립지는 않아요. 그립지는 않은데, 내가 뭘 다시 해야 되겠다. 내가 배운 게 그건데. 그럴 때는 고향 찾아가는 느낌이 들죠.
Q 다시 응급실에서 일하시니까 어떠십니까?
A 지금 일 한지 한 달이 안돼서, 굉장히 힘들기만 합니다. 이원재 선생님이 잘 안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웃음).
Q 이원재 선생님께서 강릉으로 오라고 하셨나요? 선생님 이전에도 여기 계셨었지 않습니까?
A 네, 옛날에는 권역센터였을 때 있었고. 그때는 권역센터가 전국에 6개 있었으니까, 그 (강릉동인병원) 권역센터 처음 셋업 할 때 있었죠.
Q 공통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응급의학과 하라고 하면은 하시겠습니까?
A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다시 하라고 그러면 다른 과를 하고 3년 차인가 4년 차에 다시 들어오는 생각을 가질 거예요.
Q 왜 그렇죠?
A 자기 전문에 따로 깊이 있는 게 있어야 되는데, 응급의학과에서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해당 전문의가 없으면 인정이 안되니까. 내가 보기엔 쟤보다 내가 더 많이 아는데. 걔가 우기면 할 말이 없단 말이죠.
Q 30년 지나면서 많이 해결이 되지 않았을까요?
A 제가 보기엔 해결 안 됐다고 봅니다. 더 분업화되면서, 어떻게 보면 응급의학과에 가도 월급들은 올랐는데 서류 작업들이 올라가고. 따지고 보면 옛날보다 더욱더 당직 의사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아요. 다른 과하고 관계에서 굉장히 달라진 것 같아요.
Q 응급의학이 정체기라는 말씀이신가요?
A 정체기보다는 전 세계적으로 똑같겠지만, 셋업 자체가 기본의 의학적인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워질 것 같아요. 그래서 중간에 응급의학과를 sub-special로 나누자는 얘기도 있긴 있었는데. 어려운 아픔이 있고. 일단 시간적으로 먼저 보는 의사의 개념이지, 어떤 전문가라는 느낌이 아니기 때문에 아픔이 있고. 어떤 발전이 될지는 미지수죠.
Q 앞으로 30년 동안 그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데 지금 젊은 사람들을 많이 연구하니까. 또 나아가서 의사는 개원가 가서 할 수 있는 영역을 구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응급의학과도 그런 영역을 만들어 나가면은 그런 아픔들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Q 동기모임을 하면 선생님께서 거의 주도적으로 모임을 했다고 들었는데?
A 그게 아니고, 제가 술자리를 준비를 했죠.
Q 주로 어디서 그렇게 모임을 하고 그랬나요?
A 여러 군데서 모였죠. 부산, 인천, 서울 이런 식으로.
Q 동기분들하고 많이 친하셨던가요?
A 그렇죠. 되게 친했었죠. 12명이 내 기억으로는 물들레라고 이름을 붙여서 모였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Q 이제 응급의학과를 고민하고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A 응급의학을 한다면, 정말 돈 때문에 할 수는 없는 거고. 정말 자기가 그쪽으로 환자를 위해서 뛰어 보겠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하지 말고, 있다면 괜찮은 학문이죠.
Q 응급의학과 멋있는 과입니까?
A 응급의학은 멋있는 과가 아니고 봉사하는 과라고 생각을 해야 해요. 개념이 좀 다릅니다.
Q ‘물들레’의 뜻이 뭔가요?
A 제 기억에는 최옥경 선생이 아이디어를 냈는데, 돌을 호수에다가 던지면 물결이 동그라미 퍼져 나가잖아요. 그게 물들레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것 같아요.
Q 초창기에 응급의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A 다른 과 경쟁에 밀려서 했기 때문에, 사실 지금 하는 사람들한테는 미안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때는 응급의학 개념이 없었어요. 그게 전문의가 된다고 생각을 안 했었던 것 같아요. 전문의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사건 사고가 많이 나요. 김영상 대통령 시절에. 그래서 국가적으로 재난에 관련해서 응급의학과가 필요하겠구나. 그래서 그때 겨우 됐던 것으로 기억나고. 그 사건이 없었으면 전문의가 안 됐을 수도 있어요.
Q 초창기 때는 선생님 논문도 쓰고 학회 발표도 하고 하셨었나요?
A 1년 차 때는 못 하고, 3년 차 때부터는 다른 학과랑 비슷하게 적긴 했지만 모여서 논문 쓰고 발표하고 그랬죠.
Q 힘들진 않으셨어요?
A 힘들었죠. 논문 쓰는 거. 힘든 정도가 아니고 아이디어 하고 여러 기존에 있던 선생님들한테 도움받아서 했죠.
Q 혹시 혼자 근무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같은 게 있으신가요?
A 얻어맞았던 것도 있고, 뿌듯했던 것.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동시에 3명을 인턴 하나를 데리고 CPR 했을 때. 그때 개념이 없을 때니까 그야말로 3개 다 할 수 없으니까, 2개를 포기해야 하는 그때가 기억나요.
Q 전문의 2000번대 후배들이 나왔잖아요. 그 친구들한테 한 마디 해주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면?
A 응급의학이라는 게 참 애매한 과인데, 아까도 말했듯이 정의 자체도 어렵고 병원에서 움직임도 어렵고 그런데. 대체적으로 혼자서 그냥 당직 의사처럼 지내려고 하면 그런데. 물론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과를 운영하고 병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돼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응급의학과 1기 22명의 개척자들,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기 [인터뷰 모음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