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대한 응급의학회 30주년 기념사업 13
"응급의학과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의사에 대한 정의를 표현해 주는 것 같았어요.
무슨 소리냐 하면, 의사는 저런 일을 해야 한다.
환자가 가장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의사,
가장 중요한 의사 아니겠냐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국에 22명 전공의끼리) 다 친했죠.
저희가 과가 어떻게 될 거다라는 미래가 명확하지 않았고.
중간에 없어진다는 소리도 있었고.
전문의 안 될 거라는 얘기도 많고 그랬기 때문에.
비상대책회의니 뭐니 이런 것을 하자고 그러면서,
두세 달에 한 번씩 만났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과이기 때문에,
환자를 존중할 수 있다면 영원히 발전할 수 있는 과라고 생각을 해요.
충분히 본인이 하는 만큼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과이기 때문에
열심히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름 : 조광현
응급의학과 전문의 번호 : 48번
수련병원 : 연세대학교 강남세브란스병원
현근무지 : 을지대학교 병원
Q 조광현 선생님도 영동 세브란스(강남 세브란스)에서 수련을 받으셨죠?
A 그렇죠.
Q 맨 처음에 들어가실 때 그러면 위로 선배님들이 어떤 분들이 계셨었나요?
A 장석준 선생님, 김성중 선생님, 송근정 선생님 계셨죠.
Q 어느 선배가 제일 무서우셨습니까?
A 다 무서웠죠. 레지던트를 한다는 게 선배님들을 알고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들 그때야 레지던트라고 하면 하늘 같은 존재들이었죠. 다들 무섭다고 봐야죠.
Q 지금도 무서우세요?
A 지금도 무섭죠. 아무래도 그때 기억이 많이 나니깐.
Q 언제부터 그래도 편해지셨습니까?
A 그러니깐, 그 선배님들이 레지던트를 마치고 나가셨을 때부터가 편했지.
Q 전공의 1년 차 맨 처음에 들어오면은 100일 당직이 있었나요?
A 있었죠. 우리 과에는 무조건 있었어요. 다른 과가 하기 때문에 우리도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얘기도 있었고. 약간 느슨하긴 했었는데, 그래도 했어요. 응급의학과는 그래도 잠을 안 재울 수는 없으니깐 조금은 잤죠. 어떻게 했냐하면, 밤새 근무하고 아침에 회진 돌고 아침을 같이 먹고, 그리고 1, 2시까지 잤어요. 보통 10시나 11시 사이에 누워서 2, 3시 정도에 일어나면 다시 회진 준비하고 근무 계속하고, 그런 식으로 했죠.
Q 집에 가지 않고 계속 병원에 계시는 건가요?
A 그렇죠. 계속 있죠. 1년 차 때는 주중에 하루 없고. 2년 차가 되면 주중에 하루 없고 주말에 하루 없고. 3년 차가 되면은 주중에 두 번 없고 주말에 한 번 없고. 4년 차가 되면은 주중 두 번 주말 두 번 다 없고 이런 식으로.
Q 영동 세브란스는 의국이 (공간이) 따로 있었나요?
A 있었어요. 뒤쪽에 쪽방이 있었죠. 의국이라기보다 2층 침대 하나 있었어요.
Q 응급의학이라는 것을 처음에 알게 되신 건 어떻게?
A 저희 때는 다행히 88년도에 처음 응급의학 강의가 신설이 됐어요. 그때 한 학점 짜리 강의긴 했지만, 모든 과가 다 들어와서 자기 분야에 대한 강의를 하고 나갔던 게 있었거든요. 그걸 보면서 “응급의학과라는 것이 있네.”라고 처음 알았어요.
Q 그럼 응급의학을 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A 그 강의 들으면서부터요.
Q 그럼 학생 때부터 하고 싶으셨던?
A 네 학생 때부터요.
Q 그러면 응급의학에 대해서 선배들에게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고 그랬습니까?
A 그게 아니라 다행히도 우리 때 같이 응급의학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같이 있어서, 장문준 선생이라고. 그 선생이 한 번 찾아오더니, 응급의학 정말 할 것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할 거라고 그랬더니, 그러면 잠깐 누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하면서 갔는데. 장석준 선생님이 학생 식당인가 어디 앞에서 앉아 계시더라고요. 잠깐 나중에 영동에 나오면 자기 찾아오라고 하셔서. 우리가 3학년 때부터 실습을 하는데, 그 실습할 때 영동에 찾아갔더니, 갑자기 들어오라고 그러더니, 이만한 장부를 펼치고 환자를 막 쓰고 계시더라고요.
Q 그럼 응급의학과를 하겠다고 지원한 다음에는 장석준 선생님이 응급의학과에 대한 소개를 해주셨나요?
A 그런 건 없었죠. 강의 자체도 모든 과가 자기네 파트에 대한 강의를 하고 갔기 때문에, 저게 굉장히 필요하구나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게 응급의학과다라고 정의를 해둔 것은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 막연히 외국 드라마 하는 것들 많이 보고, 그러면서 응급실에서는 의사들이 저런 것을 하는구나. 마음을 먹고 보게 되니까 그런 것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Q 영화를 보면서 외국의 응급의학과 의사를 보고 부러우셨나요?
A 제가 가지고 있는 의사에 대한 정의를 표현해 주는 것 같았어요. 무슨 소리냐 하면, 의사는 저런 일을 해야 한다. 환자가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이 의사지, 자기가 계속해서 follow up(추적 관찰) 하고 그러는 것보다는 환자가 가장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의사. 환자가 정말 필요로 해서 있는 의사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의사 아니겠냐라는 생각을 했어요.
Q 3월 달에 첫 출근 하셨을 때 얘기를 좀 해주시죠?
A 제가 응급실 픽스턴을 6개월을 돌았기 때문에, 3월 달 첫 출근 같은 것은 없었어요. 계속 있다가. 게다가 제가 파견이 또 외부 병원 파견으로 용인하고 광주에 분원이 있었는데, 분원 파견을 1달씩 갔다 오다 보니까 거의 8개월을 응급실에만 있었던 경우였기 때문에 3월 달 따로 첫 출근을 느껴보지는 못 했어요.
Q 막상 들어와서 의국원이 되니까 잘했다는 생각이 들던가요?
A 저희 때는 그런 개념이 없었죠. 왜냐하면 무슨 과를 한다 생각을 했으면, 무조건 끝을 본다는 생각을 했지. 중간에 도망간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운 때였어요. 사회적으로 반 죽음을 당하는 그런 때였기 때문에 완전히 뼈를 묻는다는 생각으로 했던 것 같아요.
Q 응급의학과 초창기 멤버들 중에서 중간에 그만둔 친구들도 있었나요?
A 저희 때는 없었죠.
Q 초창기에 하신 분들 중에는 그만두신 분들이 없군요?
A 아주 초창기에는 그랬던것 같아요. 우리 때까지는 없었죠.
Q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A 이게 어떤 약속을 하고 들어온 과가 아니고, 우리가 왔을 때 전문의가 없다라는 얘기를 듣고 들어온 과였기 때문에. 우리 때까지는 그런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말 의지를 가지고 들어온 과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마음에 안 들어서 나간다는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Q 휴가도 없으셨을 테고요?
A 휴가는 있긴 있었죠. 1년에 5일인가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갈 수 있었는데, 이제 윗년차 선생님들이 교수님들과 가기 때문에 1, 2년 차들이 거의 그냥 당직 서고. 교수님들 따라서 3년 차, 4년 차 이렇게 가버리기 때문에.
Q 전국에 그럼 한 22명 정도밖에 전공의들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럼 서로들 잘 아셨겠네요?
A 다 친했죠. 자주는 못 만났지만 저희가 이제 과가 어떻게 될 거다라는 미래가 명확하지 않았고. 중간에 없어진다는 소리도 있었고. 전문의 안 될 거라는 얘기도 많고 그랬기 때문에. 그때는 이상하게 비상대책회의니 뭐니 이런 것을 하자고 그러면서, 두세 달에 한 번씩 만났던 것 같아요. 전국적으로 올라와서 기회가 꽤 있었기 때문에 다 잘 알았죠.
Q 만나서 결정한 것 중에 결정적인 사안들이 있었나요?
A 없었어요. 우리 레벨에서 결정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보건복지부나 이런 곳에서 응급의학을 만들겠다 이런 것도 없었기 때문에.
Q 그럼 혹시 (응급의학과)교수님들하고 가장 크게 부딪혔던 그런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A 교수님들과 부딪힌 것도 우리 수련 중에는 별로 없었고, 나중에 전문의가 되는 과정에서 자격 조건이랑 이런 것들 정치적인 것들이 있었지. 그전에는 교수님과 틀어질만한 게 별로 없었죠. 맨날 같이 나가서 저녁 먹고 노래방 같이 가고 그러던 때여서. 교수님들도 사실 뭐를 해야 할지 모르고, 우리도 모르기 때문에. 다들 같이 공부하고 같이 고민하던 때여서 오히려 가족적인 분위기가 훨씬 더 컸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Q 일 하실 때, 지금이야 어려운 상황이나 중환 환자가 있으면 뒤에 백업도 있는 상황이잖습니까? 그 당시에는 백업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A 그렇죠 없죠. 그래도 우리 선배님들이 거의 만년 당직이었어요. 김성중 선생님은 병원에서 100미터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전화할 수 있었고. 송근정 선생님은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 항상 여자 인턴 방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전화하거나 그러면 오시긴 했는데. 그것보다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레지던트 이런 분위기가 좀 딱딱하긴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은 다 선후배이기 때문에 물어보고. 동료들에게 전화하거나 그러면 내려와서 욕은 하더라도 도와주고. 다 같이 한다는 느낌이 많았죠.
Q 응급의학을 한다는 데 있어서, 주변에서 반대했을 것 같은데요?
A 모르겠어요. 가족들은 응급의학과가 뭐냐고 그랬어요. 가족들은 되게 의아해했는데, 친구들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그랬어요. 오히려 저한테 저 아니면 그 과를 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그런 얘기를 더 많이 해주더라고요.
Q 어떤 의사가 응급의학과에 적당한 걸까요?
A 응급의학과를 하려고 그러면은 제가 보기에 정신적으로 좀 불안정해야 해요. 그 대신 집중도가 높아지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다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딱 적합한 것 같아요.
Q 육체적으로 야간에 일을 한다는 게 무리지 않습니까?
A 예전에는 도전 정신이 있었는지 객기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힘든 줄 잘 몰랐는데. 50대 중반이 넘으니까 정말 힘드네요.
Q 어떻게 건강 조절을 해야 할까요, 응급의학 의사를 오래 하려면?
A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시간 조절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요. 옛날처럼 무작정 12시간 근무를 몇 번씩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제는 안 될 것 같고요. 적정한 시간을 응급실에 투자를 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될 것 같고. 어차피 젊은 사람들은 저희처럼 이렇게 100일 당직 이런 개념조차도 없고.
지금 전공의 특별법 같이 80시간 이상은 일을 못한다는 이런 것이 아예 규정이 되어 있는 사항이 있어서 거기에 잘 맞춰서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사람들이 나오게 되면, 제가 보기에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무리해서 환자를 보고 하는 시스템이 점점 없어지지 않을까. 적정한 숫자의 환자를 보고, 제정신으로 환자를 볼 수 있는 그런 분위기나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어요.
Q 어떻게 보면 4기 선배들은 운이 좋은 거잖아요. 4년을 딱 마치고 전문의 시험이 생겼으니까?
A 딱 생기지는 않았죠. 1월에 본다고 했었는데 안 봤어요. 그래서 4월에 보느니, 5월에 보느니, 9월에 보느니 별 얘기가 다 있었는데. 저는 마치고 군대를 갔어야 됐는데, 군에 가서 훈련에 들어가서 집합소에서 2주 가있고 나서, 영천으로 모이기 전에 이틀인가 휴가를 준 적이 있어요. 그때 아주 특이하게 시험이 딱 걸렸어요. 그래서 토요일, 일요일 날 시험을 볼 수 있어서 시험을 보고 늦게 들어갔죠.
Q 그래서 1, 2, 3회 선배들이 부러워하기도 했겠어요?
A 그런 것보다는 다 같이 동기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근데 그랬을 수도 있겠다. 되게 싫어했을지도 모르겠어요(웃음). 하여간 동료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는 차원이었지. 선후배들끼리 서로 싫어하고 그런 것은 대놓고는 안 했어요.
Q 4년 차 말에 다들 모여서 공부할 때, 참 불안했겠어요?
A 불안하기보다 뭐 안되면 뭐 어떠냐. 윗 선배들이 안 되고서도 저러고 지내는데 우리도 언젠가 생기겠지. 그래도 혹시 시험을 볼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죠.
Q 뭐를 가지고 어떻게 공부를 하셨습니까?
A 각자 틴티넬리 나눠서 번역해 왔고요. 그리고 로젠이랑 이런 거 해서 문제들. 자기가 번역한 부분에 대한 문제들 열 개씩 만들어 와서 서로 나누고 질문하고. 정리했던 것 토픽처럼 발표해주고. 서로 토론하는 분위기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해서 틴티넬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했던 것 같아요. 그때 1, 2, 3기 선생님들도 따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와 가지고, 어디까지 공부했는지 물어보고 같이 저녁 먹고 그랬어요.
Q 전문의가 되시고 나서 응급의학과를 이렇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다짐이나 꿈같은 게 있으셨을 것 같아요?
A 저는 사실 응급의학과가 응급실에 오는 모든 환자를 볼 수 있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렇게 되려고 그러면, 처음에는 열정이 있으니까 달려들어하고 그랬지 점점 힘들어지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 숫자가 있어야 되는구나. 이게 숫자가 어느 정도 돼야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겠구나라는 안타까움이 생기긴 했는데.
하여간 제가 꿈꾸는 응급의학과는 다른 과가 응급실에 와 가지고 환자를 어렵게 볼 필요 없이, 응급실에 있는 것은 모두 응급실에서 해결을 해주고. 응급실에서 입원을 해야 하거나, 외래로 해야 되거나. 하여간에 다른 교과서들이라든지 이런 데서도 얘기하는 게 의료계를 통하는 gate way(관문) 역할을 해주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근데 그 gate way가 교통정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사람들을 해결해줘야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죠. 앞으로도 많이 발전하고 많이 커져야 하죠.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본다고 하더라도 전문의가 1시간 동안 1명 내지 2명밖에 없는 그런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거기에 비해서 응급실 하루 환자들이 100명 이상씩 오니까 아직은 멀었죠.
Q 초창기에 가지셨던 응급의학에 대한, ‘우리나라 응급의학과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해.’라는 목표에서 30년이 지나고 우리 어디까지 와 있을까요?
A 지금 반 이상 왔죠. 지금 병원마다 응급의학과가 없는 곳이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반 이상 온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내실화를 해야 하는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갖춰야 할 지식이라든지 기질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계속해서 개발해주어 가지고 익힐 수 있게 해 주고. 그런 분야를 발전시켜 나가야죠.
Q 응급의학과를 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응급의학과를 권하시겠습니까?
A 저는 권해요.
Q 뭐라고 주로 인턴들에게 응급의학과 홍보를 하시나요?
A 네가 들어오면 우리 응급의학과가 꽃이 필 것 같다.
Q 응급의학과 장점과 단점이 뭔가요?
A 응급의학과 장점은 굉장히 다양한 환자를 볼 수 있고. 단점은 그렇게 보는 데 힘들다는 거죠.
Q 그만큼 보람이 있으셨나요?
A 보람 있었죠. 제가 환자들 어쩌다 응급실에서 치료 잘 받아서 입원했다고 지나가는 환자를 보면 제가 십 년 묵은 체증들이 날아가는 것 같아요. 그럴 때 가장 보람 있어요.
Q 다시 응급의학을 한다고 하면 하시겠습니까?
A 저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서 해보았기 때문에 다른 걸 해보고 싶긴 하지만, 만약 다시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응급의학을 할 것 같아요.
Q 최전선에서 생명을 살리는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신 계기는 어떤 건가요?
A 아까도 얘기했지만, 응급의학과 강의를 하는데 모든 과에서 강의를 하는데, 모든 과에서 본인들만이 해결하지 못하는 응급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것을 해결해 줄 의사가 필요한데. 그런 의사가 각 과에서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환자들이 정말 필요하고 아프다고 생각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Q 응급실 근무 당시에 대부분은 혼자 근무를 하셨었나요?
A 그렇죠. 우리 때는 혼자였죠.
Q 그때는 어땠나요? 근무할 때는 많이 바빴나요?
A 바쁠 땐 굉장히 바쁘고. 새벽에 한 3, 4시 되면은 환자가 없을 때가 있어요. 저녁때 7, 8시 되면은 차트가 20개 정도씩 쌓여있어요. 그 20개를 다 해결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바빴죠.
Q 후배들에게 짧고 굵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A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과이기 때문에, 환자를 존중할 수 있다면 영원히 발전할 수 있는 과라고 생각을 해요. 충분히 본인이 하는 만큼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과이기 때문에 열심히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응급의학과 1기 22명의 개척자들,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기 [인터뷰 모음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