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술 응급의학과 1회 전문의 인터뷰

2019 대한 응급의학회 30주년 기념사업 08

"환자야 뭐, 그때 당시 원광대가
익산, 군산, 전주 일부까지 다 커버하니까
전국에서 중독 환자들이라든지. 특히 농사 철에 농약.
그리고 그쪽이 도로가 열악하고
워낙 전주, 군산 간 도로가 쌩쌩 달리기 때문에,
교통사고 환자도 엄청 많았죠.
그때는 우리나라 차들도 안전성이 없었고.
안전벨트도 안 차고 다니고.
그때 하여튼 사고 났다 그러면, 조각조각.
사람이 진짜 오징어처럼 납작해져서 들어오는 시절이었지."


"그때 후속 진료는 지금처럼 시스템이 없고.
응급의학이라는 게 처음 생기니까 각 과에서 서로 협조가 안 되고,
응급의학에 대해 이해가 안 되니까.
우리가 처음 환자를 보면서 오더를 내리면,
각 과 전문의들이 내려와서 왜 우리 환자들을 멋대로 건드리냐.
환자가 거의 호흡정지 되어가지고 왔을 때 기관삽관 해 놓으면,
자기들 안 부르고 기관삽관 했다고 난리 치고.
그래서 맨날 다른 과 전문의들이랑
싸우고 멱살 잡고 하던 그런 시절이었지."


"응급의학과는 힘든 과라고 생각 안 해요.
자기가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면, 힘들지 않을 거고.
재미없고 억지로 먹고살기 위해 하면 힘들 거고.
외국 여러 나라에 대해 스터디를 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라이프 스타일을 굉장히 즐길 수 있는 과에요.
그런 점에 있어서 응급의학과가 난 매력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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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인술

응급의학과 전문의 번호 : 41번

수련병원 : 원광대학교 병원

현근무지 : 충남대학교 병원




Q 원광대 응급실은 당시에 어땠습니까? 어떻게 생겼었어요?


A 베드 수는 30 베드였지만, 공간은 작았지. 그냥 말 그대로 침대 가져다 놓고 밀어 넣는 그런 구조고. 그때는 의국도 없고. 옆에 X-ray실 하나 하고, 응급 검사실 있고, 조그마한 처치실. 그러니까 지금 보면 조그만 응급실. 지역 응급의료기관보다도 못한 수준이었죠.




Q 환자는 (엄청) 많았죠?


A 환자야 뭐, 그때 당시 원광대가 익산, 군산, 전주 일부까지 다 커버하니까 전국에서 하여튼 중독 환자들이라든지. 그리고 그 옆에 나환자촌이 있어요. 다 치료받고 음성 판정받은 사람들. 나환자들 먹는 약 먹고 중독돼서 오는 그런 환자들도 있었고. 또 특히 농사 철에 농약.


그리고 그쪽이 도로가 열악하고 워낙 전주, 군산 간 도로가 쌩쌩 달리기 때문에, 교통사고 환자도 엄청 많았죠. 그때는 우리나라 차들도 안전성이 없었고. 그다음에 안전벨트도 안 차고 다니고. 그때 하여튼 사고 났다 그러면, 조각조각. 사람이 진짜 오징어처럼 납작해져서 들어오는 시절이었지.




Q 후속 진료도 엉망이었겠어요?


A 그때 후속 진료는 지금처럼 시스템이 없고. 후속 진료도 후속 진료지만, 응급의학이라는 게 처음 생기니까 각 과에서 서로 협조가 안 되고, 응급의학에 대해 이해가 안 되니까. 우리가 처음 환자를 보면서 오더를 내리면, 각 과 전문의들이 내려와서 왜 우리 환자들을 뭣대로 건드리냐. 예를 들어서, 환자가 거의 respiration hold(호흡정지) 되어가지고 왔을 때 intubation(기관삽관) 해 놓으면, 자기들 안 부르고 intubation 했다고 난리 치고. 그래서 맨날 다른 과 전문의들이랑 싸우고 멱살 잡고 하던 그런 시절이었지.




Q 응급의학과라는 것을 처음 언제 아셨어요?


A 응급의학이라는 것을 학생 때는 전혀 몰랐었고. 그때는 응급의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던 시절이니까.




Q 인턴 때는요?


A 인턴 때도 없었고. 그래서 원광대 응급의학과가 생기게 된 계기가, 처음에 총장이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구급차가 돌아다니고 현장에서 응급 처치하고 그런 모습을 보니까, 병원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이게 뭐지?” 궁금해서 따라 가봤대요. 가서 보니까 응급의학이라는 게 있대, 미국에.


그래서 총장이 와서 병원장을 불러다가 "병원에 응급의학과를 만들어라." 그랬는데, 병원장도 응급의학이 뭔지를 모르니까, 그 당시에 마취과 하셨던 분인데. 그러니까 막연하게 “응급환자는 일반외과에 많지.” 그러니까 외과 과장한테 “총장님이 응급의학과 만들라는데, 외과 스텝 중에 누구 내려 보내라.” 그래 가지고 외과 주임 교수가 지금 우리 학회 원로이신 박제황 선생님 보고 “야, 총장님이 만들라니까, 네가 가서 맡아라.”


그때 당시에는 응급실장이죠. 응급실장 겸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응급의학과가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교실로 발전을 했어요. 그래서 과가 만들어진 것 말고 교실이 만들어진 것은 원광대가 처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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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응급의학과를 모를 당시 어떤 과를 하고 싶으셨나요?


A 나는 원래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미용 성형이 아니라, 재건 성형. 그래서 그때 미국에서 막 들어와서 재건 성형하는 분당 서울대 병원에 백세민 교수라고, 그 양반이 재건 성형하면서 우리나라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근데 우리 한국에는 제대로 세팅이 안 되어 있으니까, 일단 성형외과 전문의를 따고 미국 가서 성형 재건술을 공부해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인턴 끝나고 레지던트 지원하려고 하는데, 성형외과 교수님들이 다 나갔어요 개업하러. 그래서 이제 티오가 없어졌죠.


그래서 그때 당시에 병원에다가 “그러면 나 응급실에다가 인턴을 주십시오. 응급실에서 1년 근무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일종의 촉탁의죠. 촉탁의 형태로 인턴 월급 받으면서, 1년간 일하게 둔 거예요. 그렇게 하는데, 그다음에 성형외과 교수가 오긴 왔는데, 한 분 밖에 안 온 거야. 그래서 고민하는데, 박제황 선생님이 날 부르더니 “너 응급의학과 안 해볼래?” 그래서 응급의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모르니까, 박제황 선생님한테 첫마디가 “응급의학이 뭡니까?” 박제황 선생님 왈, “나도 몰라.” 박제황 선생님이 내가 1년간 하는 것을 보니까, 잘할 것 같다고. 그래서 이제 박제황 선생님이 권하니까 고민을 했죠. 응급의학이 뭔지도 모르고.


그래가지고서 응급의학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 안 한다를 말하니까. 도서관 가서 응급의학이라는 자료를 찾아봤어요. 근데 응급의학과가 없으니까 아무 자료가 없지. 그래 가지고 외국 저널 막 뒤지다 보니까, 미국 저널에 미국 학회 명단이 쫙 나와 있는 페이지가 있었어요. 거기에 보니까, Emergency Medicine이 있는 거야. 텍사스 주소였어요. 근데 그때 당시 이메일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니까, 거기 보니까 Fax 번호가 있더라고. 당시에 국제 Fax는 요금을 따로 받았어요. A4용지 한 장당 5천 원이었어요, 그때 비용으로.


그래서 많이도 못 보내니까, 한 장에다가 딱 3가지 질문 써서 보냈어요. 위에 나에 대한 소개 간단하게 하고. 첫 번째, 응급의학이 뭐냐? 두 번째, 전문의 제도 있냐? 세 번째, 월급은 얼마나 되냐? 이렇게 해서 3가지 질문을 보냈어요. 근데 그때 감동받은 게, 그때 미국에서 한 보름 정도 지났는데, A4용지 한 박스로 자료가 왔어요. 근데, 거기서 또 재밌었던 게, “응급의학이 뭐냐고 물어보는 한국인 의사는 네가 처음이다”라고 답을 받았어요.


그래서 쭉 보는데, 그런데도 전문의 제도가 없으니까. 이걸 해야 할지 엄청 고민을 했죠. 그런데 이제 주변에 아는 분들한테 좀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이게 언젠가는 우리나라 상황 상 전문의 제도가 생기니까 해라. 대신에 시간을 투자하고 고생은 하겠지만, 지금 시작을 하면 나중에는 괜찮을 것이다"라고 말을 듣고도 고민을 하다가, “그럼 해보자”하고 시작을 하게 됐는데. 그게 2월 초에 결정을 했어요. 박제황 선생님한테 가서 하겠습니다 하고 하는데.




Q 그럼 국내에 응급의학과 교과서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공부하셨나요?


A 응급의학이 뭔지는 알아야, 기본 개념이라도 있어야 뭘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책을 찾는데, 그때는 이제 우리나라 저작권이나 좀 허술했던 시절이니까, 복사판이 많이 다녔어요. 복사판을 구한 게, Emergency Medicine Treatment라고 해서 EMT A 하고 I를 위한 책이었는데, 그때는 EMT란 것도 몰랐고 EMT A가 뭔지 EMT I가 뭔지도 몰랐고. 하여튼 그 책을 구해서 봤어요. 응급 처치에 대한 수준이 나오는데, EMT가 뭔지를 몰랐으니까, “왜 이렇게 수준이 낮아, 처치하는 내용이.” 이렇게 생각하고. 대신에 그 책을 통해서 EMT 하고 EMS라는 그런 개념을 잡기 시작했어요. 근데 이게 의사들을 위한 책은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의사들을 위한 응급의학 교과서는 뭐가 있나. 그때 틴티넬리라는 것은 몰랐어요. 근데 보니까, 로젠 선생이 쓴 책의 복사판이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그걸 사서 보면서, 그때 첫 번째 챕터가 Life and Death였어요. 그 Life and Death가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모르니까, 아침에 박제황 선생님하고 나하고 둘이 앉아서 그 책을 읽은 거예요.


한 단락 읽고 박제황 선생님한테 “선생님, 이 단락은 이 뜻 같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아니야, 그 뜻 아니야.”“아니에요, 이 뜻이 맞아요.” 그럼 선생님이 또 “아니야 그 뜻 아니라니까.”“아닌데요.”“그냥 넘어 가자” 이러면서. 왜냐하면 박제황 선생님도 외과를 하신 분이니까. 우리는 외과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전 영역을 다 다루잖아요. 박제황 선생님은 모르시잖아. 나도 모르는 입장에서 시작한 거고. 그래서 둘이 읽으면서, “이거는 이 뜻 같은데” 확신은 못 하고 그냥 읽고만 넘어간 거예요. 그러면서 한 명, 한 명을 보면서 “아 그때 그게 이거였구나.”


그리고 잘 모르는 부분은 다른 과 전공의들이 이런 환자가 왔을 때, 그 환자한테 어떻게 오더를 내고 어떻게 처치를 하나 곁눈질로 배운 거죠. 그러다가 정 모르겠으면, 다른 과 스텝한테 좀 물어보면, 자기 과 전공의는 뭐라고 했을지 몰라도 타 과에서 물어보니까 잘 가르쳐 주시더라고. 그렇게 하나하나 하고.


그때 같이 있었던 게 신촌 세브란스, 원주 세브란스, 영동 세브란스, 강남 성모(현재 서울 성모). 이 사람들하고 91년 가을 학회 때 처음 만났어요. 그래 가지고 서로 연락처를 알았으니까, 환자를 보다가 잘 모르겠으면, 전화를 하는 거예요. 그때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니까, 시외 전화로 “혹시 이런 환자 본 적 있냐” 본 적 있다고 그러면 처방을 어떻게 해줘야 하냐고. 근데 다들 초창기이니까 서로 경험이 일정하니까, 여기저기 다 모른다고 그러면, 그때부터는 할 수 없이 환자를 앞에다 두고 책 갖다가 펼쳐서 뒤져서 이렇게 시작을 했어요.




Q 선생님 같이 시작하셨던 분들이?


A 장석준 선생님. 그다음에 이원재 선생하고 김성중 선생. 셋이 같이 시작한 거였지.




Q 누구한테 전화를 많이 하셨어요?


A 그때 누구한테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응급실로 전화를 해야 하니까. '그 날 누구든 하나 걸려라.'라는 식으로 전화를 했죠. 그래서 우리 김성중, 이원재 선생은 서울 쪽에 있다 보니까, 그게 좀 빨리 되어서. 학회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레지던트 등록이 됐고. 나는 지방에 있으면서 그게 좀 늦어서, 등록이 좀 안 됐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나는 1년 차를 2년 한 거죠. 그리고 나서 신촌에 최옥경 선생하고 김옥준 선생. 그다음 영동에 송근정 선생. 원주에 안무업 선생. 강남 성모에 박규남 선생하고 황주일 선생. 처음에 이렇게 시작을 했지.




Q 그러면, 응급실에 1년을 근무를 할 때나 전공의가 돼서 하는 일이나 똑같았겠네요? 단지 컨퍼런스를 했다는 차이만 있고? 마음가짐도 조금 달라지셨나요?


A 당연하죠. 왜냐하면 그때 응급실에서 1년 촉탁의로 있을 때에는 내 할 거 하고 그냥 떠났는데, 레지던트가 되니까 내 뒤에 아무도 없고. 박제황 선생님 계셨지만, 외과 외에 다른 부분도 모르시고 행정 업무도 맡고 하니까, 24시간 온전하게 응급실을 나 혼자 지켜야 되는 거예요. 그때 당시에 아무도 없으니까, 의국도 없고. 그러니까 응급실 스테이션이 일터이자 숙소이자 식당. 그래서 환자를 보다가, 새벽에 환자 별로 없으면, 스테이션에서 엎드려 자거나, 스테이션 코너에 주저 앉아서 자다가 간호사들이 환자 왔다고 깨우면 또 보고. 그랬던 시절이죠.




Q 한 달에 몇 번 정도 집에 가셨던 것 같으세요?


A 한 달에 한 번도 못 갔죠. 레지던트 4년간 24시간 병원에 있었어요. 대체 인력이 없으니까. 다만 밖에 나오는 것은 학회 갈 때. 학회 갈 때는 데리고 가야 하니까, 그때는 내과 레지던트들이 임시 파견 나와있고 하니까 그때만 교수님이 내과 스텝한테 얘기해서, 그때만 내과 레지던트들이 응급실 커버하고. 그때 비로소 병원 밖을 나가는 거죠. 그때 당시는 의국비나 그런 것도 없고, 병원 지원도 없고. 그때야 제약 회사 이런 곳에서 서포트를 해주는 시절이었지만. 보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회식하자고 그러면 박제황 선생님하고 나하고 병원 앞에 해장국 집 가서. 박제황 선생님은 순대 국밥, 나는 콩나물 국밥. 딱 그거 밥 먹고 들어오는 게 회식이었어요.




Q 선생님이 혼자 계시다가, 유수진 선생님 이재규 선생님. 두 분이 들어오신 건가요?


A 그렇죠.




Q 들어오셨을 때 되게 좋으셨겠어요?


A 그럼요 근데 어차피 사람이 없으니까, 다 같이 집에 못 가던 시절이니까.




Q 들어올 때 뭐라고 하셨던 것 같으세요?


A 뭐 특별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냥 엄청 힘들다.




Q 혹시 오라고 당기셨나요?


A 아니요.




Q 지금은 들어오라고,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하잖습니까. 그런 게 전혀 없었나요?


A 지금이야 그렇게 됐지만, 그때는 전문의 제도나 그런 것도 없었고 비전도 없고. 솔직히 나 조차도 응급의학이 뭔지를 잘 모를 때니까, 누구한테 하라고 권유하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Q 그럼 사람이 한, 두 명씩 늘어나고 나서 근무나 컨퍼런스는 달라졌나요?


A 비슷하죠. 왜냐면, 사람 자체가 없고. 응급실을 24시간 지키다 보니까, 지금과 같은 세팅된 이런 컨퍼런스 할 여건이 안 됐죠. 우리끼리 일주일 단위로 교과서를 갖다 놓고, “이 챕터를 공부해서 다음 주에 서로 발표해보자.” 이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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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원광대는 탑다운 방식이라, 다른 과에서 응급의학과에 대한 인식이랄까요? 이런 게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A 예를 들어서, 신촌 세브란스는 워낙 시니어 스텝들이 많으니까. 좀 우리보다는 많이 치인 것만 알고 있어요. 근데 원광대 같은 경우는 스텝들이 다들 젊었어요. 그때 당시에 신설 학교니까. 그런 데다가 나름대로 박제황 선생님이 그때 당시에 나이는 많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외과 주임 교수가 버티고 있고. 그러니까 각 과 스텝들이 대놓고 뭐라고는 못 하고. 대신에 24시간 응급실에서 부딪히는 것은 우리들하고 타과 전공의들하고 이러니까. 타과 전공의들하고는 많이 부딪혔죠.


그래 가지고 황당한 얘기지만, 그때는 전공의들끼리 주먹 다툼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도 타과 전문의들이 뭐라 그러고, 당시에 우리나라 조폭들이 많았어요. 건달들이 하도 와서 깽판 치고 그러니까, 내가 응급실에다가 빨간 벽돌 세 장하고 야구 방망이를 갖다 놨어요. 그래서 나는 그런 개념을 가졌죠. 일단 응급실로 온 환자는 내가 하고서 옮겨주기 전까지는 응급의학과 환자다. 이 생각을 가지고 하는데, 애들은 그런 개념이 없는 시절이니까, 처음부터 왜 인턴이 레지던트 콜 하듯이 안 하냐고.


그래서 와서 “왜 우리 환자 니들 마음대로 보고 검사하고 그러냐?”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멱살 잡고 두드려 패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타과 레지던트보다는 내가 연배가 좀 높았어. 다른 대학도 다니고, 군대 갔다 와서. 지금으로 얘기하면 수능 시험을 다시 봐서 의과 대학 들어갔으니까, 타과 4년 차보다 내가 더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타과 레지던트가 뭐라 뭐라 그러면, 끌어다가 두드려 패고.


그다음에 애들이 자기 과 스텝한테 일러요. 그러면 타과 스텝이 박제황 선생님한테 뭐라 그러면, 박제황 선생님이 “야, 너 어젯밤에 또 사고 쳤냐?” 그러면, “아니 짜식이 싸가지 없이 이러잖아요, 그래서 손 좀 봤습니다.” 그러면 박제황 선생님이 해당과 스텝한테 “야, 얘기 들어보니까, 애들이 형한테 까불었다더라. 형한테 까불면 맞아도 되지 않냐?” 이런 식으로 하면서 무마시키고, 그랬던 시절입니다.




Q 박제황 선생님하고 몇 년 차이 나시죠?


A 10년.




Q 1회로서 책임감이 되게 많으셨겠어요. 그것 때문에 싸우신 적도 있으시죠? 후배들 지켜주시느라고?


A 그런 부분도 있고. 1회로서 책임감을 얘기하시니까 그런데. 그때 우리가 처음 서로 모여서 그런 얘기도 많이 했어요. 모이면 울분 토하는 거지 뭐. 각 병원에서 했던 거 울분 토하면서 그때 우리가 약속했던 것이 있어요. 나중에 세월이 지나서, 후배들한테는 이런 서러움 물려주지 말자.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짐하고.


그러면 우리끼리 앞으로 관계를 잘 가져가야 된다고 해가지고, 신촌 세브란스 응급실 밑에 작은 호프집에서, 최옥경 선생이 “우리 물들레 회라는 것을 만들자”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물들레라는 말이 한국 고유어인데. 돌을 던지면 물이 퍼져나가는 그런거 서로 원만하게 잘 가고, 지속되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기로 했었는데.




Q 이게 재밌는 게요 선생님, 선생님도 물들레 이야기를 하시고 정호성 선생님, 이원재 선생님도 이야기를 하시는데. 정작 최옥경 선생님이 그걸 몰라요.


A 정호성 선생은 물들레라는 이야기를 건너 들은 거고, 처음 물들레 이야기를 할 때, 1회 10명도 다 안 있었어요. 6, 7명 있으면서 얘기를 한 거니까.




Q 최옥경 선생님이나 송근정 선생님은 홍일점으로서 모임에 활력소이셨겠어요. 워낙 성격도 화끈하시고?


A 그때는 누가 활력소다 이런 것을 떠나서, 서로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10명끼리 의지하지 않으면, 어디 없었어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어도 어디 상의할 수도 없고. 의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고. 그래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어요.




Q 이제 5년 수련의 끝나셨어요. 전문의 시험이 없었잖아요. 서운하셨겠어요?


A 그때 당시 96년 2월에 우리가 첫 시험을 봤잖아요. 근데 전문의 제도가 95년 4월에 결정이 됐는데, 사실 94년도에 한 번 시도를 했죠. 신설 전문의 제도를 만들려면, 기존 전문 과목 학회의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해요. 예방학회하고 산부인과 학회만 응급의학과 전문의 과목 만드는 것에 동의를 했고, 나머지 과는 다 반대를 했어요.




Q 왜 그랬을까요?


A 그중에서 제일 결사반대했던 과가 내과라고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때 이런 얘기가 좀 돌았었어요. 응급의학과가 처음에는 미흡하지만, 나중에는 응급의학과가 세월이 지나서 발전을 하면 응급실을 개업을 하면서, 응급실 하고 거기하고 합쳐서 가고 나면, 자기네들은 죽는다. 이런 얘기가 들려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94년도에 그게 좌절이 되면서, 이게 우리 하나만 가지고 안 되겠다. 그래서 그때 이제 학회 분들이 핵의학과 하고 산업의학과 이것을 서로 연결해서 해가지고. 핵의학과니까 내과 쪽 갑상선 하시는 분들은 핵의학과 이쪽이니까, 그렇게 해서 인정이 되가지고 96년에 시험을 보게 된 거죠.


근데 그러다 보니까, 미리 트레이닝 4년을 마친 사람들이 전문의 시험을 못 본 거죠. 그러니까 전문의 자격증이 없으니까, 대학에 남을 수가 없는 거예요. 레지던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텝도 아니고. 그래서 못 남고 떠돌았죠. 근데, 그때 당시 처음에 레지던트 수료를 하고 어디 갔었냐면, 부산 침례 병원에 갔었어요. 부산 침례 병원에 가게 된 이유는 그때 당시 부산 침례에 응급의학과가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레지던트 1, 2, 3년 차 까지 있었어요. 94년 10월에 부산 침례 병원에 응급의학과장으로 있던 사람이 황정연 선생님이에요. 황정연 선생님이 있었는데, 10월에 갑자기 NMC(국립중앙의료원)로 가신 거예요. 근데 레지던트는 1년 차까지 뽑아 둔 상태에서 갑자기 가신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거기가 텅 비니까, 그래서 내가 거길 가기로 했던 거예요.




Q 원래 부산에 연고가 있으셨어요?


A 없었죠. 이제 마쳤는데 어디 대학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러니까, 난 처음부터 대학에 남고 싶은 그런 생각으로 했는데. 그래서 부산을 갔는데, 가서 보니까 병원에서 전문의가 아니라 일반의 대우로 월급을 주는 거야. 수련을 마쳤지만, 전문의 자격은 없잖냐. 그러면서 월급을 주는데 타과 애들 반 밖에 안 주는 거야.




Q 얼마나 했었습니까, 그때 월급이?


A 다른 과는 한 500만 원 정도였는데, 그때 난 한 230 받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왜냐하면 중소 병원이니까. 그래 가지고 거기 있으면서 보니까, 처음엔 황정연 선생님을 욕을 좀 했죠. 어떻게 레지던트를 남겨 두고 자기 혼자 도망가냐. 근데 가서 몇 달 근무하면서, 황정연 선생님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 거예요. 가서 보니까 레지던트들이 출근을 안 해요. 응급실에 근무를 안 해. 그래서 다 모아 놓고, “니들 아침 8시에 컨퍼런스 할 테니까 나와라.” 그래서 한 달 정도 컨퍼런스를 했어요. 근데 컨퍼런스만 끝나면 병원 밖으로 사라져.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병원장한테 얘기를 했어요. 얘들 다 잘라야 되겠다, 거기서 경고를 주고. 그래도 안 바뀌면 잘라야겠다. 그때 당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병원이 전공의나 이런 사람들을 전혀 관리를 안 했던 것 같아요. 응급의학과 전공의들이 아예 출근도 안 한다라는 것을 병원에서 모르고 있더라고. 그래서 병원에서 인사 위원회를 열어서 잘랐어요.


근데 새로 들어온 1년 차는 그나마 좀 착실하게, 자기 시간에는 나와서 일을 하고. 내가 그 친구한테, “네가 여기서 계속하겠다고 그러면, 나도 계속 여기 있고. 네가 이런 상황을 뜨겠다고 그러면, 근데 네가 응급의학과를 하겠다고 그러면, 내가 다른 병원을 소개해주마.” 그래서 그때 이대 목동 병원에 레지던트를 못 뽑았어요. 그래서 이제 정구영 선생한테 보냈죠.


나는 원장님한테 “내가 전공의들 때문에 여기 왔는데, 이제 전공의들이 이렇게 되고 그러니까 난 여기 있을 의미가 없습니다.” 대신 내가 당장 나간다고 그러면 응급실 아무도 없고 예의도 없고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내가 한 달 동안 응급실을 지킬 테니까 한 달 안에 사람 뽑으라고. 그래서 한 달 동안을 응급실에서 먹고 자고 살았어요. 한 달 24시간 혼자 응급실 본 거죠. 그러고서 딱 한 달 되는 날, 내가 나가면 갑자기 응급실 비게 생겼으니까 병원에서는 월급 올려준다고 해도 나는 가겠다고. 그래서 딱 한 달 되는 날, 짐을 다 싸서 집으로 보내 놓고. 그다음 날 아침에 원장님 출근하시는데,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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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충남대학교 하고는 어떻게 인연이 되셨습니까?


A 나는 원래 여기가 고향이고. 초등학교부터 군대까지 여기를 나왔으니까, 집도 여기고. 그래서 충남대도 분명히 응급의학과라는 것을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응급의학과 모집 공고가 나면 1차적으로 원서를 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고 있다가 96년 2월에 전문의 제도가 생기니까.


국립대는 전문 과목 인정이 안 되면, 과를 만들 수 없어요 제도상. 그래서 모든 국립대가 96년 이후에 생긴 거예요. 예를 들어, 서울대 같은 경우는 외과와 관련된 응급의학과였다가, 응급의학과로 독립된 게 2003년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게 사립대와 국립대의 차이점이거든요. 국립대는 법적으로 전문 과목으로 인정이 안 되면, 과를 만들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96년 2월에 시험을 딱 보고, 뽑겠다. 그래서 이제 96년 7월에 모집 공고가 났어요. 그래서 원서를 냈죠. 그래서 96년 9월 1일 자로 여기로 온 거예요.




Q 혼자 오셨습니까?


A 당연히 혼자 왔죠, 아무도 없는데. 그때 당시 전문의 딴 사람이 51명이잖아요. 그중에 31명은 타과 보드 가진 그런 자리 잡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트레이닝 마쳤던 사람은 20명인데, 그중에 군대 가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실제 밖에 나온 사람이 몇 안 되죠. 근데 그때 서울 쪽에 병원에서 트레이닝받은 사람은 지방에 안 내려가려고 그러잖아요. 근데 나는 내 고향이니까 무조건 간다.




Q 사실은 수도권에 집중이 되어있었고, 지방은 수도권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았잖습니까. 근데 수도권 이외에는 선생님 혼자셨잖아요. 책임감도 막중하셨겠어요?


A 그때는 나도 잘 몰랐죠. 이제 모집 공모가 충남대학교로 모집 공고가 난 거예요. 그래 가지고 원수 접수도 대학에서 하니까, 원서를 내고. 오후 2시에 총장 면접을 보는 날이에요. 만약에 내가 되면, 병원에서 근무를 할 건데, 원장한테 미리 인사는 하고 면접을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침 10시에 원장실 뵈러 가서 들어가니까, 그 양반이 나를 앉혀놓고 3분간 아무 말도 안 하고 쳐다 보더라고요. 그래서 속으로 '이 양반이 왜 그러나.' 그랬더니 3분 있다가 첫마디가 “완전 똥배짱이네, 유선생이라 그랬어? 완전 똥배짱이야.”


깜짝 놀라서 무슨 말씀이냐고 물어봤더니, “오늘 오후 2시에 면접인데, 이제 인사를 와?” 그래서 나도 그런 것을 모르는 시절이니까, “충남대학교에서 뽑는다고 해서 거기다 냈는데, 미리 원장님한테 인사를 왔어야 하는 겁니까?” 그랬더니, 원장님이 황당하셔 가지고. “나는 유선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 누구한테 어떻게 알아보면 유선생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나는 “원장님, 죄송한데 무슨 과 전공이십니까?” 물어봤어요. 정형외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당시 원광대 원장님이 정형외과 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저 원광대에서 수료하고 했으니까, 원광대병원 원장님이 정형외과이십니다." 그러니까 “어, 나랑 트레이닝 동기야”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고. 그래서 그 원장님한테 여쭤보면 나에 대해서 얘기해주실 거라고 말하고 나와서 2시에 총장실로 면접을 보러 갔어요. 그랬더니, 원장님이 면접 위원으로 앉아 있더라고요. 그렇게 면접을 봤어요.


그런데, 그다음에 황당했던 게, 여기 와서 그렇게 응급의학과라고 했는데, 이게 응급의학과라고 해서 발령을 받아서 하는데, 보건소의 진료과 개설이 6개월 후에 되더라고요. 그래서 응급의학과가 진료과로 개설됐다는 것이 97년 2월에 보건소에 정식 등재가 됐고. 더 황당했던 것은 모집분야는 응급의학과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마취과 구급 의학 전공 파트로 뽑은 거예요. 그래 가지고 견제가 심했죠. 그때 당시에 마취과 주임 교수님이 욕심이 좀 많으셨던 모양이야. 내가 독립해서 교실을 만드려고 하니까,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갈 때 까지는 교실 못 만든다고. 내가 그 양반 정년퇴직하시고 나서 2004년에 교실 만들어졌어요. 그때까지는 그 양반 위세가 등등해서, 우리 의과대학 행정실에서 교실 만들어주려고 해도 못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또 여기서 처음 할 때도 각 과 스텝들이 타대학 출신이고, 응급의학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고. 그래서 처음에는 무지하게 하여튼 타과 스텝들이 갈궜죠. 그다음에 여기 처음 와서도 레지던트를 뽑을 수가 없잖아요. 아무도 없으니까 아침 출근은 정해져 있어도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죠. 그래서 처음 여기 와서 어쩌고 해야 하니까 무조건 밤 12시 넘어서 퇴근을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3년째 되는 해에 전공의 한 명을 뽑을 수 있게 됐고.


그리고 그때 당시 김승환 선생이 군의관으로 여기 대전 국군군의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나도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응급의학이라고 해봐야 지방에 둘이니까. 같은 대전에 가까이 있고 그러니까, 가끔 술 마시면서 꼬셨죠. 같이 일 좀 하자고. 여기가 98년에 권역 의료 센터로 지정이 되고. 그러면서 98년 10월부터 응급센터에 독립된 건물을 짓기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까 사람이 필요하니까, 임상 교수 티오로 받았죠.


그때 당시 정성필, 하영록이 두 사람도 트레이닝 마치고 나와서 서울 쪽에서 자리를 확보 못 하고 있었어요. 그때 내가 파악했던 게 하영록 선생은 임상 쪽에 강하고, 정성필 선생은 연구 쪽에 강하고. 그래서 둘을 같이 해보자 해서 와가지고, 하영록 선생이 2년 반인가 있다가 와이프가 영동 세브란스에 있었죠. 그러다가 부장 진급 뭐에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만약 부장 진급에서 떨어지면 와이프하고 이쪽으로 내려오고, 진급되면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했는데 진급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영록 선생님 분당으로 갔고.


그러면서 정성필 선생이 여기 있다가 지금 돌아가신 김승호 선생님이 한 2년 정도 있다가 저를 찾아왔어요. 이렇게 티오를 받아서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지금 자격 요건이 맞는 게 세브란스 졸업생 중 정성필 선생 밖에 없어서 좀 데려가야 되겠다. 이해 좀 해달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죠. “정성필 선생이 가겠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잡겠습니까.” 정성필 선생이 이제 세브란스 가게 되고 그래서.




Q 다 모두 서로 연결이 되어 있네요, 초창기라서 그런가?


A 그렇죠. 그리고 우리는 초창기 때 학회에 가면, 사람 몇 명 안 되니까 무조건 논문 발표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 전공의들 시험 보기 위해서 논문 한 편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레지던트 때 논문 8편씩 썼다니까. 왜냐하면 사람이 몇 명 안 되니까 전공의들이 발표를 하라 하면, 무조건 발표해야 해. 그런 식으로 학회를 했죠. 그리고 사실 논문 쓰는 법이라든지 통계라든지, 누가 뭐 가르쳐 준 사람도 없고.


그때는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니까. 2년 차 때 컴퓨터가 매킨토시가 돌아다녔고. HP가 우리나라에 안 퍼져있을 때에요. 그래서 무지하게 비쌌어요. 의국에 갔다 놓고 하는데, 통계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데이터가 한 200개 정도 되면, 오늘 돌려놓고 내일 와야 결과가 나오는.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지금처럼 power point가 있었어요? 그냥 타자를 쳐서 줄 긋고. 사진도 찍고. 그리고 학회를 가면 전공의 중에 누구 하나는, 주로 그때는 전부 숫자가 몇 안 되고, 학회 돈도 없고 할 때니까. 전부 학교 강당에서 학회를 했죠. 그러면 개최하는 학교의 전공의가 앉아서 “다음 슬라이드”하면 바꿔주고 이거 하던 시절이에요.




Q 선생님께서는 주로 처음 시작하는 병원에만 계속 계셨네요.


A 그렇죠. 원광에서도 처음, 침례에서도 처음, 여기서도 처음, 아주대에서도 처음.




Q 충남대라고 생각하면, 이게 응급실이 안정화될 때까지 어느 정도 걸렸던 것 같나요?


A 일단 응급실에 처음 여기 왔는데. 처음 와서 이틀째 되는 날이에요. 바로 intubation(기관삽관) 해야 하는 환자가 왔어. "intubation 합시다." 하니까 간호사들이 준비를 해 줬는데, 튜브만 달랑 가지고 왔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intubation 하는데, 거의 한 30분 가까이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 가지고 보니까, 전혀 교육이 안 되어 있더라고.


그때 당시에는 인턴밖에 없던 시절이잖아요. 우수한 인턴이 어떤 인턴이냐면, 환자가 왔을 때, 레지던트를 부르지 않고 환자를 잘 꼬셔서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내가 처음 오니까, 응급실에 환자가 5000명이 안 되더라고, 1년에 환자가. 아니 그래서 이게 말이 되냐 어떻게 이렇게 숫자가 적냐. 그래서 파악을 해보니까, 환자를 다 보내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보내면 죽인다고, 못 보내게 했어요. 근데 내가 있을 때는 못 보내고, 없으면 보내고. 그렇게 하니까 1년 만에 환자가 더블이 됐어요, 그렇게 했는데도.


간호사들 교육시키고 그렇게 해도 역시 인력이 보충되지 않으면 안정화가 안 돼요. 그렇게 해가지고, 어느 정도 그래도 밤에도 커버되고. 레지던트가 들어와요 결국에는. 아니면 레지던트가 없으면, 야간에도 커버될 수 있는. 그렇게 되니까, 매년 환자가 더블로 늘더라고. 그러면서 숫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도 커지고.


그때부터는 응급실 근무하는 사람들 전체적인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이 사람들이 이제 한 번 교육을 해 놓으면, 그 후배들 들어와도 계속 교육이 인수인계가 되잖아요. 그러면서 각 과에서도 자꾸 브레이크 거는 것도 조금씩 줄고. 그래서 완전하게 어느 정도 안정권으로 돌아간다 하는 게 4, 5년 걸리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좀 빠를 겁니다. 근데 그때는 사람 자체가 없으니까, 그 인력이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정도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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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맨 처음 시작하셨을 때, 응급의학과를 본인도 잘 모르신다고 얘기를 하셨다고 했는데, 전문의 면허를 받은 후에 생각해보시니 응급의학과가 무엇이던가요?


A 응급의학과가 뭔지 전문의 받고 나서도 잘 몰랐죠 솔직히. 그때도 그냥 거의 뭐 독학하다시피 한 거고. 외부에 접할 기회도 잘 없었고. 외국 학회나 이런 것도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솔직히 그때만 해도 응급의학이 응급실에서 좀 더 전문적으로 경험해 본 사람이 환자 보고. 응급 의료 시스템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개념이 있었어요. 그래서 119나 교육시키고 해서 시스템을 좀 만들고.




Q 양영모 선생님이 전공의로 들어오실 때, 뭐라고 설명해 주셨습니까?


A 특별히 응급의학이 뭐라고 설명은 안 했고. 양영모 선생님이 여기서 인턴을 했는데, 응급의학과를 하겠다고 찾아왔어요, 본인이 먼저. 그래 가지고 “너 힘들 텐데, 그리고 솔직히 열악하고. 그래서 보드 따도 대접받는 것은 기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현실을 이야기했죠. “그래도 할 생각 있으면 해 보자.” 그렇게 해서 양영모 선생님 들어오고 같이 컨퍼런스도 하고 하면서, 사실 제자지만 동기 같은 제자죠.




Q 그러면 올해 들어온 1년 차들한테는 뭐라고 말해주셨나요?


A 지금은 응급의학을 했을 때, 여러 가지 사회적인 진출 이런 분야라든지, 다른 과하고 우리의 차이점. 그리고 응급의학 의사로서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보람을 얘기해주죠.




Q 성형외과 할걸. 이렇게 후회 안 하셨어요?


A 음, 그때 원래 성형외과 하려다가 못 했으니까 아쉬움은 있었죠. 근데, 응급의학을 하면서는 잊어버렸어요.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길이고. 내가 가야 할 길은 이거니까. 죽으나 사나 여기서 결판을 봐야 하니까.




Q 만약 다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성형외과와 응급의학과 중에?


A 만약 내가 원하던 재건 성형을 할 수 있다면, 그쪽을 할 것 같아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응급의학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고. 또 둘 중에 선택하라면 그러겠지만, 만약 그걸 못 할 경우에는 응급의학을 다시 할 것 같아요. 응급의학이 참 매력이 있는 게, 오히려 응급실에서 수많은 사연들을 접하면서 환자들한테 내가 내 인격을 수양하는 도장이다. 왜냐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는 공간이고. 또 워낙 다른 과 의사들은 접하지 못하는 다양하고 여러 가지 사연들을 접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인생의 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좀 많이 배우는 장소고, 나의 어떤 성격적인 부분에도 많은 변화를 주는 그런 장소인 것 같아요.




Q 응급의학과 멋있는 과인가요?


A 멋있다고 하는 개념이 어떤 의미에서 멋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화끈한 과다.




Q 응급의학과 힘든 과입니까?


A 응급의학과는 힘든 과라고 생각 안 해요. 자기가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면, 힘들지 않을 거고. 재미없고 억지로 먹고살기 위해 하면 힘들 거고. 우리가 예전에 이런 서러움을 후배들한테 물려주지 말자고 얘기했던 것이 뭐냐 하면, 외국 여러 나라에 대해 스터디를 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라이프 스타일을 굉장히 즐길 수 있는 과에요. 그런 점에 있어서 응급의학과가 난 매력 있다고 생각해요.




Q 선생님은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십니까?


A 우리는 즐기지 못했죠. 그럴 기회가 없었죠. 왜냐하면, 첫 시작부터 그런 라이프 스타일을 즐길 연배가 됐을 때는, 이미 힘이 없는 라이프가 돼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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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주 친한 후배가 있다면, 응급의학과를 권유하시겠어요?


A 나는 권유를 해요.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뭐냐 하면, 처음에 우리나라 응급의학과 전문의 제도가 안 되고 했을 때, 우리가 전문의가 언제쯤 될 거냐. 어느 과가 학회가 생기고 전문의 제도가 되는 데까지 얼마나 걸렸냐. 대부분 말씀드린 것처럼 국립대는 전문의가 돼야 과를 만들 수 있으니까. 주로 모든 과들이 사립대학에서 먼저 만들어진 거예요. 주로 연세대나 가톨릭 대. 이런 데서 먼저 만들어지고서.


그중에 제일 빨랐던 게 가정의학과였어요. 8년 걸렸어요 가정의학과가. 그래서 우리도 그 정도는 기다려야 되겠다. 근데, 우리가 7년 만에 전문의가 나왔잖아. 된 것은 6년 만에 된 거고. 우리가 전문의 제도의 기록을 깬 거죠. 제일 빨리 됐고. 난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가정의학과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가정의학과는 대학에서 자리를 못 잡고 있지 않냐. 그 이유가 발판이 없다. 근데 우리는 대학 병원이든 어디든 병원 내에 응급실이라는 땅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다가 집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이 들겠지만 언젠가는 여기다가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응급의학과는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난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보면, 전체적으로 한 30년 걸릴 것이다. 왜 30년을 얘기했냐면, 결국에 트레이닝받을 때 응급의학을 접해보지 않은 교수들은 정년퇴직할 때까지도 응급의학을 이해를 못 한다. 그러면 응급의학과가 만들어진 병원이나 대학에서 학교를 다니고 트레이닝받은 사람들이 각 과 전문의가 돼서, 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니어나 주니어 선임 될 때 되면, 응급의학과에 대한 이해가 늘 것이다. 그래서 30년이 걸린다라고 얘기했었어요. 내가 그때 30년 얘기한 것은 그냥 막연하게 30년 얘기한 게 아니라, 외국에도 나가보고. 그런 처음 과정들을 다른 과라든지, 다른 나라에서의 과정을 살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30년을 얘기했던 건데, 그게 맞은 것 같아요.




Q 3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2000명이 나왔고요. 말씀하신 땅에다가 집을 짓는다고 치면, 얼마나 지었나요? 다 지었나요?


A 나는 이렇게 봐요. 우리나라 응급의학 단계를 쭉 보면, 94년에 응급의학 법률이 만들어지기 전 까지는 진짜 황무지라고 봐요. 94년에 법이 만들어지고 96년에 우리 전문의 나오고. 이게 뭐냐면 집을 짓기 위해서 불도저로 땅을 밀어 놓았어요. 기초 공사도 아니고 토지 정리만 된 거예요. 그러고서 한 2000년도까지는 여인숙을 지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이제, 2010년 정부에서도 응급의료에 대한 그런 것을 했잖아요. 그래서 2010년 이렇게는 모텔이 지어졌다.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무궁화 두 개나 세 개짜리 호텔까지 왔다고 생각을 해요. 앞으로 가야 할게 7성급 호텔을 지어야죠. 근데 그건 우리 후배들이 해야죠.




Q 1기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계십니까?


A 지금 현재로서는, 우리도 정년퇴직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과거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선배로서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오기까지 모든 과정에 대해서 후배들한테 좀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서 후배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 후배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7성급 호텔까지 가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과거의 경험,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길 같은 것.


미래를 길게 보고, 당장 앞에 월급 그런 것 말고. 5년, 10년 길게 보면서 전체 응급의학과의 학회와 응급의학이 살아야, 나도 산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마인드. 그리고 우리가 어디든 그렇잖아요. 한 군데 진득하게 붙어있어야, 그 위치에서 바랄 것도 생기고 욕심도 생겨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 선배로서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나요. 경험을 전수하고 조언해 주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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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제 이재규 선생님은 하루에 6시간만 일 할 수 있다고 해서 응급의학과를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A 나는 그런 얘기 한 적은 없고, 박제황 선생님이 그렇게 꼬셨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지는 않고요. 이재규 선생님은 당시에 매형이 원광대 피부과 교수였어요. 그래서 이재규 선생님이 인턴 마치고 바깥에서 떠도니까, 매형이 데려온 것도 있어요.




Q 어제 이재규 선생님이 조폭 얘기를 많이 해주시다가, 나머지는 선생님한테 들으라고. 조폭 리스트 관리를 선생님이 다 하셨다고?


A 당시에 익산이 인구가 20만 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동네가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몰라도, 애가 고등학교 다니는데 공부를 못하면, 밥 먹고 살기 어려울 거다. 그래서 덩치가 좀 괜찮고 공부는 못하면 아버지가 조폭 세계로 아들을 끌고 간다고 했던 정도의 동네예요. 근데 그 좁은 동네에 여러 파가 막 있었어요. 징글징글했죠.


그래서 조폭들하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사시미 칼 들고 온 놈도 있고. 나는 옛날에 깁스 만들 던, 큰 가위로 한 번씩 찌르자라고도 하고. 그다음에 메스 들고 “조폭이 되가지고, 우리 사이좋게 마주 보고 서서 하나, 둘, 셋 하면 한 번씩 찌르자. 너는 그 사시미로 나 죽이려면 몇 번 찔러야 하지만, 나는 이거 하나로 한 칼로 죽일 수 있다고.” 조폭들이 얘 의사 맞냐고 그러면서 칼 던지고 갔어.


한 번은 나한테 형님, 형님 하던 놈들인데, 군산 백악관이라고 미군 상대하던 그 녀석들이 술에 떡이 되가지고. 얼마나 두드려 팼는지 퉁퉁 부어서 온 거예요. 그래서 응급실에 내 던지고, 안에서도 계속 패더라고. 내가 그 놈들 아니까, “병원 왔으면, 인마. 형 앞에서 계속 그럴래?” 그랬더니 걔가 술 취해서 나를 두 대 때렸어. 근데 그게 일요일이었어요. 다음 날 아침에, 그게 4월 중순쯤이야. 다음 날 박제황 선생님이 출근을 하셨는데, 내가 안 보여. 그러니까 박제황 선생님이 내가 드디어 못 견디고 도망갔나 보다. 진짜 도망갔으면 어떡하지, 불안한 거야. 그래서 말도 못 하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점심 때도 안 나타나니까, 간호사들한테 우리 유선생 도망갔냐고 물어 본거야. 그래서 간호사들이 “아니요, 어제 이런 일이 있어서.”


그래서 한 1주일 지나니까 몸을 좀 움직이겠더라고. 근데 얼마나 열 받아요. 그때가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인데, 그런데도 조폭끼리 칼싸움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맨날 응급실 오니까, 걔들한테 “나 24시간 응급실에 있는 사람이니까, 응급실 와서 다른 직원들 괴롭히지 말고 무조건 나 찾으라고.” 그렇게 해서 친하게 지냈는데, 몇 대 맞았잖아. 몸 좀 추슬르게 돼서. 이제, 중앙동파 황 뭐시기라고 있어요. 걔한테 칼 하나 빌려달라고 빌려서, 군산 백악관 쳐들어갔어요.


그때 당시에 24살밖에 안 된 놈이 두목이었는데, 형이 청와대 하고 관련이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가 가지고 칼 꽂아 놓고, “오늘 죽기 살기로 해보자.” 얼마나 우스웠겠어요. 씩 웃으면서 “형 왜 그래요.” 그러더라고. 너 나한테 형이라 그랬지, 네 동생들이 나한테 와서 이랬다고. 교육 좀 똑바로 시키라고 하니까, “형, 내가 알아서 할게. 여기까지 오셨는데, 술이나 한 잔 드시고 가요.”


그래서 술 얻어먹고 응급실에 다시 왔는데. 30분 정도 지났는데, 응급실 앞에 세단 2대가 서더니, 두 놈이 내동댕이 쳐지더라고. 그래서 나가보니까, 걔네가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얼굴을 못 알아보겠다고. 근데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형님, 살려주세요” 그러는 거야. 그때도 조폭끼리 그런 줄 알고 그랬는데. “형님, 지난주에 저희가 술 취해서 실수를 저지른 모양인데, 저희는 기억도 못 합니다. 형님이 용서해주셔야 저희가 삽니다.” 그래서 “야, 용서해줄게. 근데 그때 니들 그러는 바람에 우리 응급실 간호사들 놀라고 난리 났었다. 그래서 간호사들한테 가서 용서해준 다는 거 받아와. 그러면 내가 써줄게.”


근데 간호사들 얼마나 무서워요. 그래서 와서 “형님, 누님들한테 사죄했습니다” 그래서 “야, 그건 됐고, 환자 보호자들도 놀래고 난리 났다. 이분들한테도 용서받아라” 그랬더니, 얘네가 갑자기 응급실 한가운데 서가지고 “저희는, 군산 백악관 파 누굽니다! 지난주에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랬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 다 놀라서. 그래서 빨리 내려오라고 하나 써줬지 용서해주라고.


그랬더니 여기 와서도, 참 그 인연이 이어져요. 여기 와서도, 앞에 건달들 많이 타고다니는 차가 구급차 서있는 곳 앞에 몇 일째 서 있는 거야. 그래서 청원경찰에게 구급차 세우는 곳에 왜 저 차가 서있냐고 그랬더니, “신경 쓰지 마세요. 교수님, 저거 건달들 차예요.” 그래서 어디 파냐고 물어봤더니 유성 무슨 파래요. 대전 사거리 그쪽 패거리. 그래서 잘 됐다 그러면서 그 차를 내가 부셔 버렸어. 야구방망이로 유리창하고 막 다 깨버렸어. 그랬더니 우리 청원경찰들이 놀래고, 건달들은 쫓아 내려온거야. 그래서 “너네 족제비 파라매? 나 이름 이거니까, 대전 사거리에 전화해서 큰 형님 여기 와있다고 그래라. 그리고 차는 청구해. 근데 분명히 대전 사거리에 전화해라."


그다음부터 누가 와서 행패만 부리면, 청원경찰들이 날 찾는 거야. 그런 데다가 대전 교도소 재소자들 다 우리 병원으로 와요. 근데 재소자가 한 번 왔는데, 교도관이 5명 따라오거든. 탈장으로 온 거야. 딱 보니까 나이 젊은 놈인데, 주소가 군산시 나온동 어쩌고 그래. 근데 거기는 백악관 이거든 다. 그래서 “백악관이냐?” 그러니까 깜짝 놀라는 거야. “저희를 어떻게 아세요?” 그래서 두목 이름 말하면서 그놈 잘 있냐고 그랬더니, “저희 큰 형님 아세요?” 그래서 “그놈이 날 형님이라고 부르니까, 혹시라도 그놈 소식 전해오면, 큰 형님 원광대에서 충남대병원으로 옮겨서 근무하고 있다고 그래라.”


그러면서 이제 “백악관은 인마, 이 정도는 참아야 돼. 어금니 물어.” 찍소리도 못하고. 그랬더니 교도관들이 나보고 의사 맞냐고, “우리 교도소에서 아주 골치 아픈 놈인데, 뭐라고 하셨길래 꼼짝도 못 해요?” 그래서 “그런 게 있어요” 그랬지. 내가 하여튼 조폭들과의 무협지를 쓰면, 무협지 소설을 씁니다. 진짜 사연 많아요.




Q 이재규 선생님께서, 술만 먹고 있으면 안주가 이렇게 쌓인다고?


A 건달 조직들이 대부분 룸살롱, 횟집 이런 것을 운영해요. 그래서 건달이 맨날 막 사고 치고 와서 그러면 나한테 미안하니까, 가끔 밤 12시쯤 돼서 가게 문 닫을 때, 횟감 같은 거 남은 거 있잖아. 그걸 회 떠서 가지고 와요. 응급실 와서 간호사들한테 “누님, 야식 배달 왔습니다. 이거 드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니까, 평상시에 걔들이 의리가 있어요. 걔들한테 술도 얻어먹고 많이 그랬죠.






Q (전공의 대책위원회) 데모 얘기도 좀 해주세요. 데모 얘기도 여러 곳에서 듣고 와서요.


A 처음에 전문의 제도가 생겨서, 전문의를 주겠다고 하는데. 처음에 엄청나게 인정을 해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어른들은 아마 그런 생각을 하셨겠죠. 처음에 많이 해서 세력을 좀 늘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우리 입장에서는 그때 당시 응급실장이라는 사람들은 사실 병원의 한 보직으로서 실제로는 응급실에서 일도 안 하는 사람이거든. 근데, 그런 사람들까지 전문의 자격을 주겠다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한 200 몇 명이 그러는 거야. 근데 분명히 우리는 수련의 마치고 나왔는데도 못 따서 기다리다가 하는데, 얼마나 열 받아요.


그래 가지고 그게 아마 93년인가 인천에서 학회 할 때인데. 그때 우리 10명끼리 강남 성모 지하 응급실 거기서 모여서 얘기하고 나와서 길 건너에 호프집 가서 우리끼리 작전을 짰지. 전문의 제도 남발하겠다고 하는 거 반대하는 뜻으로 학회 보이콧하자고. 우리 학회 아무도 참석 안 하는 걸로. 근데 가톨릭대 김세경 선생님이 회장 하실 때인데, 박규남 선생님 위에 이원재 선생님이 있지만. 이원재 선생님보다는 박규남 선생님이 가톨릭 그쪽 주도하는 그런 거였어요. 갑자기 “우리 선생님이 회장이신데, 학회까지 보이콧하는 것은 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학회 까지는 가야 될 것 같다.” 이러더라고.


우리끼리 합의가 된 게 그러면 학회는 가되, 학회 끝나고 뒤풀이를 학교끼리 안 하고 다 모아서 하재요. 근데 그때 길병원에서 하니까 이근 선생님이 배를 빌린 거야. 선상 뷔페를 준비해놨어. 근데 우리는 아무도 안 갔지. 아무도 안 가니까 어르신들이 놀러 왔다가 애들 왜 안 오냐고. 그러다가 보이콧한다는 얘기를 다 들은 거야. 그래서 뒤풀이는 없던 것으로 됐죠.


그러면서 우리끼리 돈도 없고 하니까, 여관 같은 곳에서 묵었다고. 길병원 연수원이 있었어요. 거기서 우리 최옥경 선생이 울분을 토했지. 1년 밑에 연차들하고 복지부에 쫓아가고. 그래서 이걸(전문의자격) 강화를 시켰어요. 트레이닝받은 사람은 시험 자격을 주고, 트레이닝은 아니지만 응급실장을 4년 이상 한 사람. 근데 두 사람이 문제가 있는 거야. 한 사람은 타과 전문의가 없어요. 근데, 미국에서 응급실 당직의사를 20년 넘게 하신 분이야. 이 선생님이 지금 우리나라 응급의학과 1번인데. 이 분하고 그때 당시 타과 전문의를 갖고 응급의학과 펠로우 1년 이상 한 사람도 자격을 줬어요. 이 두 사람이 원서를 낸거야. 근데 기준에 안 맞으니까. 왜냐하면 펠로우 한 사람은 5월 제대하고서 1년이 안 됐으니까. 그러니까 학회에서는 복지부에다가 의뢰를 한 거야. 복지부는 사람을 빨리 양성해야 하니까 그냥 해주라고 한 거야.


근데 지금도 제도적으로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도 그런 부분에서 좀 아쉬워하는 부분이 보드는 1번이 상징적인 거라고 하잖아요. 1, 2, 3, 4 이 정도는 남겨 놨어야 된다고 봐요. 왜냐하면, 우리 학회 초대 회장 하신 분이 1대, 2대 회장을 하셨는데. 처음 보드 시험을 봐야 하니까, 누군가는 출제 위원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사실은 우리 황의호 선생님, 김세경 선생님, 이한식 선생님 또 하나가 누구였더라. 네 분이서 시험 출제를 들어가신 거야. 양보를 하신 거야. 사실 우리 황의호 선생님이 1번을 받을 자격이 차고 넘치죠. 그래서 시험을 보고 복지부에서 번호를 주는데, 의사 면허 번호 순서대로 쭉 준거야, 전문의 번호를.






Q (기억해야할) 응급의학의 창립에 도움을 준 많은 분들도 있었지요. 그분은 어떻습니까? 인요한 선생님?


A 우리는 진짜 응급의료가 공공의료 대표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복지부하고 국회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근데 학회 사람들이 우리 학회 회원이 아닌 사람들 중에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몇 사람 있어. 인요한 선생 학회 초창기에 우리 일 많이 도와줬어요. 집안이 선교사 집안으로 한국에 좋은일 많이했고 북한 관련해서 인도적 사업도 많이한 사람이지. 이 사람이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어. 아버지가 순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돌아 가셨을때 구급차가 왔는데 아무 장비도 없고 전남대까지 가는데도 1시간이 걸리고 해서 아무런 처치도 못받고 돌아가시게 되었지. 그래서 구급차가 있어야 되겠다 해서 인요한 선생이 박스형으로 된 한국형 구급차 있잖아. 자기 돈 1500만 원을 들여서 개조를 해가지고 그걸 시청에다가 바쳤어. 그걸 만들 때 우리도 관여를 했어. 그때 만들 때, 한국형 구급차 만들자고 논의를 했어 몇 번. 그 차가 처음 만들어질 때가 92년인가 93년이야. 그때 인요한 선생이 처음 제안하고 추진은 했지만, 우리 초창기 장석준 선생하고 해서 같이 관여를 했어.


그리고 인요한 선생은 한남대 있잖아요. 한남대 이사야. 여기 한남대 이사로 되어 있어서. 그리고 한남대 옆에 외국인 학교가 있어. 인요한 선생이 중학교를 여기서 다녔어. 그래서 나 중학교 때 외국인들이 신기해서 거기 많이 다녔었거든. 가면 걔들이 2층에서 우리 밑으로 지나가면, 우리 보고 “Monkey” 이러고 그랬어. 어릴 때니까 우리가 영어를 모르지. 근데 Me too는 어디서 주워 들어서, “Me too!” 이러고 다녔었거든. 근데 이사니까, 이사 일 때문에 가끔 와. 나랑 그래서 우연히 대전역에서 자주 만나.


그리고 인요한 선생이 김준식 선생하고 아주 친해. 김준식 선생하고 학교도 같이 다니고. 김준식 선생 학교 다니면서 많이 좀 놀았어. (많이 논게 아니라 술을 엄청 많이 마셨고) 학교도 오래 다녔지. 그래서 인요한 선생 하고도 학창 시절 다니고 그랬어. 그래서 친하지. (그리고 인요한 선생은 연대 의대 사람들 중에 안 친한 사람이 없어) 초창기에 인요한 선생이 우리의 우군이었어. 우리의 정치권이나 정부에서도 우리나라에 기여가 큰 집안이잖아.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 보다 더 들어줬지. 그래서 초창기에 인요한 선생이 말 몇 마디 거들고 하는 게 우리한테 큰 이익이 됐지.


우리가 이상하게 지금은 그런 관계가 끊어졌는데, 그게 이제 이강현 선생님 이사장 2년 차 때부터 좀 끊어진 것 같아. 근데 그전까지는 우리가 시민 단체 하고도 굉장히 가까웠다고. 그래서 아까 전에 얘기했던 응급의학 역사에, 우리 학회 회원이 아닌 사람 중에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람이, 허윤정(전 민주당 전문위원 현 보험심사평가원). 거기는 이제 모든 정책 방향을 우리한테 코치를 해줬지. 국회 돌아가는 것, 정부 돌아가는 것. 그리고 조경애(전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 그다음에 선한 사마리안 운동본부 처음 만들어 준 김정규 이사장.


그 양반 동생이 응급실에서 죽었어. 근데 이 양반은 그걸 승화시켰어. 그래서 선한 사마라안 운동 본부를 만들었는데. 그 양반 동생 이름이 김왕규야. 판결본을 지금 내가 가지고 있거든. 처음에 패소를 했어. 패소를 했는데, 말도 안 된다 이거지. 그래서 조경애 대표가 나를 소개를 시켜줬어. 그 양반이 판결본을 들고 나를 찾아온 거야. 의무 기록하고 다. 근데 보니까 질 수 없는 재판을 졌더라고. 진짜 병원에서 잘못했어. 그래서 내가 “어르신, 제가 이거 검토해서 의견 다 달아 줄테니까 들고 가시죠.” 그래서 재판에서 이겼어. 보상금을 8900만 원인가 받았어. 근데 8900만 원을 받아가지고 이걸 응급 환자 살리는 데 써야겠다고 해서 선한 사마리안 운동 본부를 만들고 제수씨한테 자기 사비로 8900만 원을 줬어. 그분이 이제 90 몇 세 되셨을 텐데, 지금 치매 걸렸다고 하시더라고. 그 양반이 옛날 동화은행장 출신이야.


그다음에 우리 심폐소생술 국민운동 본부 이사장 하정열 목사. 그다음에 우리 학회 회원이 아니면서, 물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좀 했지만 최근에 죽은 목포한국병원 유재광 원장, 그리고 안동병원 강보영 이사장. 강보영 이사장은 의사도 아니야. 이 양반은 우리 응급의료 기금 만들고 유지하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을 준 사람이야. 유재광 선생은 목포 쪽이니까,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우리가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분들에게 응급의료 기금의 필요성을 얘기를 해줬어. 그리고 강보영 이사장은 안동 쪽이니까, 자한당이잖아. 옛날에는 한국당이었지만. 여야 국회의원들을 우리가 만나서 응급의료 기금 필요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도록 다리를 놓아준 사람들이야. 이렇게 몇 사람들을 우리가 기려야 된다고. 근데 그런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없지. 그런 부분까지도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해.




응급의학과 1기 22명의 개척자들,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기 [인터뷰 모음 영상]

https://youtu.be/kUyoqRTj1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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