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경 응급의학과 1회 전문의 인터뷰

2019 대한 응급의학회 30주년 기념사업 10

"그때도 응급의학과에 대해 잘 몰랐고.
인턴 말쯤에 응급실이 좋아서 응급실을 더 돌았어요.
24시간 근무를 하고 오프가 되면 아침부터 하는 술집을 찾아서 한 잔 마시고.
그 하루를 쉰다는 게 너무 좋아서, 응급실을 자주 돌았었는데.
그러면서 응급실이 나랑 좀 맞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때 치마를 입고 배에 올라타서 하는데,
너무 느낌이 안 좋고 CPR 할 때도 그렇고.
그러면서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큰일 날 소리를 한다고.
여자들이 가운 밑에다가 바지를 입는 것은 용납을 안 했던 시절이어서.
결국에는 바지를 입게 되면서. 그 에피소드를 제가 4년 차 때,
드라마 종합병원을 쓴 작가 분께서 저희 의국에 오셔가지고 두세 달을.
캠핑할 때 쓰는 침낭을 가지고 오셔서 바닥에서 주무셨어요.
그게 신인으로서 첫 작품이었는데 굉장히 히트를 쳤죠.
거기서 신은경 씨가 처음으로 바지를 입고 나왔죠."


"그때 공항에서 맞이하는 첫 의사였어요. 첫 의사였고,
제가 개원을 하게 된 것은 5년 동안 있으면서 환자하고 많이 정들었죠.
거기 공항 근무자들이나 항공사 직원들이나 여러 분야의.
근무하시는 분들과 약간 사회적 교류 같은 것들을 하면서
의사로서의 병원에서만 있었던 테두리, 그런 것을 깰 수 있어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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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옥경

응급의학과 전문의 번호 : 45번

수련병원 : 연세대학교 신촌세브란스병원

현근무지 : 연세공항의원




Q 신촌에 처음 가셨을 때, 응급의학과가 없다가 신촌에 새로 생긴 거잖아요. 그럼 처음으로 가서 응급실을 오픈하신 건가요?


A 응급의학과는 새로 생겼지만 응급실은 그전에도 있었죠.




Q 그 때 신촌세브란스 응급실 환경이 어땠습니까?


A 환경이요? 그때 한참 데모가 1991년도, 주로 투신하시는 분들이 신촌역에서. 그다음에 강경대 사건 등. 그러다 보니 그 사람들 응급실에 많이 왔었고, 그 사건들 때문에 서울 중앙 지방 법원에 많이 불려 갔었죠. 그때 사체검안서를 쓴 사람이 저였거든요.




Q 그럼 그때 사고 나고 다친 사람은 다 거기 응급실로 왔습니까?


A 네. 그때 당시에는 신촌 인근에서 난 사고는 다 그쪽으로 왔었죠. 아시다시피 거기가 보통 우리가 말하는 110% 입원. 그때 최루탄 많이 터지고, 그러면서 응급실 환자들 천식(Asthma) 환자들 숨차서 너무 힘들어하고, 바닥에 막 눕혀서. 그리고 그때 당시는 신입생 환영회 하면, 사발로 마실 때. 그럴 때 Aspiration되서 바닥에서 하임리히도 많이 하고. 그때는 거의 뭐 최루탄 냄새랑 살았죠. 그때는 한참 그랬어요. 본관 1층에 있었을 때는 그때는 응급실도 좁고 한 20베드 있었나? 그 때는 엄청 좁았지요.




Q 응급의학과라는 것을 처음에 하시겠다고 결정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A 사실 제가 그때 당시에는, (성격이) 지금은 많이 유해졌는데,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길 것 같은 그런 성격이라서. 하하하. 주로 뭐 레지던트들 조인트도 까고. 그랬어요.




Q 그럼 학생 때 (응급의학과를 하기로) 결정을 하신 건가요?


A 아니요. 인턴 때요.




Q 그러면 그 전에는 응급의학과의 존재를 잘 모르셨던 건가요?


A 몰랐죠.




Q 인턴 돌다가 어떤 면이 지원하게 된 포인트였나요?


A 응급실을 돌 때, 지금의 남편을 그때 만났고. 7, 8월에 돌았는데 김승호 선생님이 아주 인상적이었어. 좀 무서워 보였지만, 굉장히 진지하시면서 멋있으셨어요.




Q 그래서 인턴을 돌다가, 응급의학과를 해야겠다고?


A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그때도 응급의학과에 대해 잘 몰랐고. 인턴 말쯤에 응급실이 좋아서 몇 번을 바꿔서 응급실을 더 돌았어요. 그래서 24시간 근무를 하고 오프가 되면 아침에 신촌에 내려가서 아침부터 하는 술집을 찾아서 한 잔 마시고. 그 하루를 쉰다는 게 너무 좋아서, 그때 응급실을 자주 돌았었는데. 그러면서 응급실이 나랑 좀 맞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하여튼 응급의학과에서는 전혀 지원하라는 권유가 없어서 시간이 지나고 인턴 말쯤 됐는데, 김승호 선생님이 공고를 내셨어요. 큰 데도 아니고 A4 용지에다가. 그래서 뭔가 가만히 읽어보니까 ‘응급의학과를 지원하시는’ 이렇게 아주 진지하게 쓰셨더라고요. 그 글과 김승호 선생님, 저의 성격 이런게 합쳐져서 지원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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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막상 한다고 하니, 김승호 선생님 되게 좋아하셨겠네요?


A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셔서 “해보겠습니다” 라고 했죠.




Q 혹시 여성이라서 좀 꺼려하셨던 건 아닌가요?


A 김승호 선생님이 별로 그런 성격이 아니시라서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Q 당시에는 사실 여자를 별로 안 뽑는 과들이 있었잖아요?


A 그렇죠. 4년에 한 번씩 뽑았죠. 제가 나오고 나서 1년 차가 다시 여자로 돌아갔죠. 그 사이에는 안 뽑았어요.




Q 어떻습니까, 응급의학과가 여성 의사들한테는 잘 맞는 편인가요?


A 굳이 안 맞을 건 없어요.




Q 그래도 어떤 숙소라든지, 생활이라든지 여러 면들이 불편하시긴 할 것 같은데요?


A 그때는 8명이 같이 썼거든요. 2층 침대 하나에. 그래서 서로 막 밑에 위에 차지하고 자는 바람에. 그때 당시 8명 중에서 제가 4년 차 때 3명이 결핵에 걸렸어요. 열악한 환경 때문에 그랬겠죠.




Q 처음 응급실에 출근하실 때 생각이 나세요? 응급의학과 전공의로서 출근하셨을 때?


A 네. 그 무슨 책이었더라. 하얗고 작게 나왔었는데. (김승호 선생님이) 그 책을 미리 주시면서 이거를 읽어 가지고 와라. 그래서 읽어서 갔더니 방에서 둘이 앉아서 첫날부터 그거를 정말 거의 독해를 하는 수준으로 하나하나 짚어주셨어요.




Q 첫 근무는 어떻게 근무하셨어요? 집에는 보내줬나요? 그때는 100일 당직.


A 보통은 그랬죠. 100일 당직. 세 달 동안 집에 안 가고 계속 병원에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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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근데 조광현 선생님만 하더라도 위에 선배가 있었잖아요. 근데 신촌은 위에 선배들이 안 계시잖아요. 그러면 좀 서러운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A 다른 과들과의 문제 그거를 김승호 선생님이 다 막아주셨죠.




Q 어느 과랑 주로 트러블이 있었나요?


A 트러블이 있기 전에, 트러블이 있을 만한 과에 파견을 보내셨죠. 3월, 4월에 저 혼자 근무를 하고, 그다음에 김옥준 선생님 들어오면서 저를 일반외과로 두 달 트레이닝 보내시고. 그다음에는 수술 파트로 계속 돌리셨어요. 그래서 돌기 전에 항상 저한테 “너는 제일 처음 파견을 나가는 사람이니깐, 항상 후배들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돌아라.”


지금 메이저 파트, 그러니까 외과 돌 때 박정호 선생님, 김충배 선생님 파트에 1년 차로 같이 갔었어요. 근데 얼마 전에 김충배 선생님이 여기 오셨어요. 저 해외여행 한 1주일 동안 갈 때 알바로 오셨어요. 그때 제 이름 보고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자리가 필요해서 오신 게 아니라, 제 이름을 기억하시고 얼굴을 기억하시니까 혹시나 해서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Q 김승호 선생님께서 그럼 응급의학과는 어떤 과라고 말씀을 해주셨나요?


A 김승호 선생님이 그때 38세셨어요. 그리고 저랑 12년 차이가 났어요. 같은 띠였을 거예요 아마. 응급의학과에 대해서는 본인도 잘 모른다. 같이 공부를 하면서 배우자.




Q 해보니까 어떠십니까? 응급의학과는 어떤 과던가요 선생님?


A 응급의학과에서 배운 게 많죠. 제가 지금까지 일을 쭉 쉬지 않고 하면서, 레지던트 때 배운 트레이닝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다 돌면서, 모든 파트가 보통 당직을 하니까. 당직할 때는 당직 서고, 쉴 때는 회식하고. 그래서 거의 모든 날을 집에 잘 못 갔습니다. (웃음)




Q 후배들이 들어오니까 되게 좋았겠어요. 아랫년차가 들어오면 처음으로 이제 윗년차가 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럼 4년 내내 chief(의국장)이셨나요? 자유로운 chief 셨나요, 무서운 chief 셨나요?


A 좀 긴장도가 있었죠(웃음). 왜냐하면 이게 인서비스로 들어오면 김승호 선생님 계시기 때문에, 같이 이렇게 하고. 그리고 상대적으로 김옥준 선생님이 늦게 들어오셨기 때문에, 김승호 선생님이 많이 신경을 써주시면, 김옥준 선생님은 약간 투덜거리시면서 저한테 “자기만 싫어한다고”. (웃음)


그러고 그 아랫년차 들어왔을 때는 김승환 선생님은 킴스여서 괜찮았는데, 구홍두 선생님은 너무 기운이 셌고 넌킴이라 저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사실 좀 어려웠어요, 그때는. 그리고 그 밑에 연차부터는 편했죠. 박인철 선생님, 이경룡 선생님 있을 때 강남 세브란스에 정성필 선생님. 제가 4년 차 때 1년 차로 들어왔는데. 이 4명은 아주 굉장히 강한 군단이었죠.




Q 선생님께서 계실 때, 전국에 11명인가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서로 다 친하셨죠?


A 네. 친했던 것 같아요. 모든 학회 일을 다 미리 모여가지고 접수대 앉아서 접수받고, 도장 찍고, 우편발송물 써주고. 금장 동그란 거 기억나세요? 나눠 드리고. 거기다가 옛날에 말아서 책 만드는 거 있었잖아요. 바인더처럼. 그거 일일이 말아가지고.




Q 그럼 그분들끼리 일 년에 몇 번씩은 (만나셨는지)?


A 많이 만났죠.




Q 술도 많이 드셨겠네요 많이 모여서?


A 주로 맥주집에서 만났죠. 신촌에 하이델베르크(신촌응급실 건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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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때 모여서 술 드시면서, 앞으로 우리나라 응급의학이 이렇게 발전했으면 좋겠다 생각하셨던 부분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우리가 앞으로 이렇게 노력을 해서 우리나라의 응급의학을 이렇게 만들어봤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꿈과 소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A 처음 시작할 때 제 마음은 그랬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흰 눈이 많이 쌓여있는 곳에서 발자국을 내면서 가는 그런 것을 상상을 했어요. 그러다가 점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그 당시에 트레이닝을 다 받고 세팅을 이대목동병원에서 하면서. 그때가 가장 좀 열정도 많았고, 모자란 것도 많았지만. 하여튼 그때 이대목동병원 세팅을 하는데, 아마 강남에서도 그렇고 신촌에서도 그렇고 전체 의국원들이 거기로 파견 근무를 갈 정도로 송근정 선생님과 저를 많이 지원을 해주셨죠.


그 당시에는 사실은 상당히 많은 분들이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봤어요. 물론 다른과랑 싸우고 갈등하고 서로 주장하고 그런 것들도 많았는데, 항상 그때 김승호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모든 건 내가 책임질 테니깐, 너는 파이터를 해라.




Q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시고 나서 그럼 이대목동병원을 세팅하러 가신 거네요. 그럼 선생님은 전공의로도 처음에 의국을 세우신 거고 병원 세팅도 처음으로 들어가시게 되고 그런 거네요?


A 세팅 과정은 제가 3년 차 정도부터 김용윤 선생님께서 하시면서, 응급의학과를 이렇게 미리 스카우트라고 할까? 여자 선생님 두 분이 같은 출신이라서. 이렇게 세팅을 하시면서 하게 됬죠. 사실은 이대목동병원 보면 응급실 도면 그릴 때부터 김승호 선생님하고 많이 구상을 했고. 사실 저희가 레지던트 때부터 거기는 이제 오픈을 했으니까, 거기도 또 이렇게 전공의들 두 달 이상 파견 못 가는 그런 규정 때문에 돌아가면서 파견가고, 또 다른 분이 가시고. 8명이니까 저 빼고 2 x 8 = 16. 뭐 그래서 1년 채우고.




Q 응급의학과가 없는 병원에 응급의학과를 처음으로 세팅할 때 제일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나요?


A 어려운 점은 별로 없었어요. 그때는 정구영 선생님이 계셨어요. 사실 정구영 선생님이 없으셨으면 제가 행정적으로나 이런 것들 때문에 고생을 더 했을 수가 있는데. 정구영 선생님이 거기 계셔서 저는 환자를 주로 봤죠. 레지던트 때는 초반에 집에 못 가고.


그때 1층에 응급실이 있었으면 6층에 인턴 방이라고 있었어요. 여자 인턴 방은 어떻게 되어 있었냐 하면, 딱 들어가면 복도에다가 여기 인턴 방, 1년 차 방, 3년 차, 4년 차 방 이렇게 있어요. 거기 모든 여자 레지던트와 인턴이 있으면, 콜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삐삐죠. 잠을 자고 있으면 삐삐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응급실에서 만약에 콜이 오면 당직이 아니어도, 두 계단씩 뛰어서 내려갔어요. 뛰어 내려가 가지고 조치를 하고. 거의 잠을 잘 못 잤죠.




Q 보통 이제 수련 과정에서는 뭔가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윗년차를 부르지 않습니까. 근데 선생님은 윗년차가 없으셨잖아요. 그럼 어렵거나 힘든 상황에서 김승호 선생님을 부르셨나요?


A 아니요. 야간 전화는 안 드렸고요. 주로 타과. 그때 당시에는 경호나 경비가 시스템이 잘 안 갖추어져 있어서 환자랑 싸우고. 그때는 석션병(suction bottle) 이 유리였는데, 깨겠다고. 다 물러나잖아요. 그랬을 때 지금 같았으면 안 나갔는데, 그때 난 여기 응급실을 지키는 응급의학 전문의다 내 전공이다. 따라나가서 때려 부수라고. 그런 일도 있었고.


치마밖에 못 입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치마를 입고 막 뛰어 내려갔는데, 신입생이 딱 누워서 이렇게 있고. 주변에 친구들, 선배 이렇게 있는데, 아마 술을 너무 많이 먹이고 Aspiration된 모양인데, 술 먹인 선배가 가장 마음 졸이고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때 치마도 좁은 치마면 못 뛰어 내려가니까 넓은 주름치마를 입었었는데, 거기서 의식이 없고 누워있고 하니까 배를 탔죠. 하임리히를 하니까, 숨을 탁 쉬니까. 그 술 먹인 선배가 나한테너무 반해서 그 모습에, 몇 달 동안 저를 따라다니고 그랬어요(웃음).




Q 멋있으시네요?


A 아 그런 것보다 그때 치마를 입고 배에 올라타서 하는데, 너무 느낌이 안 좋고 CPR 할 때도 그렇고. 그러면서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들이 큰일 날 소리를 한다고. 남자들도 청바지 같은 것 못 입고 운동화도 못 신었죠. 여자들이 가운 밑에다가 바지를 입는 것은 용납을 안 했던 시절이어서.


여의사들이 그때 나선영 선생님이라고 그분이 자기도 그럼 바지를 입게 해 달라고. 내과 혼자거든요. 내과 혼자였는데, 둘이서 이렇게 조금 주장을 해서 여의사들이 모였어요. 모여가지고 바지를 좀 입어야 되겠는데, 찬성을 해주시겠습니까? 반 정도는 찬성을 하고 그래도 우리 과에서는 안 될 텐데 했던 게 주로 소아과. 소아과에서 끝까지 못 입게 했어요. 여자 레지던트가 가장 많았는데, 끝까지 못 입게 했는데.


결국에는 바지를 입게 되면서. 그 에피소드를 제가 4년 차 때, 종합병원을 쓴 작가 분께서 저희 의국에 오셔가지고 두세 달을. 캠핑할 때 쓰는 침낭을 가지고 오셔서 바닥에서 주무셨어요. 그렇게 글을 쓰셨는데, 그게 신인으로서 첫 작품이었는데 굉장히 히트를 쳤죠. 거기서 신은경 씨가 처음으로 바지를 입고 나왔죠.




Q 그 이후로는 응급의학과는 근무복을 입고 했던가요?


A 지금은 다 캐주얼하게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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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처음에 개업을 하실 때는 응급의학에 대한 실망이 있었습니까?


A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이대에 있었을 때는 입원 환자가 있었고. 주로 Toxicology(독성학) 환자들이랑 다른 과에서 Consult OP(협업 수술)나 그런 걸 할 때 조치가 필요한, 그때는 레지던트들이 다른 과만큼 있었으니까. 일부러 집을 이사를 갔었죠, 목동 근처로. 그래서 밤에 항상 콜 받고, 필요하면 병원으로 나가고. 제가 그때 2년 차 때 첫 아이를 임신을 했었는데, 거의 양수가 터지는 날까지 아침에 당직서고 4시까지 인수인계하고.




Q 혹시 응급실을 떠나 계시니까 좀 그리우시던가요? 시원하시던가요?


A 저는 다양하게 여러가지 일을 해서 김승호 선생님 밑에 있을 때는 김승호 선생님 패턴, 정구영 선생님 밑에 있을 때는 정구영 선생님 패턴, 임경수 선생님과 있을 때는 임경수 선생님 패턴 각각 다 다르세요. 그래서 조금씩 다 다른 것들을 여러 가지 배웠고, ‘하얀 거탑’이라는 드라마를 할 때 “아, 저건 아산 병원이구나.” 처음 환자 내원했을 때 진료를 보고, 필요하신 분들은 거기서 바로 우리가 보고 처방 나가고. 그렇게 해서 간단한 패스트 트랙으로 운영했던 것을 임경수 선생님이.


그때는 응급실을 떠나서 그런 것들을 생각을 못 했는데, 김승호 선생님께서 공항에 한 번 가보지 않겠냐. “거기 가서 제가 무슨 일을 하나요?” 그랬더니, 공항을 세팅을 하라고 하셨어요. 2001년도에 공항이 처음 오픈했을 때, 거기 인하대에서 세팅하던 때에 같이 합류를 해서, 제가 가서 응급의학적인 세팅과. 그때는 항공 의학 쪽에 관심이 생기던 시기라. disaster, 활주로, 비행기 재난 훈련 그런 것들을 처음으로 하면서 자동제세동기(AED)사달라고 졸랐는데도 제가 있는 동안은 AED를 사지 못하고. 지금은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만, 그때까지도 AED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너무 일찍 주장을 했었던 거죠. 재미있었어요.


청주에서는 공군 의료원. 민간인으로 처음으로 군의관들 1년 차 들어갈 때 하는 AME(Aviation Medical Examiner; 항공전문의)라고 가서 강의 같은 것은 자주 못 듣고요 근무를 하니까. 비행 원심 훈련하고 탈출 훈련하고 거기서 그 친구들이 하는 훈련들을 같이 참석을 하게 공군 항공의료원장께서 서포트를 잘해주셔서. 여자로서 처음 환영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




Q 해외 환자 이송도 많이 하셨죠?


A 네, 꽤 많이 했어요. 그거는 제가 하려고 했던 것보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건데. 항공사에서 안 태워주고. 대한항공에서는 복잡하니까 이렇게 돌려서 거기 (공항의원) 한 번 가보라고. 좀 힘드신 분들이 많았어요. 외국인인데 거제도에 계신데, 대우 조선에 테크니션으로 오셨다가 암에 걸려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 당시에 프랑크푸르트 1박을 하고 그리고 다시 루마니아 들어갔다가 활주로에 내려서, 보통 장거리는 그렇게 갔어요. 활주로에 내려서 입국하고 그다음에 다시 출국하고. 2시간 안에.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그다음 날이 돼요. 토론토에도 한번 갔다 오니까 그다음 날 돼서 새벽 4시에 도착해서 한 2, 3시간 자고 출근하고 거의 2일을 비행기만 탄거지요.




Q 어떻게 보면 응급실의 막 액티브한 환경이 그립거나 그러지 않으세요?


A (제가 있는 곳도) 액티브했어요. 액티브했고, 그때 공항에서 맞이하는 첫 의사였어요. 첫 의사였고, 제가 개원을 하게 된 것은 5년 동안 있으면서 환자하고 많이 정들었죠. 거기 공항 근무자들이나 항공사 직원들이나 여러 분야의. 여기가 지금은 여성부도 들어왔나, 하지만 여성부 빼놓고 모든 공무원들이 다 작은 정부 청사가, 아까 계신 곳 건너편이 공항공사잖아요. 반은 공항공사고 반은 정부청사예요. 거기서 모든 근무하시는 분들과 약간 사회적 교류 같은 것들을 하면서 의사로서의 테두리 안에서 병원에서만 있었던 그런 것을 깰 수 있어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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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응급의학에 대한 질문을 몇 가지만 좀 더 드리고 마무리를 할게요. 응급의학과가 본인에게 아주 잘 맞았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응급의학과에 잘 맞는 사람인가요?


A 글쎄요. 요즘에는 여럿이서 근무를 하고 파트타임으로도 하고. 그런데, 사실 레지던트들이 연차가 좀 있는 팀으로 근무를 할 때는, 훨씬 더 환자를 살렸을 때, 무사히 올려 보냈을 때, 자신감이 생기고. 그러면 교대할 때쯤 되면 어떤 날은 우울하고 어떤 날은 기분 좋고. 그래서 아침에 한 잔 하러 가고.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팀으로 하는 게 참 좋았고요.


지금은 오래 응급의학을 하신 분들이잖아요. 오래 하신 분들이 느끼셨을 성취감과 오랜 시간의 연륜과 그런 것들이 있다면 저는 응급의학을 토대로 발전을, 좀 더 많은 세계를 봤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응급의학에 좋을까 하면, 조금 더 열려있는 마음. 그런 것들이 있으시면은 어느 과를 해도 잘 맞겠지만, 응급의학을 하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Q 선생님께서 처음 전문의가 되었을 때 앞으로 응급의학과가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던 것의 지금 현재의 모습은 얼마 정도 왔을까요? 많이 발전했나요?


A 일단은, 전에는 “전공이 뭡니까?”라고 그러면 응급의학입니다. 그러면 그런 과가 있냐고 했던 부분에서 요즘은 응급의학을 했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알아봐 주시니까. 그런 게 좋고. 그런 것들이 응급의학 학회나, 응급의학을 계속해서 하신 분들이 일궈놓으신 결과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응급의학을 했기 때문에 저는 개업을 하면서 방어적인 진료보다는 더 많이 무엇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단한 뿌리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응급의학은 많이 발전했어요. 저희가 후배한테 이렇게 하는 것보다, 후배들이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것들을. 자라는 뿌리들이 점점 두꺼워지면서 큰 나무를 이루어 놓지 않았을까.




Q 아끼는 후배가 있다면 응급의학 하라고 하겠습니까?


A 그럼요.




Q 그럼 다시 선택을 하라 해도, 응급의학을 택하시나요? 이유가 뭐죠?


A 네. 제 개인적인 성향이 지배받기 싫어하는 성향이 있어서. 제가 했을 때 당시에는 눈치를 많이 안 볼 수 있어서. 그리고 그걸 열심히 했고.




응급의학과 1기 22명의 개척자들,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기 [인터뷰 모음 영상]

https://youtu.be/kUyoqRTj1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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