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대한 응급의학회 30주년 기념사업 09
"우리랑 경쟁하던 곳들이 있었어요.
흉부외과, 외과, 내과 전공의들끼리.
누가 술기(Procedure)에 더 나은가.
갑자기 쇽 상태가 오잖아요.
그럼 라인을 빨리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한쪽씩 해가지고, 누가 더 빨리 하느냐.
그런 식으로 전공의 시절이 갔죠."
"그때 컨퍼런스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학생인가 누군가가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벙 찌고 있다가 우르르 올라갔더니,
갑자기 회색 가루를 뒤집어쓴 분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거예요.
보니까 이 사람들은 다 움직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더라고요.
옆에 있던 TV를 봤더니, 큰일 났다.
응급실이 꽉 차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 빼야겠다.
그래서 빼기 시작했죠."
"응급의학의 장점은 자기가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어느 과보다도 생명을 다루는 과고.
그래서 굉장히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과죠.
단점은 굉장히 위험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과죠.
자기가 근무하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런 과인 거죠."
이름 : 박규남
응급의학과 전문의 번호 : 43번
수련병원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현근무지 :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Q 가톨릭 성모병원에서 수련받으시고 계속 여기에 계셨던 것인가요?
A 가톨릭 대학교에 있긴 있었는데, 강남 성모에 있다가 레지던트 끝나고 촉탁의죠. 촉탁의 4년 하고 나서 그때 당시에 여의도 성모 병원 쪽으로 가서 펠로우 발령을 받았죠. 거기에 13년간 있다가 이쪽으로 온 거예요.
Q 이원재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까, 선배들이 (응급의학을 하라고)꼬시지 않았는데, 혼자 와서 응급의학과를 하겠다고 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A 이원재 선생님이 제 유일한 선배이신데, 그분은 절 안 꼬셨어요. 그래 가지고 인턴 때 어느 과를 해야 하나. 처음에는 제가 학생 때 민주화 운동을 해서 산업의학과를 해볼까 했었는데, 그 산업의학과 선배가 또 우리 서클(동아리) 선배였어요. 근데, 민주화 운동 이런 거에 대해서 독재 타도 이런 거 되게 싫어하셨거든요. 그래서 넌 안된다. 거기서 이제 거절 한 번 당하고.
그때가 6월인가. 그다음에 외과를 실습 돌고, 와 이거 바이탈을 다루는 과인데, 너무너무 멋있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외과도 인사를 했죠. 그 이후에 내과를 돌다 보니까, 여기 진짜 MRI다 뭐다 해가지고 할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인사를 갔어요, 내과를 하겠다고. 1번으로 지원을 했어요. 그 당시 내과는 미달이었는데, 그러고 있다가 인턴을 돌았죠.
근데 김세경 선생님이 “박 선생, 응급의학과는 어떻겠냐”라고 응급의학과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일단 첫 번째는 2개월을 논다는 거야 1년에. “박 선생, 응급의학과 자네가 하면, 1년에 2개월을 놀 수 있어. 그리고 미국에 있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다들 서핑하느라고 자기 시간을 즐기고 있어.” 두 번째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잖아. 내과도 할 수 있고 외과도 할 수 있고. 모든 응급환자를 다 볼 수 있고. 수술도 하지, 인투베이션도 하지. 그런 것을 다 할 수 있는 과야.” 곰곰이 얘기해보다 보니까 내가 생명을 다루는 과를 좀 선호했었는데, 내과도 하고 외과도 하고 많이 놀아. 대박. 이거다(웃음). 그래 가지고 그냥 김세경 교수님 말씀에 넘어갔죠.
Q 그러면 그전까지는 응급의학과에 대해서 모르셨겠네요?
A 몰랐죠.
Q 그럼 이야기를 듣고 응급의학과에 대해서 좀 알아보셨나요?
A 응급의학과 들어가는 것을 우리 선배님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했어요. “과가 아직 보드도 없는데, 거기 들어가서 보드도 못 따고 너의 미래가 망가지면 어떡하냐. 도박을 하니.”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었죠. 정보가 하나도 없었죠.
Q 가족들은 어땠나요?
A 가족들은 내가 하고 싶다는 것에 전폭적으로 밀어줬으니까.
Q 첫날 출근하셨을 때 기억나세요 전공의로서 응급실 출근?
A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Q 100일 당직이 있었나요?
A 그런 것도 없었어요. 그냥 인턴 같이, 시니어 인턴 수준으로 근무를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커리큘럼이나 이런 것도 전혀 없었고.
Q 당시에 응급실이 저 쪽 안쪽에 의과 대학 입구에 있었지 않습니까. 되게 좁았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A 그때 당시에는 김세경 교수님이 미국에서 스카우트 되가지고 왔거든요. 그래서 외상 파트를 좀 맡아달라. 그리고 응급의학도 미국 보드도 있고 그러니까. 그래서 외상 파트를 맡아달라고 그래서 그때는 A, B, C 파트가 있었는데, C파트의 디렉터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외상 환자를 그 밑에 주니어 스텝하고 외상 환자를 보셨죠. 똑같이 시니어 인턴으로 시작을 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이게 뭔가, 우리가 찾았죠. 이원재 선생님하고 황주일 선생님하고. 대체 뭐 하는 과냐 이거. 김세경 선생님은 “박 선생, 열심히 해!” 응급의학과에 대한 확실한 개념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텍스트를 샀죠. 그리고 그다음에 외과에 있는 한 교수님이 MGH(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 텍스트 북이라고 되게 두꺼운 거 있었어요, 복사본. 그때 한참 된 그것을 저한테 주시더라고요.
Q 틴티넬리가 아니고요?
A 그 전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90년이었으니까, 90년 말. 내가 외과 실습을 돌고 있는데 말년 차로. 근데 그 선생님이 무슨 과 했냐고 물어보셔서, 응급의학과 했다고 그러니까 그 책을 주더라고요. 그 책을 보니까 MGH에서 나온 emergency medicine이라는 책이에요. 엄청 두꺼운 책인데. 거기 보니까 챕터별로 한 번 봤죠. 응급의학과가 뭐하는 과인가. 그 뒤에 부록으로 프로시저가 딱 나왔어요. 아, 이게 프로시저를 많이 하는 과구나라고 생각을 해서 처음에는 열심히 김세경 선생님 회진 도는 거 따라 돌고.
그냥 시니어 인턴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다가, 몇 개월이 지나고 나니까 김세경 선생님 오더를 딱 내렸어요. “내가 작년부터 만드려고 한 게 있는데, 그거 한 번 해보지.” 그게 수련의를 위한 ‘응급의학 매뉴얼’이라는 책이에요. 그게 91년도에 나온 책인데. 베스트셀러가 된 거예요. 전국의 응급실에 쫙 깔리고. 그래서 그거를 만들면서, 이게 응급의학이 뭔가를 좀 파악을 했죠. 그 back bone이 current emergency medicine이라는 책이에요. 복잡한 설명은 없고, 어떤 증상의 환자 처치법 같은 게 써져있어요. 그래 가지고 그걸 좀 요약하고 내과 매뉴얼 좀 요약해서.
그때 당시 응급실에서 뭘 해야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GI bleeding이 온다고 그러면, 딱 1, 바이탈 체크. 2, 이렇게 해가지고 쭉 오더를 낼 수 있도록 그런 식으로 해놓았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했죠. 정말 실용적이었죠. 근데 그것도 몰랐으니까 그걸 김세경 선생님이 하려는 이유를 알았어요. “내가 이 응급실에 있는 아이들한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데, 일단 오더 내리는 것부터 해야 되겠다. 그래서 한 번 만들어 봐라.” 말로 딱 하셨는데. 내과 매뉴얼 있었고, 응급의학 쪽 베이스 되는 거 만들어서 검수받고, 그렇게 해서 짧은 시간 내에 만들었죠. 그랬더니 개념이 조금 잡히더라고요.
Q 그 책 가지고 있으신가요?
A 아마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Q 요즘 하는 CP(critical pathway) 이런 것의 원조네요 그러면?
A 그렇죠. 그때 당시에는. 거의 한 10년간은 그게 잘 팔렸을 거예요.
Q 교과서가 없으니까 그걸 만들자는 생각을 하셨군요?
A 당장 매뉴얼, 응급실에서 오더는 내야 할 것 아니에요. 근데 그런 게 없으니까. 내과는 내과 나름대로 계속 내려오는 게 있잖아요. 근데 우리는 하나도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오더 내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랐으니까. 근데 아마 그게 다른 병원들도 다 똑같았을 거예요.
Q 그래도 강남성모 병원 같은 경우에는 연차당 두 분이 계셨잖아요. 좀 의지가 많이 되셨겠어요. 같이 일을 하셨나요, 번갈아서 하셨나요?
A 의지가 됐죠.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집에 안 갔죠.
Q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집에 가셨습니까?
A 3번. 3번 아주 잠깐.
Q 집이 가까우셨어요?
A 네 가까웠죠.
Q 잠깐 갔다 오신다는 게 어느정도인가요?
A 그때는 근무 체계가 형식상으로는 36시간 근무, 12시간 휴식 시스템이었어요. 아침에 출근해서 다음날 저녁때 퇴근을 하고, 밤에 쉬고 그다음 날 아침에 출근, 그런 생활이 오래됐죠.
Q 당직 서실 때 거의 못 주무시지 않습니까?
A 거의 못 잤죠. 그때 당시에는 이 근방에 병원이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환자들이 음주운전 단속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다 술 먹고 운전하는 거예요. 그러던 시절이에요. 그래서 여기가 꽉 차고, 그때 당시 우리 응급실이 굉장히 크게 만들어졌던 거예요. 지금 보면, 굉장히 작은 거지만 그때 당시에, 이비인후과 기계도 가져다 놓고, 안과 기계도 가져다 놓고. 뭔가 되게 제일 크게 만들었었어요.
김세경 선생님이 미국에 갔다 오시고. 위층에는 응급 병동이라는 것도 만들어 놓고 40 베드 정도. 그 밑이 응급실인데, 굉장히 컸죠. 그래서 119 구급대들 이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데려왔어요 밤새도록. 외상환자 진짜 많았어요. 사망도 많았고.
Q 다른과들은 입원이 순조롭게 됐었습니까 그 당시에?
A 입원이 우리병원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혜민 병원 등 주위에 병원들 있거든요, 4차 병원들. 거기로 그냥 CT 찍고, 인투베이션 하고 보내고. 하루에 4, 5명씩 보내고 그랬어요.
Q 다른 과가 협조적이었나요 응급의학과에?
A 그때 당시에는 다른 과 의존 안 했어요. 인투베이션했지, 피 주지, X-ray 다 찍지, 스플린트 다 되지. 뭐 내려보낼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모든 걸 해버리니까. 그리고 수술해야 하는 상황이면 연락해서. 밤새도록 피 짜고 그런 것도 우리가 했죠 전부다. 그때 당시에는 팬티가 이게 정상적인 흰 팬티 색깔보다 빨간 팬티였던 게 더 많았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 트라우마 환자가 오면, 막 깨지고 그 안에서 또 처치하고. 그러고 보면 또 그다음 환자. 그래서 뭐, 바닥에서 인투베이션 한 기억이 비일비재하고. 그때는 스트레쳐 카가 없었어. 119가 그냥 들것으로 툭 내려놓고.
Q 응급실 근무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A 힘들었죠. 김세경 선생님은 그 1년에 2개월을 쉬게 해 준다고. 그래 가지고 김세경 선생님 방이 2층에 있었어요. 자주 올라갔죠. 올라가서 “교수님,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1년 차 때부터 4년 차 때까지 100번은 그만둔다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Q 그러면 뭐라고 그러시나요?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그러면.
A 조금만 참아보라고 그러죠.
Q 2개월 쉬게 해 준다고 하셨던 처음의 약속은 지켜주셨나요?
A 그런 거 없었죠 (웃음).
Q 전문의가 되시고 나서 2개월 쉬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A 다 아시면서. 근데 이제 밖에 나가면, 그렇게 좀 되는 것 같아요. 또 우리들은 그렇게 이제 컴플레인하고 힘들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환자를 치료하면서 오는 희열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처음에 못 견뎠던 게 뭐냐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나에 대한 회의감, 자존감이 떨어져서.
근데 응급실에 조금씩 적응하다 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우리 때에는 컷다운 밖에 없었거든요. 1년 차를 지나서 2년 차 정도에 센트럴 라인 했었는데, 그게 옛날 단계 센트럴 라인 그런 게 있다가, 그다음에 셀링거가.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하는데, 옆에 또 흉부외과나 이런 곳은 다 컷 다운하고 있는데, 내가 딱 해서 인터널 쥬글라 하고 서브 클라비안 딱딱 박고 그러면은 그 희열도 참.
Q 그 센트럴 카테터를 혼자 독학하신 건가요?
A 독학했죠, 책 보고.
Q 그거 처음 한다고 했을 때, 다른 과에서 반발이 좀 있었을 것 같은데요.
A 그래서 우리는 고용복 교수님이라고 하는 혈관 외과의, 우리 병원이 KT(Kidney Transplantation; 신장이식)를 196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한 병원이에요. 그래서 혈관외과가 너무 강하고. 그 모든 그 센트럴 라인이나 이런 것들은 다 혈관 외과에서 잡았어요. 근데 응급의학과가 한다. 딱 그러고 1년 차가 딱 박아 버리고. 그러니까 이제 다른 과에서 경악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외과 이런 선생들이나 내과 선생들이 엄청나게 처음 경계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워낙 중환자가 많고 그러니까 잡아야 될 상황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래서 처음에 할 때에는 internal jugular부터 했어요. 금방 쉽게 잡는 건데, 그거는 이제 샘플 안 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다음에 샘플 할 수만 있으면은 금방 할 수 있는 거라.
Q 응급의학과 처음 전공의 때는 프로시저 하는 게 되게 재밌잖아요?
A 그렇죠, 그다음에 이제 수련의를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두 번째 만든 게 김세경 선생님 작품이 프로시저 책이었어요. 그 책의 특징은 이 앞의 1번, 2번, 3번 key point라고 센트럴 라인 했을 때 주의할 점 있잖아요. 반드시 다리를 올리고 해야 된다든지. 그런 것들을 먼저 나열하고 쭉 했었는데, 우리는 프로시저에 대해서는 왕자였죠. 요추천자(spinal tap)서부터 해서 IO(intraosseous)도 거의 처음으로 해서, 라인 안 잡히는 사람들한테 딱 잡아서 그쪽으로 막 주고 그러니까.
우리랑 경쟁하던 곳들이 있었어요. 흉부외과, 외과, 내과 전공의들끼리. 누가 프로시저에 더 나은가. 흉부외과 하고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갑자기 쇽 상태가 오잖아요. 그럼 라인을 빨리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한쪽씩 해가지고, 누가 더 빨리 하느냐. 그런 식으로 전공의 시절이 갔죠. 처음에는 뭐 해야 하나 모르다가. 그다음 단계로 돼서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나한테 맡겨진 일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각 과 외과 교수들도 전부다 다 이원재 선생님이나 나를 찾고. 자기 레지던트보다.
외과에서도 프로시저 이런 게 있다고 그러면, 조직검사(biopsy)도 많이 했거든요. 조직검사는 맨날 전공의들이 턴하니까, 못 하는 애들이 와. 근데 우리는 계속 올라갈수록 로테이션 안 하고 있으니까 이게 축적이 돼서, 특히 이기중 선생님 같은 경우는 많이 불려 다녔어요. 병동에. 별 프로시저란 프로시저를 다 해본 것 같은 정도로.
Q 그렇게 도와주면 나중에 고맙다고 밥이라도 사줍니까?
A 그렇죠 뭐 가끔. 그 정도로 우리가 인기가 많았어요.
Q 응급의학과는 프로시저의 최강자셨겠어요?
A 그렇죠, 우리는. 안 해본 게 없었죠. 그래서 책을 쓰는데 아주 스무스하게, 한 번 읽어보면 key point 되는 것들을, 우리가 하도 많이 했으니까.
Q 이제 선생님이 윗년차가 되셔서 아랫년차들이 들어왔잖아요. 선생님이 인턴들 중에 응급의학과 해라 이런 인턴들이 있었나요?
A 많았죠. 그런 애들이 지금 내 밑에 있는 녀석들이었고.
Q 다음에 들어오신 것이 누구누구시죠?
A 이기중 선생님, 그 밑에 박상현, 오동렬. 이런 선생님들.
Q 이기중 선생님을 선생님이 픽업을 하셨나요?
A 이기중 선생님, 제 윗사람이었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 선배였어요.
Q 선배가 아랫연차로 어플라이를 하셨을 때, 불편하셨겠네요?
A 불편했죠 당연히, 선배인데 밑으로 오니까.
Q 선생님은 좀 성격이 화끈하셔서, 다른 과랑 많이 대결을 하셨을 것 같아요?
A 저한테 맞은 애들도 많았어요, 옛날에. 이게 우리가 다른 과의 전공의들이나 스텝들의 인간성을 알잖아요. 어떤 사람은 진짜 성심성의 껏 하고, 어떤 사람은 위의 환자 케어하느라고 밑에 환자는 다른 병원 보내라 그러던지, 제대로 치료 안 하는 사람들이 되게 많잖아요. 우리는 또 그런 것을 못 보죠. 그래서 우리는 생명, 정의, 이런 가치가 되게 중요해서 그런 거에 조금 어긋난다, 그러면 싸움을 많이 했죠. 근데 그런 한 두 번 싸움에서 우리가 기선제압을 해서 이겨 버리면, 그다음은 또 뭐라고 못 그러더라고요. “야, 저기 가면 성격 더러운 새끼 하나 있다.”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되게 싸움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Q 응급실에 있다 보면, 대부분 병원 입장보다는 눈앞의 환자 입장에서 판단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근데 위에 있는 친구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자기 일 늘어나고 귀찮으니까?
A 그리고 외래로 온 환자에 대해서나 교수들이 관심이 있지. 응급환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입원한 환자들에 대해서 환자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냐 안 되어 있냐를 가지고 얘가 나중에 교수 요원으로 남느냐 안 남느냐. 그리고 밤새도록 응급실에서 나랑 피 짜고 있으면, 걔는 아침에 저널 리뷰도 못 하고, 환자 파악도 못 하고 엄청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김세경 선생님이 맨날 A라는 전공의가 너무 명석 하대. B라는 애는 환자 파악도 못 하고, 발표도 못 하고 바보래요. 우리는 반대잖아 이게. 그런 경우가 너무 많은 거야. 사람을 제대로 파악해야 된다고, 얘는 인간성이 정말 나쁜 놈이고, 얘는 인간성이 좋은 놈입니다. 나중에 이걸 진짜 잘 파악해야 된다고 계속 얘기하는데도 그게 안 고쳐지더라고. 그래서 A라는 걔는 교수로 있는데, 진짜 악명이 높아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거죠 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Q 전문의가 되고 교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셨어요. 어떤 이유에서 그러셨죠?
A 그때 선택이 없었어요. 응급의학과 전문의도 못 땄겠다. 촉탁의로 마쳤는데 전문의 그것도 없겠다. 수료증도 없었죠. 그냥 촉탁의예요. 얘네는 전공의고 촉탁의고 금방 차이가 나는 게, 전공의들은 월급이 보너스도 있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우리는 항상 똑같아요. 그래서 월급 통장 안 쳐다봐도 똑같은 거죠. 그리고 전공의 1년 차, 2년 차 다른 데는 쓰여있는데. 우리는 촉탁의라고 쓰여있어요. 이게 처음에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어요.
Q 그럼 다른 과에서도 전문의라고 인정을 안 받으셨던 건가요?
A 그냥 전공의 때는 전공의로 한 거고. 전문의 자격은 안 받았지만, 임상 강사 그거로는 있었어요. 어차피 임상 강사도 촉탁의니까. 여의도 성모 갔을 때는 임상 강사 티오를 받고 간 거고. 그다음에, 전문의 따자마자 전임으로 됐죠. 그게 95년도에 임상 강사가 된 거고. 제가 4년 차 때 성수 대교가 무너졌고. 그다음에 펠로우로 갔더니, 삼풍이 무너진 거예요 그때 컨퍼런스 하고 있는데.
Q 삼풍 사고 얘기 좀 해주시죠?
A 그때 컨퍼런스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학생인가 누군가가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벙 찌고 있다가 우르르 올라갔더니, 갑자기 회색 가루를 뒤집어쓴 분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보니까 이 사람들은 다 움직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더라고요. 옆에 있던 TV를 봤더니, 큰일 났다. 그래 가지고 응급실이 꽉 차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 빼야겠다. 그래서 응급실 환자들을 빼기 시작했죠.
너무 사람들이 많으니까 혼란하니까, 그때 당시에 스테이션 거기에 올라가서 마이크 잡고 교통정리를 했죠. 하여튼 그런 식으로 시작된 거였죠. 그다음에서부터 집에 못 가고 계속 있었죠. 근데, 그때 당시에 저쪽에 입원한 환자도 마이너 환자들 다 빼라고 대책 본부 마련해서 얘기했는데. 어떤 분들은 또 왜 빼냐 이걸. 그러신 분들도 있었고. 근데 대부분 빼야 된다 그래서 빼고. 어마어마한 경험이었죠.
Q 삼풍 직접 겪으신 분들로서, 그당시의 재난 체계나 그런 게 진짜 엉망이다 이런 느낌 많이 받으셨겠어요?
A 그렇죠. 근데 지금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고 크게 틀려질까? 조금 틀려지겠죠. 폴리스 라인이라도 설치를 했을 것 같고. 현장 진료소 같은 것도 설치가 될 것 같고.
Q 전문의가 되시고 배우시던 입장에서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셨잖습니까. 처음 전공의를 딱 받았을 때, 느낌이 희한하셨을 것 같아요. 뭐라고 얘기하셨던 것 같아요 그 친구들한테?
A 그 사람들도 제가 하라고 권유해서 들어온 사람들이죠. 그때까지 또 응급의학이 뭘 하는지 개념이 안 잡혔어요. 누구도 얘기를 안 해주더라고, 응급의학과가 뭔지. 그리고 학회 내부에서도 정말 미국 스타일로 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일본 그런 것을 결합해야 하는 건지. 뭔가 개념이 안 잡혔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 나름대로 한 번 찾아봤죠. 응급의학이 뭔가 도대체 뭐 하는 건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고, 그러던 과정이었죠.
근데 김세경 선생님도 우리한테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그랬지만, 그래도 외과 써전이잖아요. 틴티넬리도 한 번도 안 읽으신 분들이에요. 지금 뭐 윗 분들 읽으신 분들이 있겠어요. 그 당시 읽으신 분들이 없고. 그래도 김승호 교수님은 노력을 하신 분인 게, 전공의들하고 틴티넬리 텍스트 북이라도 리딩 하자. 신촌에서 아마 김옥준 선생이나, 최옥경 선생 물어보면, 이거를 처음부터 쭉 읽은 사람들이에요. 그런 노력들이 있었어요. 황성오 선생님은 카디올로지 입장에서 이렇게 좀 했었던 거고.
그러다가 하나하나 개념들이 재난도 중요하다. 그래서 재난이라는 개념도 들어오고. 이전에는 외상만 중요한 개념이었어요. 심폐소생술은 누구나 하는 거고. 그런 것들을 하다가, 정말 서브 스페셜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들을 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여의도에 처음 가서 만들었던 게 서부 지역 집담회예요. 제가 95년도에 여의도 저하고 이대 목동에 정구영 선생님하고 길병원에 이근 선생님. 이렇게 세 명이 의기를 모아서 서부 지역 집담회라는 것을 처음으로 했어요.
처음에는 각각의 병원에서 도대체 응급의학이 뭐인가. 원주에서 안무업 선생님은 카디올로지하고 그 개념에서만 하던 거고. 뭔지 다 몰라. 그래서 모이면, 넌 뭐 했니, 넌 뭐 했니 서로 물어보고. 그런 정체성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진지하게.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것들도 있지 않니. 내가 또 무슨 책을 봤더니 이런 내용이 있다더라. 또 다음에 가면, “내가 IO(intraosseous line) 이걸 잡았어”. 그러면 또 다들 가서 한 번씩, 골내혈관 잡고. 그다음에 중심정맥관 삽입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했어. 또 누가 와서 뭐 해봤어.
하여튼 그런 식으로 해가면서 서로 굉장히 위안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물론 여기 우리 동기들도 있었지만, 다른 병원에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내 4년 동안 100번을 때려치우려고 했지만, 이런 동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길들을 하나하나 찾아 간 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Q 모임이 굉장히 재밌었을 것 같아요?
A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얘기 못 하지만, 그때 당시에 얘기도 많이 하고. 노래방이라는 게 그때 처음 생겼을 거예요. 대학가요제 나온 연세대학교 의대 출신 ‘꿈의 대화’ 그런 것도 하고. 되게 많이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많이 마시고.
Q 응급의학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찾으셨습니까?
A 저는 그때, 임상 강사 되면서. 하버드 이런 곳도 들어가서 적혀있는 말들, 각 대학에 있는 것들. 이렇게 해서 나름대로 잡았죠. 그전까지는 맨날 칠판에다가 우리가 뭘 하는 과인가. 막 쓰면서 찾으려고 노력을 했었거든요.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죠.
Q 세월이 지나고 올해 들어온 1년 차 애들한테는 뭐라고 설명을 해주셨습니까?
A 올해는 설명을, 제가 주임 교수가 아니라서 (웃음).
Q 그래도 덕담을 한 마디 해주셨을 거 아닙니까?
A 그렇죠. 응급의학과 아직 할 게 많은 과다. 그리고 하면 할수록 매력적인 과고. 그리고 다른 데 가서 봉사 안 하고 직장에서 봉사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과고. 그리고 질리지 않는다. 네가 만약 안과에 망막 전공하는 사람이 됐다. 그러면 나는 잘 모르겠지만, 깜깜한 방에서 현미경으로 맨날 망막만 보는 것보다는, 우리는 냉탕 온탕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항상 지금 이 나이에도 환자 보면 너무 재밌다. 그런 얘기를 했죠.
Q 응급의학과의 장단점을 꼽아 보면은요?
A 응급의학의 장점은 자기가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어느 과보다도 생명을 다루는 과고. 그래서 굉장히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과죠. 단점은 굉장히 위험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과죠. 자기가 근무하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런 과인 거죠.
Q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A 요즘은 책을 많이 읽어요. 세계 철학사부터 시작해서. 인문학 책을 많이 읽죠. 아쉬웠던 게 대학교 때에는 너무 사회가 불안정해가지고 이게 차분하게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던 시간이 없고. 딱딱한 서적이나 그랬던 시절이 많았었고. 근데, 갑자기 임상으로 와서는 어마어마한 주제인 응급의학이라는 뭔지 모르는 정말, 김세경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도 한계가 있잖아요. 이 과가 무슨 과인지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처음이기 때문에 전공의 숫자도 적고, 그래서 로딩은 엄청 많고.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없었고. 그때 당시에 또 학회 발표하고 논문 쓰는 것을 전공의 보고 다 하라고 그랬어요.
Q 전공의 때 논문 많이 쓰셨다고 들었어요.
A 전공의들이 그걸 쓸 수밖에 없다니까, 발표도 하고. 덕분에 공부는 정말 많이 했죠. 근데, 뭔가 다른 전공 서적 이외에 다른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스텝도 처음이 돼서 전공의들 논문 지도해줘야 하고 나도 써야 되고. 내가 또 새로운 분야를 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이게 정말 응급의학의 가장 큰 숙제구나. 심폐소생술을 무지하게 가르쳤는데, 순환은 돌아왔는데 코마 상태가 대량 양산 체제로 갔는데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그래서 내과 하고 싸움이 많이 일어났어요. “왜 너네는 해봤자 코마 상태밖에 안 되는데, 그런 사람들 내 눈뜨고 한 명도 퇴원하는 사람 못 봤다. 그런 사람을 대량 양산 체제로 가느냐. 그만 해라.” 그런 내과가 많았어요. 입원하면, 내과 자리 차지하고 집에 안 가니까. 진짜 중요한 환자를 못 받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 이거를. 그래서 마취과 가서 물어보고 신경외과 가서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대. 그래서 공부를 해가지고 관심을 갖고 분야를 만든 거죠.
Q 그러려면 입원도 직접 받으셔야 되는데, 집에도 못 가실 거 아닙니까?
A 그렇죠. 그런 게 이제 연속으로 가는 거죠. 그다음에 학회에서 계속 발표하면서 우리가 그래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PCAS care(post cardiac arrest care; 소생술 후 치료)를 응급의학이 담당하고 있어요. 중환자 예약하는 팀에서 근데 왜 응급의학이 해야 하느냐. 내가 시작할 당시에 중환자 의학이 거의 발전이 없었어요. 그때 세브란스하고 아산 병원이 처음.
그러면 소생술 후 환자는 코마 상태로 있는 사람은 전국 규모에 발생하는데, 중환자 의학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 우리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런 사람들은 다 죽은 거였겠죠.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까, 이거는 응급의학이 담당을 해야겠다. 그리고 권역 응급 의료 센터 이런 게 생기면서, 응급 센터 전담하는 중환자실도 만들어지고. 그래서 우리가 하드웨어를 정확하게 갖추고 있고 소프트웨어도 갖추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소생술 후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Q 저번에 학회 때 한 번 발표하셨던, 되게 예후가 좋았던 케이스가 있었잖습니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케이스가 있나요?
A 그래서 첫 번째 케이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그게 97년 5월이었어요. 그때 여의도에 되게 큰 빌딩의 소유주가 의사인데. Mammoplasty를 하는데, 이게 바르는 리도카인을 하고 했는데, 그게 용량을 넘어선 거야. 전신 마취를 안 하고 이걸 하다 보니까 시저가 발생한 거야. 그래서 옆에 있던 내과 의사 선생님이 그거를 뭐라 그랬겠어요. 그걸 발륨을 줘야 한다, 발륨을 줬더니 숨을 안 쉬어. 그래서 119 불러서 CPR 하면서 왔던 거죠. 근데 그 사람이 국회의원도 너무 많이 알고, 우리 선배들도 너무 많이 알고. 그래서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어요.
그때 당시에 첫 번째로, 그러면 내가 여태까지 공부만 했던 거고 동물 실험했었던 건데, 한 번 적용을 해보자. 그래서 쿨링 블랑켓 하고 해서 34도까지만 내려보자. 그래서 34도까지는 내렸어요. 근데 안 깨더라고, 3일이 지나도, 5일이 지나도. 그래서 MRI를 찍어 봤어. 그랬더니, 기저핵(basal ganglia)에 뇌경색이 딱 온 거야 이게. 그래서 논문을 찾아봤더니 한 14 케이스가 나왔는데, 식물인간으로 가는 케이스의 특징이 나비 양상으로 기저핵이 먹는 거. 그래서 이거는 기저핵이 나비 양상으로 먹어서 식물인간이구나라고 생각을. 그래서 포기를 하고 있었어요.
근데 14일 지나서 엘튜브가 뽑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1년 차 보고 올라가서 꽂아봐라 했더니, 꽂는데 소리가 나더래요. 막 뛰어 와서 환자가 좀 이상해요, 말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올라가서 꼬집어 보니까 조금 깨더라고. 그래서 그다음에 그 사람이 조금씩 좋아지다가 나중에 완전히 깼죠. 그래서 그게 유명해진 거예요. 국회의원들 다 알지, 선배들 다 알지. 온갖 신경과에서도 관심 있죠. 모든 사람들이 입원시키지 말라는 거 우리가 다 입원시켰거든. 근데 이 케이스를 첫 번째로 했는데, 긴가민가 했는데 진짜 깬 거야.
그래서 이거 조금 내린 건데, 사람이 깨네? 그래 가지고 그다음부터 그런 걸 했더니, 반은 깨고 반은 안 깨더라고. 그래서 94년도에 학회에서 밀레니엄 심포지엄이라고, 그걸 발표하고 특강을 했어요. 이한식 선생님인가 물어보더라고. “왜 거기는 그렇게 성적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때 당시도 긴가민가 했었던 거죠. 그래서 그게 어디서 취재를 했는지, 조선일보에 막 나오더니, 그다음 날에 9시, 8시 뉴스에 나가고 전국에 있는 선데이 서울 막 쫙 나왔어요.
그다음에 문제가 생긴 게 순환계 학회장이 우리 병원에 홍승조 교수님이라고 있는데. 저분이 자기 환자 다 가져갔다. 저를 윤리 위원회에 재소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톨릭대 1호 윤리 위원회 재소가 된. 결론은 이겼죠 제가. 근데 그게 왜 그렇게 됐냐 하면, 체온을 코마 상태인데 왜 이걸 낮추느냐. 그다음에 이제 부제목으로 들어간 게 자기 환자 다 빼냈다.
그런 거는 어떻게 다 소명이 됐냐 하면, 첫 번째거는 우리가 다 IRB라는 게 없었잖아요. 그래서 제 석사, 박사 학위 논문으로 그걸 다. 동물 실험도 많이 했었고, 임상 실험 거기에서 하는 것들 있잖아요. 다 논문으로 하고. CMC에서도 하는 커미티를 다 통과한 거예요. 이게 비윤리적인 거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다 논의를 해서 통과 한거다. 두 번째 카데올로지 이런 얘기는, 컨설트를 냈다. 그래서 홍승조 교수 파트 있는 곳에서 3명이 팀이 되가지고 우리 케이스 논문에 나온 케이스를 로우 데이터까지 다 달라고 해서. 이게 맞나 안 맞나 일일이 다 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틀린 게 없다고 나왔고.
Q 그럼 교수님께서는 동의를 하셨나요?
A 동의를 할 수밖에 없죠. 근데 이게 문제가 된 게 응급의학과에서 입원을 시키기가 어려운 거예요. 제가 그때 당시에 몇 살이나 되었겠어요. 그리고 과장이긴 한데, 다 60대 된. 그리고 그때 과장 회의 가면, 담배 하나 있고 재떨이랑 라이터 하나씩 사람마다 있었던 시절이에요. 그러던 시절이었어요. 얘가 무슨 저게 펠로우 방금 끝난. 그러니까 순환계 학회 이사장이신 분이. 그래서, 입원을 시키기가 사실은 되게 좀. 그래서 가져갔죠. 왜 그러냐 하면 순환계 내과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그와 동시에 의학 분업 터지고 이러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Q 원래 22분이 (응급의학과로) 시작을 하셨는데, 지금 2000명이 나왔지 않습니까. 아카데믹하게는 얼마나 발전했을 까요?
A 아카데믹하게 많이 발전한 부분도 있고. 우리 멀티 센터 스터디 데이터가 중요하게 인용이 되고. 그런 상황이 됐거든요. 우리는 연구할 수 있는 상황 같은 게 되게 좋은 게, 우리는 좀 덜 시키잖아요. 근데 미국이나 유럽은 아주 적극적으로 시키거든요. 유럽 같은 경우는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이 사람을 오래 끌어서 가는 것보다 빨리 보내드리고 새로운 집중해야 할 사람을 해요. 의료 자원이 칼 같더라고요. 이 사람 깰 건지 안 깰 건지를 확인하고 중단을 해야 하는데. 롱 텀으로 팔로우 업도 안 된 가운데서 중단을 하면 그게 심각한 거라, 그거를 연구할 수 있는 게 중요한.
Q 1500명 정도는 봉직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가서 취직해서 일들을 하고 있는데. 이 친구들은 사실은 소생술 후 상태(post ROSC)를 접근하기가 어렵고, 관심 자체도 크게 두지 않는 터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환경이지 않습니까. 이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죠?
A 근데 그런 것들은, 제가 이제 전체적인 수준을 한 게 아니라, 한 분야만 한 거고. 굉장히 다양한데 분야가. EMS도 발달한 그런 데도 있고. 뭔가 이렇게 툭툭 튀는 분야들이 있어요. 근데 그 포인트가 왜 중요하냐면, 한 분야라도 튀는 분야가 있잖아요? 그러면 서로 영향을 줘서, 다른 분야를 하더라도 그 수준으로 금방 따라올 수 있는.
그래서 어떤 응급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 분야라도 제대로 발전을 딱 시켜 놓으면, 나머지 시작하는 부분들이 같이 교류하면서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기반을 마련하다고 생각을 해서, 앞으로는 30년이라는 게 길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짧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학문적인 것으로 봤을 때는. 그래서 우리는 growing 하는 과정이다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 소생술 후 치료가 중요한 게 전공의 과정 중에 중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능력, 그리고 자존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중환자 중에 중환자를 케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면 알잖아요, 모든 과에서 알고 그러면. 우리가 2차 병원에 취직하고 그러면 밤에 중환자도 봐야 할 것 아니에요. 이때 소생술 후 치료를 기반으로 해서 사실 이것만 제대로 하면 거기 있는 환자들 다 볼 수 있거든요. 에크모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자기 선에서 케어할 수 있는 역량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그런 역량이 되는 권역 응급 의료센터라든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환자를 보내지, 이 개념이 없으면 못 보내요. 그런 의미들이 있는 것 같아요.
Q 응급의학과 멋있는 과인 가요?
A 멋있죠. 영웅이 되려면 응급의학이나 트라우마 톨로지가 되야죠.
Q 다시 응급의학과 하라고 하시면 하시겠습니까?
A 저는 하죠.
Q 아주 친한 후배나 친척이 있으면 응급의학과 하라고 권유하시겠습니까?
A (당연히) 하죠.
응급의학과 1기 22명의 개척자들,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기 [인터뷰 모음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