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 57, 58번째
매일매일 쓰레기 줍기. 밤에 1시간~1시간 반. 별로 줍는 양도 없는데 돌고 오면 시간이 그렇게 지나있다. 날이 더워져 땀이 난다. 이제 일상 루틴으로 단단히 자리 잡혀가는 느낌이다. 일이 너무 밀려서 휴일에 동네 뒷산조차 가볍게 오르지 못하고 있는데 얼마간 운동이 되고 신체활동으로 스트레스도 풀린다. 일정상 지금은 마음이 허겁지겁 응당 쫓겨야 하는데^^, 그래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꼬박꼬박 챙겨보고 내친김에 ‘영희’로 나온 배우 정은혜 작가님의 유투브까지 찾아보고 삼시세끼 또한 한 끼도 거르지 않으며 식후에 커피까지 꼬박꼬박 정성스레 내려 마시는 등 먹고 마실 거 다 하고 놀 것마저 다 하고 논다는 게 함정 ㅎㅎ
요즘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줍고 있는 건 유리 조각과 때로 유리 조각 못지않게 날카로운 플라스틱 조각들이다. 플로깅 가방에 신문지랑 비닐을 넣어서 다니다가 잘 싸서 버리면 된다. 파상풍 예방주사를 미리 다 맞았어도 파상풍으로 그만 돌아가는 미화원분들이 적지 않다는 뉴스가 진실임을 실감하고 있다.
옆동네 상수도(하수구?) 뚜껑 옆에 비닐이 떨어져 있어 줍는데 산산조각난 맥주 병조각이 박혀 있다. 신문지에 놓고 두 번 싸서 비닐에 꽁꽁 포장해서 버린다.
그리고 며칠 전 주은 건강음료 병조각들. 역시 신문지에 놓고 싸서 비닐로 안 움직이게 꽁꽁 묶어 버림.
엊그제 잠이 안 와서 TV를 켰다가 <우크라이나 침공 100일 1부 포화 속으로> 다큐멘터리를 봤다. KBS에서 전쟁중인 우크라이나에 들어가 제작한 것으로 재방송인데 (매달 TV 수신료 2500원을 기꺼이 낼 가치가 있는) 정말이지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침공 100일에 이르기까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이어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동편 러시아 국경에 접해 있는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를 공격하고 있다. KBS 윤재완 PD와 제작진이 위험한 하르키우로 들어가서 피난을 가지 않거나 못 간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찍었다.
(유투브에 <우크라이나 침공 100일> 1,2부가 다 공개되어 있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wvQyKEXQFJI
하르키우는 IT업체 등이 많은 상업도시였다고 하는데 전기와 수도는 이미 러시아 공격 초기에 끊겼고 90% 이상 도시 인구가 이미 피난을 갔다 한다. 남은 이들은 하르키우 시내에 있는 전철역사 안으로 피신을 했는데, 그조차도 못하는 노인들은 포화가 그치지 않는 곳 지금은 폭격을 맞아 너덜너덜해져서 도저히 살만한 환경이라 볼 수 없는 자기집이나 아파트 지하 등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하늘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퍼지고 요란한 포화가 시작되는데, 그런 와중에 한 사람이 1킬로 넘게 걸어서 물을 긷기 위해 간다. 이웃 할머니들과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위해 한 아저씨가 물을 길어와서 나눠 주는 것이다. 아저씨는 주변에서 폭격이 시작되면 길을 걷지 않고 길한 가운데서 엎드려 있다가, 근처 건물로 뛰어가 숨는다. 폭격이 멈추면 다시 걷는다. 그렇게 물을 길어와서 이웃들에게 준다. 폭격이 시작되면, 95살 할머니는 모두를 위해 신께 기도한다. 안정제를 먹고 지하에서 지내는 한 70대 아주머니는 두려움에 떠는 반려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아주머니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다시는 지금 내가 겪는 이런 감정을 안 겪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포화에 놀란 KBS 제작진한테도 안정제를 나눠준다. 포격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아주머니는 밖에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서 봄에 핀 꽃을 보고 그래도 작게 웃으며 또 하루를 산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살아가는데, 같이 살려고 버티고 또 버티는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 아니, 아니다. 인상적이라 쓰기에는, 내가 느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 인내심을 향한 경외심을 도저히 담을 수는 없는 말 같고 지금 포화를 견뎌내는 분들께 큰 실례가 될 것 같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많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울거나 흐느끼면서 인터뷰를 했다....폭격이 지나가고 내 목숨을 무사히 건져도 혹시 내가 아는 혹은 주변에 있던 누가 다쳤을까봐 얼굴이 다들 사색이 되었다....일 때문에 하르키우로 이주해 사는 러시아인 한 명은 “모스크바에 사는 어머니조차 (러시아 언론의 거짓말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참상을 믿어주지 않는다, 나는 이제 우크라이나 사람이다”하면서 슬퍼했다.
아직도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협정을 맺지 못한 채, 나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다. 내가 십대로 성장할 때에는 냉전이 끝나 동서장벽이 와해되고(91년 소련 해체) 안심하던 차에, 1990~1991년 (아버지 부시의) 걸프전을 TV 중계로 보았다. 전쟁은 지구상에서 끝나지 않았으며 지역 내 분쟁으로 계속되고 있음은 알고 있지만, TV로는 포화로 마치 재미난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마냥 번쩍이는 하늘 영상(거짓된 전쟁의 모습)만 나오고, 중동 지역에는 가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중동의 영화 한 편조차 변변히 본 적이 없어서 석유가 넘쳐나는 그곳에 미처 사람이 산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1994년에는 한반도가 정말 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극적인 '제노바 합의'(94년 10월)로 위기에서 벗어난 일이 있었다. (당시 국제적 정세에서 한반도 상황이 매우 급박했던 것으로 국제관계학, 정치학에서는 이미 평가한 바 있음)
그러다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아침,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선명히 기억이 난다. 개전 임박 전에 영국,터키,스페인, 일본 등의 평화활동가들이 전쟁을 막기 위한 인간방패(human shield)가 되려고 이라크로 갔었다. (한국인도 있었음) 전쟁이 시작되고 이라크에서 열화우라늄탄과 무인살상무기가 사용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해 가을과 겨울 즈음에 이라크 반전 시위에 나갔다. 이라크전 발발 원인이라던 (아들 부시와 '부시의 푸들'이라던 별칭의 토니 블레어가 주장한 바 있는)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WMD의 존재는 거짓이었음이 그 이듬해 드러났지만, 결국 이라크전도 한국의 이라크 참전(파병)도 뭣 하나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시위를 나가며 적어도 이라크에 석유가 아닌 테러리스트가 아닌, 사람이, 사람들이 있다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라크 사람은 한 명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라크에는 사람이 산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됐다. 그래서 내 삶에 의미가 있었다.
3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기 전쯤, 집안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두 번이나 (끌려)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도 다녀온 나의 할아버지.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어찌어찌 어렵사리 마련한 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한국군으로도 인민군으로도 두 번이나 전쟁에 나가야 했는데 (슬쩍 군에서 도망 나와서 다시 농사를 짓다가 다시 군에 끌려가고 그런 식이었다고), 어찌어찌 또 살아 돌아와서 소작도 부쳤다가 도시에 나가 일도 했다가, 내가 아홉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무렵에는 도로 (남의 논)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사지을 농지를 당신 소유로 갖기를 소망하고 소망해 땅에서 일하고 또 일하셨건만, 경제개발시대의 날로 늘던 도농격차에, 자식들 키우고 그러느라고 끝까지 한뼘 농지조차 갖지는 못하셨고, 화창한 4월 봄날 오후에 논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셨다. 우리집서 가장 먼저 부고를 들은 사람이 어린 시절 나여서인지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들어주신 작은 나무책장은 이제 내게 없고, 그 날로부터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신이 원하는 농사꾼이기도 목수이기도 했다가, 동시에 자신이 절대 원치 않는 징용자이기도 군인이기도 도시의 일용노동자이기도 했으나 결국 농사를 짓다 생을 마친 할아버지의 인생을 잠시 생각한다.
그 누구도 죽이려는 마음,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려하거나 (심신의) 상처를 입히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그저 땅에서 사람으로서 곡식을 일구고, 사람이 그저 사람처럼 살아가는 삶을 살길 바라고 그러려고 했던 할아버지의 인생을 내가 알게 된 건, 위에 썼듯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굴곡진 현대사 탓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살아가려하는) 용기 있고 품위(존엄) 있는 모습을 전하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별로 하지도 않고 (심지어 쉬쉬하며) 꺼리기도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냥 이런 이야기가 해보고 싶었다.
오늘의 정리
전쟁을 하지 않는 곳에 살지만 일상에서 전쟁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와 같이 하루를 산다. 극도로 밀집된 서울 빌라 숲속 곳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유리조각, 플라스틱 조각에 어쩌면 맨 먼저 찔리게 될 어린이나 길냥이, 미화원 분이나 혹은 폐지줍는 어르신들. 유리 조각 쓰레기만큼은 잘 보이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집안에서 힘을 가진 가장의 폭력을 감내하고 숨죽여 살아가는 여성과 자녀. 부모나 혹은 선생님의 학대를 견디며 하루 속히 학대를 벗어나기만을 구출만 학수고대할 아이들.
길거리 성추행이나 데이트 폭력으로 미칠 것 같은 하루를 보낸 여성들. 전철 시위했다는 이유로 욕에 욕을 먹고 생명의 위협마저 받는 장애인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목표로 단식까지 하는데 더럽다며 지탄 받는 성소수자들. 나날이 느는 자산격차로 인해 빈곤으로 상대적 박탈감으로 각자의 힘든 처지에서 괴로워하는 젊은이들. 막대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일할 힘도 항의할 힘도 다 빼앗겨버린 이들..........
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에도 전쟁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적지 않고, 또 그런 중에도 사람답게 버티고 또 버티면서 살아가기를, 살아내려 하는 이들도 분명 많이 계실 것도 기억하고 싶다.
지금 나름대로 잔잔하게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 가운데 일상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내가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나는 마땅한 말을 다 찾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은 나의 과거와도, 나의 현재, 미래와도, 조상의 과거나 아이들의 미래와도 맞닿아 있다. 나의 가깝고 또 먼 모든 시간과 다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며칠 전에 잠깐 훝어본 책 <어크로스 페미니즘> 에서 내가 애정하는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요즘 외래어 맞춤법으로는 쥘리에트 비노슈라 쓰는 것 같다^^)가 인터뷰한 구절을 보았다. 쥘리에트 비노슈가 나오는 영화는 단 한번도 실패라 생각한 적 없을만큼 좋은 영화가 많아서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배우가 되기 전에는 정말 궂은 일도 많이 하고 그런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나중에 유명해져서는) 난민 구호와 국경 없는 기자단 등 멋진 사회적 활동도 많이 하는 배우라는 건 처음으로 알았다.
“너무 많은 환상을 갖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착각에 빠지지 않는 거죠. 진실을 추구하는 겁니다. 우리만의 진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에 담기는 진실 말이에요. 그것만이 유일하게 추구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되면, 결코 거짓 환상의 길로 빠지거나 실수하지 않을 거예요. 마침내, 진정한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될 겁니다. 자기에게 묻는 거예요.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지금 내가 진정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에게는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답니다.”
<어크로스 페미니즘> (안희경 지음, 글항아리, 2017년) 36쪽. (인터뷰어 안희경의 "당신은 무엇을 추구하나요?" 물음에 대한 쥘리에트 비노슈의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