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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 Feb 07. 2018

박자 느린 길을 따라

그 오랜 길, 차마고도를 걷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자본주의 추악한 집합소로 설정된 유바바의 온천장밤을 밝히는 불이 켜졌다. 객잔이었다.

성곽 없는 64개 고성 거리에서 객잔의 금빛 조명은 이정표 역할을 했다. 장에서 사람들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내게도 저 객잔의 불빛처럼 마음을 밝혀준, 하쿠와 가오나시가 곁에 있었다. 6740m 메리설산을 가진 운남성의 리장 광장에 서서 내 안에도 금빛 조명을 다.




800년 전 명나라 때 만들어졌던 리장 고성은 1996년 대지진 후에 세상의 관심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수 단장했다. 옛 마방들이 모여들었던 무역의 장(場)이었다. 93%가 산으로 둘러싸인 리장은 박자가 느리고 공기가 깨끗하여 여행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현대적 상업로 과거의 맥을 잇고 있었다.


과거로의 회귀 같은 골목들이었다. 

실버 공예품소비 욕구가 꿈틀거렸다. 이어링을 하나 구매했다. 착용해 보니 원하던 느낌이 아니라 바로 환불을 원했다. 계산 이후라 25% 페널티를 요구했다. 황당했으나 그들의 상업 문화를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 중의 넉넉한 마음이 평상심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작은 마음들이 삶을 얼마나 옭아매고 있었던가.


청두(성도) 공항에서 국내선을 이용하여 여강 공항으로, 다시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호도협 교두로 이동했다.

금사강을 따라 나시객잔으로 가고 있었다. 길의 끝에는 동티베트가 있다는 차마고도였다.


중국 운남성에서 티베트 라사까지 2100km의 차마고도 중 일부의 거리를 걸었다. 하바설산 절벽길이 좀 더 아찔하지 않음은 아쉬웠다. 하바 설산이 아니라 하바 돌산이라 부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운남성의 2월은 우리의 봄ᆞ가을 날씨라는 정보를 믿었는데, 계절 탓에 설산이 아닌지 본디 험상한 빛의 산인지 궁금증조차 추위가 가두었다. 걷고 또 걸어도 몸은 데워지지 않았다.

2800m 고도 28 밴드를 오른 후에 중도객잔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마방들이 28 밴드까지 말에 사람을 태우거나 배낭만 실어 나른 후에 돌아오고 있었다. 마주치기만 하면 말을 타지 않겠느냐고 묻곤 했다. 동물 살점과 접하는 일이 징그럽고,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에게 돌길을 찬찬히 걸어달라고 주문할 수도 없고, 트레킹을 원했고, 등등의 이유로 묵묵 걷기만 했다.


출발했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중도객잔이 있는 마을까지 간다는 빵차라는 것도 있었다. 어떤 생김새길래 이름이 그러한지. 만나진 못했다. 오직 걸음. 오랜 세월의 길을 두 발로 걷는 희열만 중요하게 생각했다.

고산증은 없었다.

나시족의 삶을 지탱했던 옥룡설산을 바라보며 내려가는 길은 만년설과 구름만으로도 황홀한 풍광이었다.

옥룡설산은 '사람이 오르지 않은, 오르지 못하는' 태고의 자태를 간직한 자연이었다. '이것이 산이로소이다.'의 자부심을 가진 듯 근엄했다.


아득한 아래로 호도협 물살이 푸른빛과 우윳빛 조화로 흘러내렸다. 눈이 녹은 물이 금사강을 이루고 장강으로 흘러 상해로 이어지는 유유한 물길이었다. 

기를 쓰고 정복하는 인간의 발길을 외면하고 옥룡 설산이 그대로 산으로만 존재하는 이유를 몽골인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여강 마을에서 마방을 활용하여 3800m까지 올라간 후에 5100m 봉우리까지 오르는 길이 한 군데 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이유는 사방이 절벽이고, 석회암이어서 암벽 타기도 불가능한 산이다.

5500 정상을 등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을 사람들도 입구를 막고 반대하고 정부도 입산 허가를 하지 않는다.

1993년에 외부적인 노력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아 중ᆞ일(中 ᆞ日) 등반 대회를 열었던 적이 있었다. 산사태로 산악인들이 몰사했다. 사람들은 기(氣)가 센 산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유명 산악인도 등반을 시도했다가 돌아간 적이 있었다.


히말라야의 끝 봉우리로서 그 자리에 그대로의 산으로 있어 주어 고마운 옥룡설산이었다.

며칠 뒤에 보았던, 만년설이 녹은 백수하 협곡 물은 석회와 구리를 품고 반사되는 물빛이 찬연했다. 

6시간쯤 걸은 후, 목적지 300m 남긴 곳에서 다리가 휘청거렸고 팔이 아파서 스틱도 접었다.

나의 가오나시가 배낭을 달라고 했으나 카메라와 물병만 넘기고 중도 객잔에 힘겹게 도달했다.

뼛속까지 살뜰하게 추웠고, 찬물만 나오는 세면대 앞에서 예민증이 폭발했다. 좋은 시설의 숙소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살벌한 추위 탓에 목놓아 울어버리고 싶었다.


엄마 49제가 끝나고 바로 떠난 트레킹이었다. 인천 공항 약국에서 '가만히 생각하면 어디가 아플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산삼 물약이라며 내민 카드로 5만 원을 순식간에 결재해 버렸다. 그 약사가 그제야 고마웠다.


중도객잔 통유리로 풍경화처럼 옥룡설산 풍광펼쳐졌다. 별이 없는 밤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중도객잔의 마을 길을 산책했다.

검정 닭 한 마리가 홀로 뒤뚱거리며 긴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먹이를 찾느라 기웃거리지 않고 연신 빳빳한 고개로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사명을 가진 어미닭일까.

나는 어젯밤에 중도객잔의 특별 요리라던, 속살이 시커멓던 오골계를 먹지 않았다.


구름이 산 허리에 걸려 면사포처럼 하늘거리고, 호두나무 숲에서는 주인 있는 염가 풀을 뜯을 때마다 방울 소리를 울렸다.

염소 떼를 몰고 가는 아낙의 뒤를 따라 호두나무 숲길을 지나 차마고도를 다시 걸었다.

해는 11시가 되어서야 구름을 뚫고 겨우 빛살만 내려보냈다.

일조량이 적은 산속 마을에서 사람들은 계단식 밭을 일구어 연초와 보이차를 재배하고, 호두나무를 가꾸고, 닭과 염소를 기르며, 박자가 느린 삶을 살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호도협 물소리를 가까이서 즐기며, 트레킹 종착점인 장선생 객잔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상호도협으로 향했다. 배낭 속에 넣어둔 커피 믹스 봉지는 고도로 인해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실크로드보다 앞선, 옛 무역로라는 설명 이상이 필요한 차마고도 트레킹을 마무리했다.

운남성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한 중국은 교통수단과 침략 수단으로 말을 활용했다. 점차 많은 말을 내준 티베트는 국력이 약화되었다. 당나라는 공주를 차마고도를 따라 티베트로 시집보내어 피를 섞었다.

동티베트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운남성에 정착하여 그곳의 샤머니즘을 라마 불교에 흡수시켰다. 차마고도는 무역과 정치와 종교의 길이었고, 탐욕의 냄새가 배인 길이었다. 그 길을 품은 하바설산의 험상함이 예견한 고뇌를 짊어진 라마불의 얼굴을 닮았다고 느꼈다.


울긋불긋하던 타르초가 떠올랐다.

소수 민족들의 삶을 살필 수 있는 민속촌에서 라마 불교의 상징인 타르초가 옥룡설산을 바라보며 펄럭이던 정경이 여전히 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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