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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 Aug 11. 2019

피르스트 트레킹

케이블카로 피르스트까지 이동했다.

피르스트(First).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란 뜻이었으나 약간의 어지럼증을 잠깐 느꼈던 4000m 이상의 고도가 아니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아스피린을 미리 먹어라, 타이레놀은 트레킹 도중에 먹어도 된다.'는 등의 조언이 약을 싫어하는 내게 불편한 간섭이어서 온전한 컨디션인 척 가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피르스트(2168m), 바하알프제(2265m), 파울호른(2686m), 라우처호른(2230m), 쉬니케 플라테(2068m)에 이르는 17.3km의 트레일 트레킹 후에 빌더스빌행 마지막 열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비는 아침부터 내렸다.

잔도에서 낭떠러지의 스릴도 못 느끼고, 산 아래의 풍광도 숨어 버렸다. 연 이틀의 비가 유감이었으나 우중 트레킹의 운치와 낭만을 즐기며 마음속 안개만은 걷어냈다.

함초롬한 야생화를 살피고, 살점이 두터워 차라리 늙었다고 말하고픈 빙하를 밟고, 부안 채석강 돌들을 닮았던 너덜길을 걷고, 알알이 흩어지는 폭포수에 얼굴을 비고, 길 잃은 악어 새끼와 수없는 달팽이들을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지천으로 자라는 야생 블루베리를 따서 먹었고, 높은 바위에 올라앉은 mamort 부부도 만났다.

알프스의 많은 것들, 그중에서도 반려 식물 다육이를 흔히  것은 하이디를 떠올리는 것보다 현실적인 일이었다. 


살아 숨 쉬는 많은 것들과 살뜰히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 알프스를 적시는  때문이었다.

장대비를 맞으며 하루 종일 알프스를 걸었다. 사성점이 있었으면 정확히 표현될 것이다. 하루 :종일이었다.

훗날에 홀로 적적한 날이면 장한 기억으로 회고할 장면 하나가 바로 이 날이 아닐까.


바짓가랑이를 타고 내려간 빗물이 등산화 속으로 고였다. 걸음마다 철버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기가 알프스를 휘감은 비안개처럼 온몸으로 번졌다. 와중에도 배낭 속의 여권이 걱정되었다.

그린덴발트 행 기차를 타기 위해 빌스터빌에 도착했을 때 5분 전에 기차는 떠났다고 했다. 대합실 창밖으로 양말의 물기를 짜서 버리고 등산화 속의 빗물을 쏟았다. 레인 커버를 씌었던 배낭마저 흥건하게 젖었으나 다행히도 여권은 멀쩡했다.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린 건 다음 열차만이 아니었다. 정직한 몸의 언어가 여름 감기도 알아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목초 썩는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드는 마지막 기차에 오르니 눈물샘이 터질 듯 부풀었다. 뼈가 시렸다. 힘들지 않고 얻는 것은 없다.

                                                         -2019.7.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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