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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Oct 11. 2020

꿈 밭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온 맘과
 두 눈에서

 가을이다. 아파트 앞 화단도 국화꽃이 몽글몽글 필 준비 중이다.

분명 그 자리엔 얼마 전, 봉숭아꽃이랑 과꽃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공동 주택인 아파트 화단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나 보다. 

덕분에 눈 호강이다.   

  

 그냥 따뜻하고 흐뭇한 맘이 들게 해 주신 분을 만나 보진 않았다.

분명 삶 자체가 시인이신 분이 아닐까 싶은 건

몇 해 전 만난 할머니가 생각 나서다.    

 

 아파트 통로 앞 화단 속의 꽃들이 계절마다 바뀌었다.

 늘 싱그럽고 향긋한 꽃향기를 뿜으며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나다닐 때면  눈길이 저절로 머물고 괜히 기분이 좋아져 방긋 웃게  되었다.   

 

 어느 날, 싱싱함을 다하고 시들해지는 꽃을 바꾸어 심느라 분주하신 할머니는 

두 발만 떼면 다다르는 앞 집 할머니였다.

일 다니며 먹고살기 바빠 엘리베이터 안이나 동시에 현관문 열다 마주칠 때면

눈인사만 서로 하고 지내던 때였다. 많이 놀랍고 반갑기까지 했다.

한 통로 서른 가구 중 고운 꽃에 눈길 가게 하신 분이 

앞집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그 현장에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할머니의 친정동네인 평창에 오라버니가 사시는데,

몸이 편찮아서 한 번씩 들린단다. 

꽂이 좋아 앞뜰 여기저기 피어있는 야생화를 뿌리째 담아 오신 거다.

여러 사람 오며 가며 볼 수 있고, 할머니도 꽃이 좋아 화단에 심고 계신 거였다.


 그 이후, 우리 집에선 꽃 할머니란 별명으로 불리었다.

말문을 트고 난 어느 날, 앞집 할머니 댁으로 차 한 잔 나누자며 초대를  하셨다.

두 발만 떼면 갈 수 있는 곳인데.....

 이웃들과는 애들이 어렸을 때, 니 집 네 집 할 것 없이 오갔다.

애들이 다 큰 데다 일을 다니고 있고  이사 또한  잦다 보니 쉽지 않았다.

새로운 이웃을 사귀기도. 친구를 맺기도.    


“띵~동!” 

 기쁘고 들뜬 맘으로 벨을 꼭 눌렀다.

 반가운 얼굴로 현관문을 여시는 순간, 난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집이 아닌 것이다. 

무슨 무슨 미술관, OO 예술관, OO 박물관, OO 갤러리로 불리어야 할 곳이었다. 

온 거실 벽과 방 방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한 땀 한 땀 손수 만든 작품으로. 


 할머닌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된 듯

거실과 방을 돌며 한 작품 한 작품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주셨다.

“우와~~~!” 

그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실감 나고 감탄만 나올 뿐!


 작품을 탄생시킨 주인공은 할아버지!  흐뭇하게 웃으며  말문을  여셨다.

평창의 어느 한 동네에서 양복점을 하셨단다. 

 왼손이 태어날 때부터 장애여서 다른 일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어머님께 배운 바느질로 양복점을 여신 거였다.

오른손을 사용하고 왼손은 받쳐주는 역할인데도 쉽지 않으셨단다.  


 아들 둘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두 아들이 동네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 있었다.

“너 네 아버지 팔 병신이지?”

“병신 아들~~!”

아~ 그 말을 건너 건너 듣는데, 아버지로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단다.


우리 어렸을 때는 윗동네 아랫동네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서 놀았다.

여럿이 놀이하며 사이좋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말다툼이나 몸싸움 또한 끊이지 않았다. 

여자애들은 싸우다가 머리채를 잡는 것이 다반사였다.

몸집 작고 말싸움이 안되던 나는 피하거나 울거나.


 싸우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거나 상대방한테 질성 싶으면

그 친구의 약점을 폭로해서 상대편의 기를 꺾는 비겁함이 많았다.   

 두 아들들도 그런 류의 비겁한 아이들로 인해 어린애들이 받았을 상처를 알아채신 거다.


 당신의 장애로 받고 있는 아이들의 상처를 밤잠 설치며 고민 고민하다 두 집 살림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셨단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혼자 벌이로  대단히 많이 벌던 것도 아니고, 서울로 보내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을 테니.

   

 평창에 혼자 강제로 남겨졌다. 

서울로 다 같이 이사를 갈 수도 없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게 뻔하니까.

어린 두 아들과 애들의 엄마만 서울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병신으로 놀림받지 않게 하려는 가족 간의 생이별!

아 ~ 그 아픔과 슬픔이  어머니 아버지의 가슴을 얼마나 헤집어 놓았을까.

   

 가족을 서울로 보낸 뒤, 먹고 싶은 거 덜 먹고 사고 싶은 거 안 사고 아낀 

돈을  꼬박꼬박 서울로 보내셨단다.

아버지를 멀리 두고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웠을 어머니!

아들 둘이  영리하고 똑똑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S대에 들어가서

큰아들 모 방송국 기자 되고, 작은 아들 의사가 되었단다.   

 팔 병신 아들이라  놀림받던 애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 눈물 나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잘 자라준 것이다.

그 아들 둘이 장가를 가고,  손자 손녀를 낳아 잘 살고 있다셨다.  

  

 그 후, 어르신은 평생 해 오던 업을 살려  남은 천조각과 재활용 옷을 이용해

다른 쓰임새의 제품을 재탄생시켰다. 

재활용 옷들이 가방과 모자, 또 다른 무언 가로 바뀌는 재미가 좋으셨단다.


 이제는 업이 아닌 취미로 하니 밤새 바느질과 미싱 앞에 앉아도 힘겹지 않고,

작품 구상에  어린애처럼 들뜨기까지 하시다니.


 그러다 지금까지 해 오던 재주를 살려 전시도 가능할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조각을 이어 붙여 하나, 둘 작품을 만들었다. 

그 속에 직접 쓰신 시 속의 소재를 담아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신 것이

현관 들어서면서부터 집 전체가 갤러리가 된 거였다. 


 규레이터 이상으로 설명을 잘해주신 할머니.

곁에서 한 땀 한 땀 기울인 정성을 다 알기에 자처해서 저렇게 

궁금해하는 지인들께 알려준다는 거다.   

 

 두 분의 꿈이 있다면, 죽기 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모든 작품을 기증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좋아해 줬으면.....

소박한 꿈을 가진  두 어르신과 지금 우리 화단의 가을 국화꽃을 심고 가꾸며

어떤 꿈을 꾸고 계실 분의   

소박하고 따스한 맘이 꿈 밭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온 마음과 두 눈에서 계속 계속 피어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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