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만 지나면 '농협'이라는 친근한 글씨의
커다란 달력도 한장만 남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10대에는 10킬로, 20대는 20, 30대는 30으로......"
시간이 참 빠르게 간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점점 줄어듬에 따른 강박감일까?
가만히 돌아보면 사실 그랬다.
고교시절, 한여름 이었다.
자취집이 학교근처라 휴일날 밀린 공부를 하겠다며 호기롭게 교실을 찾았다.
넘어가지 않는 책장 위로 창밖의 플라타너스 나무잎은 잘도 반짝였다.
플라타너스 나무, 낭만의 나무....
김현승 시인의 시때문에 그런건 분명히 아니지만,
플라타너스 나뭇잎을 보며
공부를 하기 싫은 이유와 굳이 오늘 안해도 된다는 이유를 찾았다.
학교앞 버스정류장에 들어오는 첫버스를 탔다.
경유지가 어딘지, 종착지가 어딘지도 보지 않았다.
열린 창문 너머로 뜨거운 아스팔트의 열기와 매연속으로
도로옆 플라타너스는 계속 따라오며, 젊은 날의 낭만을 이야기 했다.
종점을 알리는 버스의 힘겨운 트림 소리에 밀려 내린곳은 팔공산 밑에 있는
동화사라는 절.
더운 한낮이라 그런지 찾는이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을 앞에 두고 걸었다.
더웠다.
佛心이 충만해서 찾은 절도 아니고, 여자친구랑 데이트로 걷는 길도 아니기에
더 덥고, 무료했다.
그냥 그렇게 절을 한번 휘 둘러보고,
바람결에 온길을 다시 허느적거리며 돌아갔다.
그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도 분명하게 기억나는건
-고승의 해탈과는 당연히 다르겠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젊은 시절, 휴일날 오후 몇시간을 텅비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그 몇시간이 지금까지 기억에 있다.
다 자라서 처음 찾는 절앞에서도 '한번 와 봤던가?' 라며 나도 모를 기시감이 드는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과 느낌도 없었던 그 몇시간이 30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것도 참 아이러니 하다.
퇴근시간. 지하주차장
19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이뇨감이 느껴진다.
그냥 참고 탔다.
8층까지 올라가는 1~2분이 왜그리 긴지....
똥마려운 강아지 처럼 낑낑거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복잡한 물리학적 이론은 모르지만,
'한마디로 사람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거'
10대의 한여름 오후의 몇시간과 40대의 엘리베이터 속의 몇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기야, 그 모든 시간은 나를 통해 흘렀으니.....
집앞 승강장에 있는 잘려나간 플라타너스 나무 둥치가 가로등 빛에 어둡다.
이번 건강검진때에는 아내 모르게 전립선 검사라도 한번 받아봐야겠다.
2018. 11.21. ㅅㅓㄱㅣ